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젠장


낡은 아파트먼트, 정확하게는 36년 된, 에 살다보니 이래저래 성한 곳이 없다. 안방 전등이 나가서 고치면 욕조 수도꼭지가 말썽을 피우고 왕창 전체를 뜯어 갈고나면 윗집에서 물이 줄줄 새 벽에 번지는 식이다. 이럴 때 나는 관리실에 이야기하기 보다는 단지 내 수리 출장하는 분을 부른다. 당연히 돈이 더 들지만 깔끔하게 잘 마무리해주시기 때문이다. 수리비를 왜 꼬박꼬박 관리비에 포함시키는지 화가 나지만. 그 분을 볼 때마다 일머리는 따로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미리 어떻게 고칠지 구상을 딱 하고 능숙하게 일을 추진해나간다.


작가는 글머리가 있어야 한다. 독자가 어떤 글을 읽고 싶어 하고 어느 지점에서 손에 땀이 나는지 잘 알아야 한다. 또한 결말에 이르러 후련한 기분이 들게 하기위한 특별한 장치들을 늘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해야 한다, 특히 첫 문장은 소설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상징이다. 최근 영국에서 글의 첫 문장을 보고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척척 알아맞히는 학생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을 정도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은 후 혹평을 하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그러나 기분전환도 할 겸 펼쳐 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고 확신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동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기분이 드시는가? 요즘말로 투머치 토커의 정석이다,라고 나는 느꼈다. 정보는 지나칠 정도로 충실히 제공하고 있지만 호기심은 일(1)도 생기지 않는다.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전혀 궁금하지 않다.


'9월 21일, 가고시마에서 묵는 날"


이번엔 어떤가? 와우, 놀랍지 않은가? 무슨 상황이지? 왜 하필이면 가고시마지? 불륜인가? 누가 죽었나?(책 제목이 연상되어서) 최소한의 사실로 엄청난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가?


먼저 소개한 글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첫 문장이고, 두 번째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살인 현장은 구름 위>다. 어떤 출발이 사람의 마음을 확 잡아끄는가? 내가 만약 김영하였다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을 것이다. 


"푸동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젠장. 크리스마스이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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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글은 읽기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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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작가 김영하는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그에게는 교수라는 직함이 더 잘 어울린다. 혹은 평론가. 단지 지적이어서는 아니다. 문제는 문체다. 물론 소설가에게도 자기만의 글 폼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하건 독자에게 읽혀야 한다. 유감이지만 김영하의 글은 보다보면 혓속에 바늘이 돋운 것처럼 계속 껄끄럽다. 자연스레 글 읽기에 속도나 나지 않는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이유는 문장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책에서 '~했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왜 '~했다"라고 쓰면 안 되는가? 번역가 안정효 선생은 우리글을 망치는 주범으로 '~것이다'를 들었다. 


<여행의 이유>는 작심하고 썼다기에는 주제도 일관되지 않다. 여행 경험담인지, 집필이력인지, 추억팔이인지, 작가 노트인지, 오디세우스 소개 책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썼던 글을 하나로 모아 책을 냈다는 느낌이 든다. 간혹 빛나는 글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보다는 평론을 써보시면 어떨까 권하고 싶다. 그의 글은 지나치게 지적이며 권위적이다. 설명이나 해석이 많고 살아있는 대사를 살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설속 등장인물의 성격 파악을 위해 스프레드시트까지 동원하여 분석한다는 내용을 보고는 솔직히 좀 질렸다.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여 완제품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헤밍웨이도 하루키도 스티븐 킹도 그리고 김영하가 흠모하는 카프카도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노트를 펴고 혹은 랩탑의 전원을 켜고 하염없이 글이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쓰고 고치고 쓰고 또 고쳤다.  


덧붙이는 글


개인적으로 김영하를 좋아한다. 단 작가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알쓸신잡>은 그의 장기가 잘 발휘된 방송 프로그램이다. 왜 자신에게 맞는 일을 버리고 좋아하는 글 작업을 하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내가 관여할 건 아니다. 다만 문장은 제발 부탁이니 신경 써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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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 너머에는 어떤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나는 왜 태어났지? 캐롤라인 아니 코렐라인?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지금이라면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심장을 뒤흔들었다.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 티브이에서 본 귀신 때문에 밤 잠 설치기, 놀다 잊어버린 실내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사변은 이사였다. 정든 집과 이웃, 학교 선생님과 동무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상실감은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코렐라인>의 시작도 새 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제각각 일에 바쁘지만 코렐라인은 모든 것이 낯설다. 새로 만난 또래 아이도 괴상망측하고 한 집에 세 들어 사는 인간들도 괴팍하다. 어딘가 자신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진짜 부모나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가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낡아빠진 자기를 닮은 인형하나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엄마 아빠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 

 

아이 때 받았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언젠가 서서히 드러난다. 곪아터진 자국이 덧나지 않게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행히 코렐라인은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택한다. 이런 저런 괴로움에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순간 적어도 한가지만은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나는 왜 태어났지? 그냥 세상에 나왔으니까 살아 온 건가? 아니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건가? <코렐라인>을 보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보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나는 이 영화를 극강공포라고 소개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위안을 받았다, 가 더 적확한 내 소감이다. 꽤 잔인한 장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들의 심정을 다시 깨듣는 계기도 되었다. 인생 끝장낼 듯이 울어재끼다가도 금세 울음을 뚝 그치고 생글거린다.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고 알았다. 아이들은 순간을 살기에 감정 또한 그 때 그 때 상황에 적응한다. 곧 아무리 낯선 상황에 부딪쳐서도 과거는 금세 잊어버리고 새로운 처지에 금세 적응한다. 참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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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새해를 여는 음악으로는 왈츠가 최고

 

새해를 맞이하는 감흥은 매년 다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설렘이나 기쁨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오로지 건강만이 한 해의 기원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매년 빼놓지 않는 행사가 있다. 해돋이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보고 듣는 거다. 최근에는 극장을 빌려 라이브로 즐긴다고 하는데 나는 소박하게(?) 케이비에스의 녹화방송을 시청한다.


그러나 올해는 첫날 크게 아파 이삼일이상 헤매다보니 놓치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1월 5일 밤 12시 넘어 방영했다. 왜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는지 늘 아쉽다. 깜빡하면 지나치니까. 내 기억으로는 설 쯤 다시 재방송을 해주곤 하던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이런저런 경로로 다시 볼 방법을 찾다 실황중계를 알게 되었다. 한국방송공사 클래식 에프엠에서 다시 듣기가 가능했다. 중간 중간 진행자의 설명이 다소 사족 같고 눈으로 새해 첫날 공연의 현장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역설적으로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 면도 있다. 


올해의 지휘자는 안드리스 넬슨스. 곡목은 언제나처럼 요한 스트라우스의 음악이 주고 라데츠키도 빼놓지 않았다. 늘 비슷비슷하지만 역시 새해를 여는 데는 왈츠만한 것이 없지.


덧붙이는 글


2020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다시 듣기 사이트. 빈 필 외에 다양한 라이브 공연도 즐길 수 있다.


http://program.kbs.co.kr/1fm/radio/fmlive/pc/


http://vertical.kbs.co.kr/popup.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R2019-0173&program_id=PS-2019220505-01-000§ion_code=99&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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