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왓치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티븐 킹의 <엔드 오브 왓치>을 읽다 죽음을 생각했다. 이미 예상된 결말이지만 호지스는 자신을 걸고 마지막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다 문득 킹의 예지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스티븐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 그를 좋아하고 욕하고 사랑하고 질투하던 모든 독자들은 어마어마한 상실감에 빠질 것이다.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 그는 불사신처럼 다기 살아날거야. 아니나 다를까 도저히 회복불능이라고 여겨졌지만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더욱 왕성한 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엔드 오브 왓치>에서는 투지력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첫 페이지부터 휘몰아치는 상황을 만들어 독자들의 눈을 붙잡아두고 알쏠달쏭한 전개로 한동안 헷갈리게 한 후 결말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솜씨는 여전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이 전해져온다. 단지 호지스 시리즈를 마감하는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새 킹 이후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1947년생인 킹은 우리 나이로 만 70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다른 패션감각을 보여준 박열.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유쾌하다고 해서 독립운동의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는 37년이었다. 만약 이 시기에 태어나 자란 이들은 일본을 조국으로 여겼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에 살기 때문에 알게모르게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부당함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금밤이라도 명줄이 끊어질 것 가던 일본제국주의는 길고도 질기게 이어졌다. 이 와중에 변절자로 나오고 배신자도 생겼을 것이다. 곧 한 문장으로 묶기 어렵다는 말이다.

 

박열은 그중에서도 독특했다. 적진인 일본에 건너가 폭탄 테러를 모의하다 잡혀들어가서가 아니라 여인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스스로 무정부의자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독립운동가라기 보다는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일왕이 지배하는 군국주의의 모순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종 유쾌발랄하다. 일제를 그린 영화가운데 이토록 상쾌하게 시대를 묘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의 의의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일본인 여인과의 연애도 눈에 거슬릴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사귀고 싶을 때 사귀었을 뿐이다.

 

이제훈의 연기도 좋아지만 역시 압권은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다. 전작 <동주>에서는 그야말로 차분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박열>에서는 펄펄 살아있는 생동감있는 여인을 잘 묘사했다. 한 인물이 이토록 전혀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앞날이 매우 기대된다.

 

덧붙이는 말

 

이준익 감독의 영화 코드는 유모다. 주제와 상관없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도하는 장면이 많은데 <박열>은 그 정점에 있다. 일본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강박적 엄숙주의에 주눅들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개성을 뽐내었다. 게다가 저예산으로. 확실히 재주가 많은 감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토르, 더이상 어벤져스의 예고편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중세를 암흑기라 부른다. 종교가 정치, 사회, 경제는 물론 일상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사슬에서 벗어나 새롭게 번진 유행이 바로 르네상스다. 당시 모범으로 삼은 것이 고대  문화다. 신들이 인간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하던 때를 이상향으로 삼은 것이다. 유일신인 하나님은 살짝 제껴둔 채.

 

토로는 천둥의 신이다. 북유렵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철퇴를 휘둘러 거인족을 무너뜨렸다는 게르만족의 신화다. 신이라고 해야 우스개의 대상인 우리와 비교하면 확실히 서양은 공격적이고 거칠다.

 

마블이 잡다한 신을 총망라하여 영화를 만들어갈 때 토르는 살짝 찬밥이었다. 주연을 뒷받침하는 조연이라고나 할까? 오죽했으면 토르, 천둥의 신이 개봉할 때 어벤저스의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평이 나왔겠는가?

 

그러나 <토르, 라그나로크>는 이러한 선입견을 단방에 날려버렸다. 장발 양아치에서 천하무적 스포츠머리로 멋지게 복귀했다. 볼거리뿐 아니라 스토리도 촘촘하게 짜여있어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덧붙이는 말

 

이제 마블의 상표처럼 되어버린 부록영상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것도 엔딩후 두번이나. 섵불리 자리를 끈 관객들은 억울할 것 까지야 없겠지만 살짝 아쉬울만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루레이] 프란시스 하 : 넘버링 한정판 (32p 소책자)
노아 바움백 감독, 미키 섬너 외 출연 / 그린나래미디어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 되면 십중팔구는 지루하기 마련이다. 일상이란 상상처럼 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고 들으면 매일같이 엄청난 사건이 터지는 것 같지만 정작 내 곁에서는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죄다 사소하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다. 자판기가 동전을 먹어 신고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점심으로 밥이냐 국수냐로 고민하고 집에 들아와서는 티브이를 보며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떼우기 일쑤다. 만약 누군가 내 생활을 그대로 찍어 영화로 만든다면 과연 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나조차 외면할 것이다.

