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하루키 문장이 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1Q84>이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알듯모를듯한 위화감에 시달렸는데, 최근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고나서 그 비밀을 알았다. 우선 하루키를 대표하는 특징은 허세이며, 문장에 부사를 지나치게 남발하여 이른바 점차 주부문학화 되어가고 있으며 스스로는 은유를 잘 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가 비유로 쓴 표현들은 독자들의 공감을 전혀 얻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과대포장된 작가라는 뜻이다. 안타깝지만.
서구문학의 특징은 주어와 동사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곧 행동이 주고 생각은 그 뒤를 따른다. 비록 관념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뒷받침하는 도구다. 반면 동양소설은 미사여구가 발달되어 있다. 문학하면 아롱지고 서글프고 스산하고 따위의 알쏠달쏭한 표현을 써야 멋있는줄 착각한다. 소위 문학청년 시인소녀의 연장인 셈이다.
하루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는 동양을 넘어 서양에서까지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동시대의 감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숭고함을 떨쳐버리고 대중음악, 섹스, 가벼운 말장난을 적절히 배치하여 마치 과자 한봉지 먹듯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공로는 여기까지다. 뭔가 심오한 척 대작가 흉내를 내려고 하면서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정점이 아닌가 싶다.
대체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산속에 틀어박혀 지내다 그림을 발견하고 이웃과 이런 저런 일에 얽히지만 결국은 자신을 떠난 부인곁으로 돌아온다. 사이사이 하루키 특유의 장기인 감각적인 섹스장면이 나오고 소아성애 취향도 불쑥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눈요기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곧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살아숨쉬는 인간은 하나도 없고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이 빚어낸 허상들이 조용히, 품위있게, 자그마한, 고즈넉히 띠위의 말장난 잔치를 벌인다. 하루키는 문장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