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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내가 어릴 적 살던 집은 주택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있었고 방은 두개였고 부엌방이 따로 있었다. 이층집은 아니었지만 철제계단을 이용하여 옥상에 갈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한 때 닭을 키우기도 했고 여름이면 간이 이층침대를 놓고 별을 보며 잠이 들기도 했다. 시골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먼트에 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갇히고 마는 닭장집이다. 아무리 평수가 넓어도 이런 시스템은 거의 같다. 희한한 건 우리나라가 발전한게 맞는데 주거환경은 도리어 후퇴한 느낌이 든다. 무슨 소리냐, 아파트가 얼마나 살기 편한데라고 반발할 사람도 있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파트는 임시주거시설에 불과하다. 집이 갖추어야 요소들을 박스안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땅을 밟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곳을 어떻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유현준은 말도 잘하고 글도 꽤 쓰는 다재다능한 학자다. 그럼에도 날카롭다. 겉보기와 달리 매우 파격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학교건물은 교도소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백번 공감한다. 내가 다녔던 과거에도 지금도 학교는 통제의 수단에 머물고 있고 그 특징은 건물에서 잘 드러난다. 막사를 떠올리게 하는 학교건물과 연병장이나 다름없는 운동장을 보라. 그곳에서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동안 꼼짝없이 수용당한다.
집이라고 다를게 무엇이 있겠는가? 단지는 일종의 폐쇄공간이다. 아파트 자체도 갇혀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동네 자체를 격리시킨다. 이런 단지들이 쭉 늘어서 비싼 값에 팔린다. 평당 시세나 교통시설 혹은 학군을 떠나 이런 집을 과연 영혼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을까?
전원주택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언뜻 보면 그림같아보이지만 실상 가보면 난개발도 이런 난개발이 따로 없다. 산을 깎고 하천을 오염시키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예술 주택을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을 찾자면 우리나라는 복잡다단한 주택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노력만 하면 선택의 여지가 넓다. 곧 자신의 우선순위를 정해 집을 고를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주택에 대한 오랜 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이곳저곳 알아보면서 깨달은 것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소중함이다. 변변한 시설은 없지만 아파트먼트 바깥만 나가면 바로 접할 수 있는 산과 강 그리고 편리한 대중교통시설은 흔하게 얻을 수 없는 축복이다.
유현준도 말한다. 뉴욕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좁은 집에 살지만 차이가 있다면 뉴욕은 집만 나가면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는 벤치와 공원이 지천이라는 것. 그 말이 내 뇌리를 때리면 더이상의 주저함을 가라앉혔다. 그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집이 아니라 지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