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전용 포트가 따로 설치되어 있다. 그녀가 오기 전에는 없던 표시다. 캐서린은 그 딱지를 보며 자신이 머물 수 없는 곳에 있지 않은가라는 회의감에 빠져든다.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지금은 숫자에 전념할 때이다.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줄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어떤 형태든 비약이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갈등만을 증폭해서는 안된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줄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아직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히 만연하던 1960년대의 버지니아. 나사에 근무하는 세 명의 흑인 여성은 직장과 가정에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간다. 때마침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뒤쳐지던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추월하기 위해 기를 쓰게 된다. 각각 고도의 수학적 지식과 컴퓨팅 능력, 그리고 엔지니어 기술까지 갖춘 세 여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하는데.

 

단지 인종차별만 다루었다면 정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뿐만 아니라 여성 전반에 가해졌던 멸시와 여자들끼리의 시기심과 직장내 권위주의를 깨부시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훨씬 풍부해졌다. 여기에 마지막 화룡점정은 바로 유머. 영화 초반 옮겨간 건물에 흑인 전용 화장실이 없어 늘 800미터가 넘는 거리를 오고가야했던 주인공의 총총걸음은 결국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도 빛이 나는데, 마침 그 때 흘러나오는 곡이 뛰어(Runnin)라니. 기가 막힌 선곡이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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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전성시대다. 케이팝 스타로 촉발된 흐름이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유사 프로그램도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고 공급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슷한 포맷이 늘어나면서 수준에도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곧 어떤 방송에 출연하느냐에 따라 출세길이 확 달라지는 것이다. 보는 사람 처지에서야 그게 뭔 상관이냐 하겠지만 직접 오디션에 나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생사가 달린 문제다.

 

지난주(10월 말) 동시에 시자한 믹스 나인과 더 유닛은 대표적인 예이다. 각종 연예 기획사에서 가성있는 친구들을 발굴하여 육성한다는 취지는 동일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직접 방문하느냐 아니냐인데 이 또한 선발인원을 충원한 후부터는 별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두 방송을 보고 난 느낌은 현재로서는 믹스나인의 압승이다. 출연자들의 능력을 별개로 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편집을 하는 능력에서 더 유닛은 완전히 구태의연했다. 한국방송공사의 파업 탓이라고 하는 지적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싶었다. 일렬로 죽 세워놓고 너 나와 식, 그리고 판단능력이 되지 못하는 심사위원의 의미없는 덕담과 왠지 거물인척 하고 싶어하는 허세가 느껴졌다.

 

 

반면 믹스나인은 독설이 난무했지만 그것이 진짜 도전자들을 위한 마음이라는게 화면으로도 전해졌다. 아마도 실제 연습을 시키고 무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이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와이지라는 회사 자체가 달라붙어 최고의 뭔가를 뽑아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유닛은 대체 그렇게 뽑아놓은 친구들을 누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데뷔라는 미끼를 걸어 방송용으로 이용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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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 따위는 없다. 우선 좋은 이라는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대체 어떤 책을 말하는 거지? 위인전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교과서나 참고서를 뜻하는가? 흔히 교양서적이라고 부르는 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책은 없다. 잘 쓴 글과 못 쓴 글이 있을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일찌기 간파했듯이. 그렇다면 잘 쓴 글은 무엇인가? 문법과 맞춤법이 정확하다고 해서 이 조건을 충족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야 한다. 곧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좋은 책은 없지만 잘 쓴 글은 있으며, 그것은 페이지를 넘어가게 만들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런 책은 어떻게 찾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양질전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이 읽다 보면 그 중에서 보물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형서점에 정기적으로 들르고 신문의 신간 소개란은 빠지지 않고 보고 서점 사이트의 댓글도 꼼꼼이 읽고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언급되는 책에 대한 정보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을 다 할 수 있나, 하고 한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잘 쓴 책을 만나기란 어렵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휼륭한 책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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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 시즌 2 : 보급판 (6disc) - 별책부록 없음
KBS 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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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의 열혈팬이라면 어떤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적인지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나는 광적인 추종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고 거드름을 피워보지만 역시 전적으로 주관적인 생각이다. 내가 꼽은 최고의 이야기는 닥터 후 시즌 2에 실린 <새로운 지구>다. 미래 언제쯤 지구는 이미 사라지고 비슷한 행성에 인류가 살고 있다. 모두가 안락한 삶을 누릴 것만 같은 그 때에도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이 하는 일은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적합한 치료제를 만들어 환자를 치유한다. 뭔가 섬뜩하지만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사례라 더욱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소재 하나만으로 최고라기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진짜는 뇌만 살아남아 엉덩이 살에 의존하여 살던 인간이 과거의 찬란했던 자신과 만나 "당신은 정말 예쁘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정말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나 또한 후회가득한 상황이 아니라 진짜 빛나던 한 순간의 나를 찾아 진짜 멋지구나라는 말을 하고 싶다. 과연 나는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언뜻 비치는 것은 역시 연애할 때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비참하고 설레고 죽을 것 같고 애가 타던 바로 그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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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판타스틱
맷 로스 감독, 비고 모텐슨 외 출연 / 액티버스엔터테인먼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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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 적응하기는 보통 힘든게 아니다. 왜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학교 또는 직장에 가야 하고 때로는 밤늦게 공부나 일을 해야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애는 언제 가지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며 돈은 또 왜 벌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답은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캡틴 판타스틱>은 세상에 반기를 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특별한 의지가 있다기 보다는 왠지 싫어서다. 그래서인지 <남쪽으로 튀어> 식의 반항기 가득한 유쾌함 대신 내 못대로 살다 결국 우울해지는 비극에 가깝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정한 혹은 누가 결정했는지도 모를 률을 지키느라 찰나같은 짧은 삶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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