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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평점 :
내게는 사소한(?) 강박증이 있다. 나뭇가지를 걸개 삼아 걸어놓은 플랭카드를 보면 마구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 자연을 그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읽으나마나한 글귀로 방해를 하고 있는가? 어느 순간 도처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멸등 신호등도 마찬가지로 거슬린다. 차에 타고 있다가 점멸등을 보면 천천히 가기 보다는 더욱 더 빨리 달리고 싶다. 보행중일 때는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린다.
환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도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종일 켯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신호등 불빛이 싫어 도심에 들어가기 괴로워진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가들 대부분은 강박증을 앓고 있는데, 필립 딕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닥치고 쓴 글들은 불행하게도 사후에 빛을 발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역설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기에 탄생한 걸작들이다. 시도 때도 없이 오페라곡을 틀어놓고 광기에 휩싸여 써내려간 결과물이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그의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짧게는 한장짜리에서 길어봤다 15페이지 내외의 작품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나는 이 중에서 <전자 개미>를 으뜸으로 꼽는다. 자동차 사고로 병원을 찾은 폴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사이보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느낌을 받은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살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프로그램이라, 내 안 어딘가에, 특정한 생각을 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제어하는 장치가 들어있다는 거잖아."
나는 강박하는 기계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 처하면 바로 불쾌한 반응을 하는 장치가 내 몸 어딘가에 있는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건 나나 딕 만이 아니다. 카프카도 그랬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해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처음엔 본인은 물론 가족조차 믿지 못했지만 서서히 적응해 가다 결국 잊혀질 위기에 처한다. 급기야는 귀찮은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필립은 겉으로는 사이언스 픽션 작가였지만 사실은 인간의 본질을 다룬 글쟁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느끼기 마련인 감정이 왜 소중한지 밝히고 있다. 단지 기쁘거나 즐겁지 않더라도 비록 짜증나거나 슬프더라도 감정이 사라져가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중국집 주인과의 전화통화마저 귀찮아 혹은 두려워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인간들에게 딕은 당신이 사람 맞느냐고 묻고 있다. 인류는 점점 기계를 닮아가려 기를 쓰고 머신은 도리어 휴먼냄새를 풍기고 싶어하는 미래사회에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해메고 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은 숨긴채 휴대전화의 노예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