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근사한 사람이 되야지
작가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호칭이다. 꼭 신춘문예에서 상을 받고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지 않더라도. 그건 일종의 다른 사람의 시선이다. 진짜 글쟁이는 자기 자신이 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순간이 섬광처럼 '팟'하고 온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어깨에 잔뜩 얹어진 눈을 터는데 그 눈이 단어나 문장으로 변하며 머리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거슬리는 것을 보고나 듣거나 느끼면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경향이 있다. 심할 때는 바로 고쳐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지 못하면 그 생각이 계속 남아 나를 괴롭혔다. 심지어는 가벼운 우울증 증세까지 생기곤 했다. 그러나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 내가 택한 방법은 회피였다. 곧 한번 찍어놓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같은 상황에 놓이면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심리학에서는 도리어 반복적으로 노출함으로써 별게 아니라는 자각을 하는게 더 낫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맞지 않았다.
어쩌면 직업적인 거부반응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작가란 자유재래로 감정을 꺼내어 조합하는 사람이다. 강박과 집착은 일종의 생계수단인 셈이다. 의자에 다시 앉았는데 책상위 연필의 각도가 내가 놓았던 것과 달리 살짝 삐뜰어져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 마음속 수억겹의 결을 헤치고 들어가 미묘하지만 확실한 그 무엇인가를 발견해낼 수 있겠는가? 소설가는 스스로에게 부여된 천형같은 성격을 결코 고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까지 그렇게 생활하면 두뇌가 터져버릴 것이다. 하루키가 왜 아침마다 10킬로미터 이상씩 뛰고 김영하가 글을 일정 정도 쓰고나면 요리하는데 몰두를 하겠는가? 긴장된 마음을 이완시키기 위해서다. 글씨기와 기타 시간을 철저하게 분리시키지 않으면 무너져내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에도 또 병이 도졌다. 며칠전부터 꺼림직하게 여겨지던 현상을 재확인하고 몸 속 어딘가의 신경이 살짝 곤두섰다. 어떻게 할까? 확인하고 내가 기억하던 모습으로 되돌릴까? 아니면 무시할까? 결국 집안에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다 '퍽'하고 터져버렸다. 계속 진도를 나갈까? 말까?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차마 다 말하기가 그래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관점을 바꾸어 보자. 작가가 아닌 생활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미친짓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그런 짓을 하는게 아니지 않는가? 영화 <지랄발광 17세>에서 수업 내용중 작은 실수를 꼬투리 삼아 선생에게 충고입네 하며 지끌여대던 학생에게 선생은 말한다. 만약 지금 네가 이처럼 하찮은 일에 쏟아붓는 열정을 보다 중요한 일에 활용하면 어떻겠니?
깨달음이 왔다. 내가 행했던 쓸모없는 열정들의 결과들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다행이다. 나는 어제보더 더 나은 작가가 되는 것 못지 않게 근사한 인간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뭔가 이상 증후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는 마음 속에 거울이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려는 행동을 미추어 보렴. 얼마나 추한지 바로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