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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없는 말 - 현대 미니멀리즘 음악의 살아 있는 거장, 필립 글래스 자서전
필립 글래스 (Philip Glass) 지음, 이석호 옮김 / 프란츠 / 2017년 9월
평점 :
소위 서양의 유명한 예술가들을 보면 판에 찍은 듯한 이력은 단 한명도 없다. 다 제각각이다. 필립 글래스도 예외가 아니다. 열 다섯 살에 시키고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니 천재임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건 다양한 공부를 섭렵한 후 줄리어드 음악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로 치면 중학교 마치고 바로 카이스트에 간 친구가 조기 졸업을 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에 입학한 셈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음대를 마치고도 나이 40이 될 때까지 이삿짐센터, 공사판 일꾼, 배관공, 택시운전사를 일했다는 소식에는 놀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근사한 학력을 배경삼아 폼나는 직업을 가질 수는 없었을까? 평소 미국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단 한가지는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청교도 정신이다. 곧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괜찮지만 머리를 굴려 남의 등을 처먹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모든 체험은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가 룸펜처럼 음대 교수짓이나 하면서 현학적인 세상에 머물렀다면 그의 미니멀리즘은 씨앗조차 뿌리지 못했을 것이다. 글래스의 팬으로서 애타게 기다리던 책이 드디어 나왔다. 유령작가도 아닌 본인 스스로 썼다는 점에서 그 감동은 배가 된다. 또 한가지 부러운 건 그가 음악을 전업으로 삼기 위해 줄리어드에 도전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보인 태도다. 플루트 전공으로 시험을 본 필립에게 한 교수는 연주가 끝나자 이렇게 되물었다.
"글래스 씨, 정말 플루티스트가 되고 싶습니까?"
" 그게 실은 ..., 작곡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작곡 시험을 봐야지요."
"그럴 준비는 아직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면 이번 가을 우리 학교의 공개강좌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게 어때요? 음악 이론과 작곡 강좌도 있어요. 얼마간 곡을 쓰면서 경험도 쌓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정식으로 오디션을 보는 걸로 합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국에서 치른 어떤 면접 시험에서도 이런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죄다 목과 어깨에 힘을 주고 심판자 행세를 하기에 급급했을 뿐 정작 내가 왜 시험을 봤으며 자신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