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의 노래, 신인, 앨범, 레코드 상을 싹쓸이하고
덤으로 베스트 팝 보컬 앨범상까지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
2020년 62회 그래미 음악상 시상식
그래미 음악상 시상식을 챙겨 보기 시작한 지는 약 10년 쯤 된다. 처음엔 우연히 보게 되었고 지금은 가장 기다리는 행사가 되었다. 20년째 진행자 자리를 놓치 않고 있는 배철수, 임진모 씨 덕이다. 이 두 분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최신 곡을 늘 챙겨 듣고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혹시 우리말로 옮기면 전미국음악상에 불과한 행사에 왜 이리 열광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음악에 국경이 없으며, 그래미는 대중음악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다고 답하겠다.
올해는 때를 놓쳤다. 새해 초 크게 아프면서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 덕(?)에 빈 필도 건너뛰고 그래미는 언제 하는지도 몰랐다. 다행히 재방송을 해주어 알람까지 신청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했다. 단순히 누가 상을 받는지 여부보다 멋진 퍼포먼스가 기다려지는 행사답게 첫 등장부터 충격 그 자체였다. 육중한(?) 몸매보다 노래 식력으로 유명한 리조가 플롯 실력까지 뽐내며 무대를 뒤흔들었다. 마치, 나 이렇게 잘해하며 과시하고 있다고나 할까? 외모로 나를 평가하지 말라구, 제발.
진행자는 작년에 이어 또다시 앨리샤 카스. 다재다능의 표본인 그가 올해는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의 갑작스런 비보를 전하며 막을 열었다. 잠시의 추도가 끝나자 그는 이제 우리가 할 일을 하자며 씩씩하게 시상식을 이끌어갔다. 프린스 추모 공연에서 에어로스미스 결성 50주년 축하무대까지, 게다가 런 디엠씨와의 콜라보라니. 오 마이갓, 눈을 뗄 수 없는 호화로운 공연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메인 상인 4개 부문을 수상할 무렵부터 분위기가 싸해졌다. 빌리 아일리시가 올해의 노래와 신인 아티스트 상을 받을 때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나 앨범상에 이어 레코드상까지 이른바 4대 천왕을 달성하다니. 객석도 술렁이고 아일리시 스스로도 앨범 상은 아리아나 그란데가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고 마지막 레코드 상을 받고서는 그냥 땡큐라는 말만하고 바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건 그야말로 그래미의 폭거이며, 빌리가 백인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몇 년 전 비욘세를 따돌린 아델과 다를 게 무엇인가? 동시에 걱정도 앞선다. 2001년생에 불과한 빌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중압감에 시달릴까? 행여 그릇된 판단을 하는 건 아닐까?
사실 4개 부문 수상전까지만 해도 이 글의 제목을 음악 아래 우리는 평등이라고 거의 확정지었다. 그래미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 힙합을 받아들이고 흑인을 주류로 인정하는 무대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랩과 노래(Rap and Sung) 퍼포먼스 상까지 새로 신설하고, 그러나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정작 시상은 백인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잘 차려진 정찬을 맛있게 먹었지만 디저트가 꽝인 기분이랄까? 결국 제목에 물음표를 덧붙였다.
덧붙이는 말
올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방탄소년단도 등장했다. 작년에는 시상자로 나왔지만 이번에는 무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래퍼 릴 나스 엑스 공연의 병풍정도로 나오는 걸 보고 정직하게 말해 실망했다. 협연 자체가 영광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직까지 케이팝은 비주류이고 중심에 서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벽이 있음을 새삼 느꼈다. 역으로 댄스음악이 과연 진정한 음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생겼다. 음악 자체를 경멸하는 게 아니라 악기를 다루고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게 아닌가라는 의미다. 물론 보컬실력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