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를 보다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1860년대 크리스마스 전날로 돌아간 주인공은 디킨스를 만난다. 당시 그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이미 대작가로 칭송받는 그였지만 과연 지금까지 자신이 쓴 글이 지나친 상업적인 것이 아니냐는 자조에 빠져 있었다. 곧 대중의 얄팍한 감상에 영합한 가벼운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끝에 문제를 해결하고 닥터후는 훗날 크리스마스 캐롤을 쓰는데 영감까지 주었다. 스스로 디킨스의 팬임을 자처하며 호돌갑을 떨던 그가 드디어 떠나는 날 찰스는 진심으로 묻는다.

 

"Do they last?" 과연 내가 쓴 작품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까지 계속 읽히나요?

 

닥터후는 별 시답지 않은 질문을 들었다는 듯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Forever" 영원히요.

 

찰스 디킨스는 그 말을 듣고 어깨에 짊어졌던 부담감을 덜고 곧바로 글쓰기에 매진하였다.

 

과연 누가 내가 죽고 난 다음 나의 평판에 신경쓸까? 대부분은 현실을 살기에도 힘에 부친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어느 정도 이룬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해도 되지 않을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이들이라면 더더욱 더.

 

그런데 어떻게 된게 그런 인간들일수록 상속와 증여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에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줄이고 단 몇 푼, 물론 그들의 기준에서도, 이라고 공짜돈이 생기면 물불을 가라지 않고 챙기려 든다. 문제는 그중 극히 일부만이 범죄라는 낙인이 찍혀 돈을 토해내거나 감옥에 간다. 설령 그런 경우에 처해도 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빠져나온다.

 

과연 훗날의 평가에 목을 내는 건 예술가들뿐인가? 순간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들도 무슨 값어치가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딱히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족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고 뭔가 공감한다고는 해도 막연하고 더더욱 내가 사라지고 난 후 중요한 흔적일리는 만무하고. 그럼에도 계속 글을 지어나가는 까닭은 아마도 찰스 디킨스와 같을 것이다. 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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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DG111 합본 한정반 (111 The Collector's Edition)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연주 / DG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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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시컬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시디의 출연은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몇백번 들어도 전혀 닳지 않고 같은 음색을 들려준다는 영원불명성이 기쁨이라면 판을 만지며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바늘이 스치면서 내는 넓고 폭넓은 음역이 사라진 것은 아쉬움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정작 큰 충격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싸도 한 장에 2만 원은 하던 시디 가격이 장당 2천 원정도로 폭락하리라고는. 엄밀히 말하면 모음집인 경우지만. 여하튼 없는 돈을 쪼개어 판이나 시디를 사모으던 애호가들에게는 안타깝지만 그야말로 폭탄할인값으로 서양고전음악의 역사적 명반모음집이 출시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DG 111이다. 다시 말해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제작발매한 음반중 핵심을 추려 내놓은 것이다. 당연히 세상에나, 어쩜 이건 꼭 사야돼, 라는 열풍이 불었고 이리저리 재며 머리를 굴리던 사람들은 이내 품절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나 일단 지르고 보라 그랬지. 언제 저 많은 음악을 다 듣지라는 우려는 시궁창에 처박기를. 좋은 음악은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으니까. 참고로 나는 한바퀴 돌고 이제 두번째 주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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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111 [55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 / DG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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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 음악에 어떠한 관심이 없더라도 반짝반짝 작은별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가락이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라는 건 중요한게 아니다. 누구나 흥얼거릴 정도로 친숙한 곡을 만들 줄 안다는게 핵심이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부담을 덜어주려면 역시 넘버원은 모차르트다. 

 

그러나 조금 들었다 싶은 이들은 모차르트 음악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뽀로로에 빠져있던 아이가 유치하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듯이. 그러다 베토벤, 바하, 브람스, 슈베트르, 말러를 떠돈다. 역시 음악이 이정도는 되야라고 감탄하며. 그럼에도 죽을 순간이 가까워지면 곧 세상만사가 귀찮아지면 당연하다는 듯이 모차르트로 귀환한다. 그 어떤 작곡가가 그만큼 음악의 순수한 기쁨을 안겨준 적이 있었던가?라고 감탄한다. 게다가 성악, 기악, 현악, 오페라 장르도 가라지 않고 말이다.

 

<모차르트 111>은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정수를 뽑아 모은 음반집이다. 각각의 면모를 따지기에 앞서 도이치 그라마폰이라는 든든한 빽을 믿고 그냥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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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자코메티
제임스 로드 지음, 오귀원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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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지우기>를 읽는 내내 짙은 의구심에 휩싸였다. 작가는 화가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물론 소설가가 미술가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품의 소재로 활용한 이상 실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사람들의 공감은 얻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또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그럼에도 계속 드는 의문은 하루키의 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얄팍한 작가의 분신에 머물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곧 화가, 사업가, 유부녀가 다채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의 독백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히루키 소설의 대화는 구어체라기 보다는 문어체에 가까우며 실제 오고가는 말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머릿속 생각을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토대에 약간의 지적, 성적, 음악적 허세를 뿌려 뭔가 있어보이는 척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만 진짜에게 걸리면 뼈도 못추릴 가짜에 불과하다, 라는 깨달음이 오랜 하루키 팬인 내 가슴속에서 번쩍하고 일었다.

 

<작업실의 자코메티>는 리얼이다. 하루키가 만들어낸 가짜 미술가가 아니라 진짜 조각가가 모델을 정해 조금씩 조금씩 완성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예술가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고, 어떻게 구체화시키고,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직접 모델이 된 당사자의 입을 통해 토해내고 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묘사하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의 계시(?) 위를 받아 신들린듯 얼렁뚱땅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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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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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미용실에 들렀다 하루키의 신간을 발견했다. 만화책이나 잡지라면 이해가 가지만 소설이라니. 아마도 하도 유행하니 비치용으로 둔 것일지도. 일요일이라 평소보다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 읽기 시작했는데 한 30페이지쯤 진도가 나갔을 때 내 차례가 되었다.

 

순간 갈등에 빠졌다. 계속 읽을까 말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이발을 하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는 계산을 하면서 사장에게 조심스레 집에 빌려가서 읽고 돌려주면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게 굴 수는 없었던지 마지못해 승낙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 커텐을 치고 의자에 앉아 다시 처음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을 독파하는데 걸린 시간은 4시간쯤. 중간에 한번 화장실 가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시간을 포함해서다. 저녁 늦게 책을 돌려주러가면서 답례로 캔 맥주 세개를 건냈다. 주인은 빌려줄 때와 마찬가지로 뜨아한 표정이었다. 그냥 책만 줄걸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 책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언제나처럼 관계의 미묘함이며 적절한 색스신도 빼놓치 않았다. 스스로는 일본 문학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러질 못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나"이며 벌어지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망상이다. 이번엔 남편과 아내. 거기에 색다르게 화가라는 직업이 덧칠되어 있다. 읽고나면 이게 뭐지라고 남는 것이 없다는 점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페이지를 넘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곧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막아주는 능력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뭔가 중요한 스토리가 펼쳐질 듯 펼쳐질 듯 한 아슬아슬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단연코 문장이다. 하루키의 형식주의는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결정적인 약점이다. 부담없이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준다. 노벨 문학상 선정위원회의 고민이기도 하다. 하루키가 사기꾼인지 작가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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