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라, 이거 뭐미?

 

차라리 미스터리로 가든지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오늘 내가 쓴 글은 어떤 형태든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침 내내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이러 저리 할인율을 맞추느라 진을 빼고 정작 글을 쓸려고 할 때는 기운이 다 빠졌다는 사실은 나밖에 알지 못한다. 그렇게까지 자질구레한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혹시 아는가 그 때의 헛짓이 나중에 큰 업적으로 돌아올지.

 

미이라는 과거 인류가 살았다는 강력한 증거다. 만약 피라미드가 없었다면 당시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불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낳은 헛된 짓거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덕에 당시의 상황을 빠짐없이 알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상영할 때는 단지 돈을 받고 관객을 받는 것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고스란히 역사가 된다. <미이라>는 소재 자체부터 관심을 확 끌어당긴다. 공룡과 더불어 어린 시절 미이라만큼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가 있었을까? 게다가 공룡은 죄다 사라졌지만 미이라는 엄연히 살아있다(?).

 

자,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고 게다가 주인공은 톰 크루즈. 이건 흥행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다. 미이라를 둘러싼 거친 앤셕을 기대하며 화면을 응시하는데 뜨아.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간다. 악몽에 시달렸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었고, 그 배후에는 전문집단이 있고. 아, 뭐야 이건. 차라리 미스터리로 가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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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
데이브 언윈 감독, 케이트 윈슬렛 외 목소리 / 에이프릴엔터테인먼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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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건 <눈사람>이다. 녹아 없어져버리는 결말이 매우 슬프지만 인상적인 주제곡인 '워킹 인 디 에어'의 선율이 아픔을 차분하게 감싸는. 겨울이면 가끔 다시 꺼내어 보곤 한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영국군과 독일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장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사소한 계기로 양 진영은 축구를 하게 된다. 눈밭에서 뒹굴던 그들은 잠시나마 전쟁의 아픔도 잊고 서로를 위로하는데.

 

애니는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혹은 권력자의 아집으로 내몰릴 뿐이다. 내가 죽이려고 하는 상대방에게는 가족이 있고 내게도 누구보다 소중한 축구 팀 맴버가 있다. 과연 이런 사실을 알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는 왜 여전히 철책선을 두르고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분단의 사슬을 끊고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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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돈 조반니 - 한글자막 포함
유니버설뮤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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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조반니>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다. 꼭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하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무거움이 전체를 감싸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유의 발랄함도 잊지 않고 있다. 일종의 희비극이랄까? 바람둥이 귀족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당시 매우 흔한 소재였다. 그만큼 골려먹기 좋으면서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부분은 조롱을 받고 반성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돈 조반니>는 저주를 받아 죽어버린다. 더우기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박박 개긴다.

 

제임스 레바인은 장중하면서도 유쾌한 이 오페라를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끌고 나간다. 마치 보는 내가 객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감정이 전달된 정도로. 우리에게는 체를리나 역으로 홍혜경이 나와 반갑지만 정직하게 말해 안나 네프렙코의 연기를 워낙 인상깊게 본 터라 썩 와닿지는 않았다. 홍혜경은 시골처녀보다는 귀족 부인이 더 어울리는데. 뭐 사이먼 킴리사이드의 무시무시한 몰입도로 상쇄하고도 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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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준지 자선 걸작집
이토 준지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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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논문을 제출할 때 반드시 실험노트를 함께 낸다. 곧 어떤 가설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결론을 도출했는지를 밝힌다. 다른 누가 해도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다. 만약 예술가들에게 똑같은 방식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뜸 욕이 날아올 것이다. 날 뭘로 보고. 창작의 영감을 설명하라는게 말이 되나?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글쎄 사이언스든 소설이든 창작가가 자신이 어떻게 결과물을 내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엉터리가 아닐까? 실제로 나도 이런 방법으로 글을 썼다. 예를 들어 단편을 완성한 다음 이 글은 어떻게 생각이 떠올랐으며 써나가면서 느낀 감정을 짤막하게 후기식으로 달았다. 그래야만 독자들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가끔 덧붙이는 말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토 준지도 그랬다. 그의 독자라면 대체 당신의 머리속에는 무엇이 들어있길래 이토록 줄기차게 공포물을 그려내는 것입니까, 라고 궁금해했을 것이다. 이토는 자신의 저작집에서 그 비밀을 속시원히 밝히고 있다. 글뿐만 아니라 그림을 첨부한 아이디어 노트까지 함께. 괜히 대가가 아니다.

 

덧붙이는 말

 

이 책에 수록된 만화중 가장 섬뜩한 것은 <목매다는 기구>다. 여러가지 자살방식중 가장 이해 안되는 것이 목을 매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널리 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억울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라면 조용히 약을 먹고 자는듯이 죽어버리는 방법을 택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토는 아예 정면으로 달겨들었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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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합본판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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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 이토 준지의 작품들이 들어왔다. 그렇다. 이건 단순한 만화책이 아니다. 이게 웬일, 얼씨구나 하고 잽싸게 빌리러 가보니 분명히 대출가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없다. 신착도서 코너에서 서가에도. 혹시 다른 사람이 읽고 있나 싶어 곁눈질을 헤가며 쭉 훑어보았지만 눈에 뜨이지 않는다. 포기하려는 순간 머리속에서 파직 스파크가 일었다. 혹시.

 

<소용돌이>는 이토 준지의 대표작을 모은 합본이다. 마을에서 발견한 회오리 바람에서 시작된 요상한 소용돌이 문양이 강박적으로 계속된다. 처음 접했을 때도 놀았지만 여러번 다시 볼 때도 그 기분은 변함이 없다. 다만 공포감은 덜해졌다. 도리어 무섭다기 보다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괴물을 들킨 기분이랄까?

 

예를 들면 난 특정 우유만 사먹는다. 병모양을 본뜬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뚜껑을 열고 난 다음 보호용으로 막아 놓은 하얀색 코딩용지를 다 벗겨내지 않고 반쯤 남겨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다 열어버리면 우유가 상해버릴 것 같다. 그 때문에 아내는 불만이 많다. 왜 다 벗겨내지 않는 거야? 마시는데 불편하잖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우유를 다 마시고 나서도 그 딱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거다. 이쯤되면 병적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뭔가 스트레스가 심했겠지.

 

이토 준지는 그런 압박을 유지하며 사는 작가다. 곧 강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며 단 한장의 그림도 제대로 그릴 수 없다.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무척 죄송하지만 미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다. <소용돌이>만으로 완전히 기가 빨렸을텐데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공포의 세계로 한발짝 한발짝씩 꾸여꾸역 들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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