Daniel Markovits, The Meritocracy Trap


게으른 부자가 지배하는 사회, 부지런한 엘리트 일꾼이 리드하는 세상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놀랍다. 구독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관심 있는 동영상이 떡하니. 물론 엉뚱한 영상도 간혹 올라온다. 싫어요를 눌렀는데 좋아하는 줄 알고. 오늘 아침엔 엉뚱하게 조승연의 탐구생활이 화면에 떴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도 잘 몰랐는데. 아무튼 영상을 눌러보니 신작 소개였다. 


책 제목은 Meritocracy Trap. 우리말로 하면 능력주의 사회의 함정. 저자는 Daniel Markovits 예일대 법대 교수. 핵심 내용은 현대사회는 능력 있는 엘리트들이 이끌고 있으며 그 결과 상류층간에 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 한편 중산층의 자산은 점점 쪼그라들어 하류층과의 격차가 줄어들어 사회안전망이 흔들린다. 더욱 큰 문제는 능력 엘리트들이 물적 자산이 아닌 인적자산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에 주변 사람은 물론 스스로도 착취의 함정에 빠진다. 부가 행복을 증명하지 못하게 된다.


과장된 내용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조승연 씨의 말처럼 기존 사고에 도전하는 새로운 접근에 일단 박수를 보낸다. 한국사회가 아직 그 정도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수익창출의 구조를 보면 소수가 다수를 먹여 살리는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곧 능력 있는 스타들만이 살아남는다. 앞으로 신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고도화될수록 이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게으른 부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부지런한 엘리트 일꾼이 리드하는 세상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능력이 유일한 기준이 되면 소수뿐만 아니라 다수도 강요받는다. 곧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이제 어느덧 흔한 단어가 된 스펙이 그 예다. 언제부턴가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토익 몇 점 이상, 해외어학연수는 기본, 봉사점수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 초등학생들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라도 학원에 가야 한다. 강남 아파트먼트에 사는 게 하나의 신분이 된다.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하자는 건 아니다. 귀족사회가 영원불멸의 음악과 미술을 남겼다고 해서 그 바탕에는 대중의 피와 땀이 있었다는 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대에는 예기치 못한 문제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단 추이를 면밀하게 관찰하자.


덧붙이는 말


좋은 책을 소개해 준 조승연씨에게 감사한다.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면 읽어보고 추가할 내용이 있다면 따로 글을 쓰겠다. 


동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8Vy2tGaw0Eo


사진 출처: https://theberkshireedge.com/book-review-the-meritocracy-trap-the-rich-and-th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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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다시피’ ‘ 내 생각에는’


<영어 한마디>난을 유심히 보는 분이라면 글쓴이가 영어를 마치 위대한 언어인 것처럼 말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내 나름으로는 우리 말 어감과 다른 영어의 특징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작심하고 영어를 비판하겠다.


사실 어느 언어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영어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함께 쓰면서 변형도 많이 된다. 당연히 거슬리는 표현이 생긴다. 대표적인 예는 You know다. 우리말로 하면 '당신도 알다시피'지만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쓴다. 곧 말 사이 비는 공간에 별 생각 없이 끼워놓는거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교육수준이 다소 떨어지거나 영미권이 아닌 3세계, 특히 동남아에서 많이 사용한다. 문제는 이 표현이 매우 거슬린다는 사실이다. 심할 때는 대화 내내 You know만 듣다 끝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발 부탁이니 '그 말 좀 하지 말아줄래'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최근 영어라디오 방송인 티비에스이에프엠을 즐겨 듣는다. 흥미로운 점은 진행자에 따라 현격하게 You know를 사용하는 빈도가 다르다. 구체적으로 아침 9시 프로그램 진행자인 나승연씨는 단 한 번도 이 표현을 쓰는 걸 들은 적이 없다. 반면 동남아 출신 여성 엠씨는 말끝마다 You know를 달고 산다. 다행히(?) 지금은 마이크를 내려놓아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지만. 


