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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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회고전이 필요할 정도로 다작을 한 작가이다. 단편, 장편, 에세이, 대담 등 장르도 다양하다.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잡학다식이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비슷비슷한 톤이라는 것. 작곡가로 치면 같은 변주를 끝없이 반복하며 방대한 작품을 남긴 비발디같다고 할까?

 

<반딧불이>는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을 모은 것인데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헛간을 태우다>가 영화 <버닝>의 모티브가 되며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소설과는 설정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르다. 영화가 청년의 계급성에 주목을 했다면 소설은 허무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정사를 하고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어느날 사라졌다는 믿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하루키를 함부로 욕해서는 안된다. 물론 뭔가 의미심장함이 있을거라고 밑줄 지으며 읽을 필요도 없다. 이미 잘 알려져있듯이 그의 장기는 스타일이다. 정갈한 문장과 담백한 표현으로 시종일관 톤을 유지하고 있다. 생각보다 이런 글을 쓰기란 매우 어렵다. 자기만의 루틴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쓰고 지우기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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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센스 - 뇌신경과학자의 감각 탐험기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9
마테오 파리넬라 지음, 황승구 옮김, 정수영 감수 / 푸른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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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2리터의 석유를 들고 술집을 찾았다.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 왔구나.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소리를 또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10년전에 술값으로 10만원이 나왔는데 20만 원 냈잖아. 이런 개XX. 사기를 쳐. 내가 그걸 잊을 것 같아."

 

그렇게 떠들다 갈 줄 알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석유를 바닥에 뿌리고 라이트에 불을 붙인후 던져버렸다.

 

2.

 

그는 남편의 친구였다.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대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용돈이 궁했던 딸은 남편을 졸랐다. 용돈 올려주지 않을거면 알바라도 하게 해달라고. 정 그렇다면 아는 사람 가게가 낳겠지 싶어 소개시켜 줬는데 아뿔싸. 둘이 함께 차를 타고 간 날 저녁에 딸은 사라지고 친구는 목을 매 죽었다.

 

3.

 

이른바 엽기사건을 접하면 당장 드는 생각은 분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떠오르는건 심리다. 곧 어떤 마음 상태로 그런 짓을 했는가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의 속내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번행을 저지를 때 눈은 얼마나 팽창하고 귀는 얼마나 빨개지고 혀는 얼마나 메마르는지 알고 싶다.

 

<센스>는 감각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주제의 책(감각의 미래)을 미리 읽은 덕에 훨씬 더 생생하게 전해졌다. 특히 미각중 하나인 감칠맛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단맛, 쓴맛, 신맛, 쓴맛이 아닌 일종의 풍미라는 새로운 감각의 탄생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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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미래 - 최신 인지과학으로 보는 몸의 감각과 뇌의 인식
카라 플라토니 지음, 박지선 옮김, 이정모 감수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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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생을 마감한다는 건 모든 감각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귀신이나 유령을 보아도 벽이나 사람을 그냥 통과하지 않는가? 물론 상상력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과학적 통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감각을 갖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는 모든 행위야말로 신(?)이 창조한 조화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말해 이런 감각이 이그러졌을 때 사람들은 병이 든다.

 

흥미로운 건 어떻게 감각이 왜곡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서야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위에 다리를 부딪치면 당연히 아프고 심하면 병원에 가는데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돌연 파혼을 선언하고 아무 이유없이 떠났을 때는 아무도 치료를 권하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느니 잊으라느니 하는 하나마나한 권유들만 넘쳐난다. 그중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문제는 외부의 상처와 내면의 아픔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 고통 또한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막상막하다.

 

"고통이라는 반응은 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학습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각의 미래>는 뇌의 지배와 감각의 관계를 세분하여 살펴보고 가상현실을 포함한 감각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다소 지루한 면이 있지만 건너뛰고 필요한 내용만 읽어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감각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며 그 차이는 유전자에 기인한다는 설명이 가장 와닿는다. 결국 실체란 없으며 보는 시각이나 경험 그리고 디엔에이에 따라 다르다. 이 말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 하지 말고 자신에 대해 잘 안 다음 거슬리는 것들은 잘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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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20 : 오스만제국과 튀르키예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20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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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선생의 만화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접했다. 새소년에 연재되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그는 유학생 신분으로 만화와 서양 역사를 결합한 시도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원복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린 계기는 <먼나라 이웃나라>이다. 방대한 자료와 해박한 해석으로 이른바 교양만화의 일인자로 올라섰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가 시즌2로 돌아왔다. 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거들먹거리며 원로 소리 들어도 뭐라 그럴 사람 없는 한국사회에서 직접 총대(?)를 맨 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20 : 오스만제국과 터키>는 그의 장기가 잘 발휘된 작품이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을 깨고 오스만 제국의 기원과 변천 그리고 오늘날 터키라는 나라로 집약된 트루크 족을 제대로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잘못 이해하고 있던 부분을 고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건강 유의하시면서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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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불은 몸으로 링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토냐 하딩의 사진을 본 순간 언젠가 분명히 그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최고의 피겨 선수가 나락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어떤 제작자가 달라붙지 않겠는가?

 

오직 피겨밖에 몰랐던 토냐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아이 토냐>를 보며 몇 몇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스케이팅 김보름 선수부터 피겨의 아사다 마오까지. 누구보다 빼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정상에 서지 못했거나 혹은 국민 밉상으로 찍힌. 토냐 하딩은 이 둘을 겸비하고 있었다. 미국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액셀을 성공하며 실력만큼은 최고라고 인정받았지만 불같은 성격과 거친 언사로 늘 주류로부터는 외면을 받아왔다.

 

반면 그녀의 라이벌 낸시 캘리건은 누구나 좋아할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예쁜 얼굴과 우아한 매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낸시의 무릎을 박살내버리리라고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도 토냐 남편의 사주로.

 

결과적으로 둘은 올림픽에 출전하고 낸시는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토냐는 8위에 그쳤다. 이후 토냐는 피계계에서 영구제명되고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가는줄 알았는데 어느날 뜻밖에 권투선수로 등장하여 또다시 국민악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말았다.

 

영화는 다큐 형식을 취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블랙 코미디로 이끌어간다. 마냥 토냐를 응원하거나 그렇다고 낸시를 의심하지 않고 담담히 하딩의 내면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적으로 쫓아가고 있다. 오직 피계밖에 몰랐던 토냐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라는 화두를 남긴채.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평창 동계올림픽도 어느덧 가물가물한 기억이 되고 말았다. 한국팀이 몇개의 금메달을 땄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팀추월을 둘러싼 장면은 각인처럼 남아 있다. 과연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수들 사이에는 어떤 감정들이 오고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야기의 소재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말

 

<아이 토냐>를 보며 새삼 영화, 더 넓게는 문화분야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나 소외자에 조명을 맞추기 마련이다. 토냐 하딩도 그렇다. 이름 자체가 혐오감과 동일시된 그녀가 이렇게나마 부활(?)할 수 있는건 문화의 힘 덕이다. 예술은 도덕적 잣대에는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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