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추위가 기승인데 며칠째 방바닥이 냉골이다. 거실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난방에 문제가 있나 보다. 설정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기온이 따라가지 못하고 17도에 고정되어 있다. 도저히 안되겠가 싶어 관리실에 연락하고 기사분이 오셨다. 단지안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분답게 오자마다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모터가 불량이란다. 이런 재작년에도 바꿨는데. 그건 외주를 주고 있어 따로 연락을 해서 수리해야 한단다.
어쩔 수 없다. 전화번호를 넘겨받아 연락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보일러의 기초부터 밸브 관리법까지 거기에 파이프의 흐름까지. 매우 전문적인 내용이었다. 처음엔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도저히 더이상 들을 재간이 없었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억지로 말을 중단시키고 결국 내보냈는데 글을 쓰는 지금 드는 생각은 일종의 보상을 바라고 미적댄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세상이 지금 어떤 땐데 그럼 관리비는 괜히 내나?라는 마음이 굳어졌다. 몇년 전에도 수도꼭지가 고장나 수리비외에 웃돈까지 받아가 화가 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주제는 그게 아니다. 나는 문제의 원인이 궁금했고 그것을 알면 그만이다. 굳이 미주알고조알 보일러의 작동원리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진다. 궁금한 점을 해결하기 보다는 자기 지식을 끝도없이 늘어놓는다.
영화 <트립 투 잉글랜도>에도 비숫한 장면이 나온다. 오늘 먹게 될 음식에 대해 유래며 식사법이며 재료는 어디서 가져오는지를 늘어놓다 친구가 그만하고 입을 막아버린다. 시끄러,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거지 지식을 목구멍에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구. 무식한 놈하고 무시했던 그는 식사후 혼자 피료르드 만에 올라 기막힌 풍경을 마주하고 지친 머리를 식힌다.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데 조짐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만을 구성하는 돌의 성분, 지형의 뒤틀림, 발견자의 이름 등 잡다한 지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 이래서 친구가 나한테 뭐라 했구나.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그만 가볼게요.
덧붙이는 말
알쓸신잡 1편을 재미있게 보았다. 티브이에서는 보기 드문 잡다한 지식잔치가 신선해서다. 그러나 시즌 2는 실망이다. 왠지 짜증스럽다고나 할까? 1편이 지역의 감동에 주목했다면 2편은 지식에 편중해서가 아닐까 싶다. 음식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도 거북하지만(맛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야?) 삶과 동떨어진 과학지식도 지친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