우리나라만큼 영어교육 열풍이 거센 나라도 드물다. 문법 따위는 필요 없고 무조건 말만 배우면 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필리핀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왕 영어를 배울 거면 제대로 익혀야 한다. 어차피 영어권 나라 처지에서 우리는 외국인이다, 자신들처럼 유창하게 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괜히 어설프게 슬랭 비슷한 말을 빨리 하는 것보다는 느리더라도 천천히 정확하게 말하면 된다. 


덧붙이는 말


문맥상 ‘You know’를 써야 할 때도 있다. ‘As you know’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도 있지만 왠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그럴 때는 ‘(What) I mean’이라고 하는 게 훨씬 부드럽다. ‘너도 알다시피’는 당연히 네가 알아야 하는데 모르니 답답하다는 느낌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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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는 일의 항목을 하나씩 지워나가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줄곧 말했다. 맞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인 60대 초반에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줄곧 불안했다. 벌여놓는 사업은 늘 위태로웠고 사망 당시에도 상당한 액수의 빚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가족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급기야 장례식장에 빚쟁이가 찾아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집은 날리지 않았다는 거다. 


내 삶은 성공적인가?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실 나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시간보다 많으니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외형적으로는 실패다. 이른바 내 나이쯤의 한국 사람이 누려야할 평균적인 삶에서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고 자식들을 건사하고 노후를 착실히 준비하는.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평균의 삶이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나름의 고민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생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나누는 건 옳지 않다. 아버지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니 아무래도 실패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리라.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절대적 실패인가? 핵심은 사망이 아니라 그 지점에 이르러 삶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스럽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후회스럽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탄식하지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다행히(?) 나는 요령껏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해왔다. 


물론 이렇게 된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누구 못지않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았다. 정직하게 말해 지금도 이렇게 사는 게 바른지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은 몸과 마음이 바로 알아본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앞으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 곧 하고 싶은 일을 늘리기 보다는 내키지 않는 일의 항목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는. 역설적으로 그러다보면 저절로 하고자 하는 일이 생기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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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러그에 글을 써서 올린지도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가장 열심히 활동한(?) 기간은 2018년이다. 통계를 보니 2017년부터 부쩍 많이 썼다. 그 전에는 다른 블러그에 글을 남기곤 했는데 애석하게도 폐쇄되었다. 습관적으로 글을 쓰던 곳이라 따로 파일로 받아놓지도 못했다. 많이 아쉽다.

 

그러나 2019년 들어서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아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지난 1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마에 시달렸다. 좋아하던 글쓰기나 음악듣기도 남의 일이었다. 더구나 거의 유일한 오래된 취미인 등산을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일주일에 한번 산에 가기는 어느덧 나의 일상이 되었다. 아무리 날씨기 좋지 않고 컨디션이 나빠도 일단 산 입구에 서면 새로운 설렘을 느끼곤 했다. 그런 등산을 못했으니. 다행히 수영은 빼놓지 않았고, 일종의 재활치료로 물속에서 걷기만 했지만, 기적적으로 댄스 스쿨도 빠지지 않았다. 뼈가 부서지지 않는 한 춤 수업은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 통했다.

 

그렇게 서서히 몸이 좋아지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기력을 찾았다. 가장 먼저 새로 시작한 일은 역시 글쓰기다. 글이란 게 묘해서 쓰기 전에는 그것처럼 막막한 게 없다. 커서의 깜빡임만 노려보다가 노트북을 덮기도 수십 차례. 그러나 희한하게도 실마리를 잡으면 글쓰기처럼 쉽게 전진하는 것도 없다. 지금 이 글도 그렇다. 오늘은 글 소재도 없으니 패스, 라고 다짐했지만 의자에 앉아 다시 모니터를 마주보니 또다시 글감이 떠오른다. 누가 뭐래도 글쓰기는 좋은 치유제다. 치료제까지는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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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詩作 -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 지음, 김승일 옮김 / 비아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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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제목은 위트가 넘치지만 번역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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