 

<프란시스 하>는 이토록 어려운 일을 해낸다. 시골에서 올라와 무용수로 성공하고 싶은 주인공은 작가가 꿈인 여자와 함께 뉴욕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룸메이트와 사소한 일로 틀어진 그녀는 전전긍긍하며 이 친구 저 동무 집을 전전하는데. 그 사이 친구는 어쩐 일인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자신은 어렵사리 얻은 배역마저 잘려 결국 고향에 돌아가는 신세가 되는데. 다시 심기일전하여 상경후(?, 뉴욕을 말한다) 알바를 하며 꿈을 이루려고 기를 쓰던 어느날 파티장에서 일을 하다 성공한 친구가 초대손님으로 오는 일까지 발생한다. 아, 정말 내가 쓰면서도 구질구질하구나.

 

결국 프란시스는 성공한다. 비록 무용수로 이름을 빛내지는 못하지만 관련 업무를 보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더군다나 자기 이름이 적힌 집을 마련한다. 비록 성(Halladay)조차 다 달지 못하고 첫머리인 하(Ha)만 달만큼 좁은 명패이지만. 어쩌면 이 문패는 엄청난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절반의 꿈만 이룬 프란시스에게 감독이 보내는 위로라고 할까.

 

덧붙이는 말

 

영화는 흑백이다. 만약 칼러였다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희망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현실은 총천연색 칼러가 아니다. 그럼에도 빛나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니다. 룸메와 헤어진후 뜨겁게 달구어진 주방기구에 손까지 데어 화가 치밀대로 치민 순간 우편함에서 무용수 연습생 합격 소식을 듣는다. 조금전까지의 비참함은 잊은채 뉴욕의 차이나타운 거리를 뛰어가는 프란시스.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와 어우러진 이 장면으로 이 영화는 단숨에 명작의 대열에 올라섰다.

 

한가지 더 깨알같은 재미라면 주인공을 맡는 그레타 거윅은 메릴 스트립의 딸이다. 언뜻 그녀의 젊은 시절이 비치니 놓치지 마시길. 그런데 과연 아버지는 누구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날로그의 반격 - 디지털, 그 바깥의 세계를 발견하다
데이비드 색스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얼리 어답터였다. 남들은 원고지에 글을 써서 리포트를 낼 때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후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주위에서 와 하면서 놀라던 반응이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일찍 알고 쓰기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시티폰을 쓸 때 휴대폰을 개통했고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할 때 외장하드를 사들였다. 그런 놀이가 뚝 끊어진 것은 아이엠에프 이후였다. 곧 돈이 떨어지니 사모을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그 때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한번 산 기계나 물건은 왠만하면 버리지 않고 고장이 나더라도 고쳐서 쓴다.

 

<아날로그의 반격>은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다. 아날로그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며 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급기야 레코드판, 종이, 필름, 보드게임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최상의 발명품이며 새로운 시대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인쇄물이 다시 늘어나고 오프라인 매장의 개설도 확장된다.

 

정직하게 말해 데이비디 색스의 글을 읽으며 애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무작정 과거회귀형 인간이 아니며 디지털의 보완재로서 아날로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잘 알겠지만 뭐 죽은 자식 XX 만지기도 아니고 마냥 향수에 젖어 있을 필요가 있겠나 싶다.

 

인간은 지나간 것에도 집착하지만 더욱 놀라운 능력은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이다. 만약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원고지에 글을 써서 발표를 하라고 하고 휴대폰을 모두 몰수하고 집전화나 공중전화로만 통화하게 하고 인터넷을 정지시켜 온라인 정보를 차단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핵심은 아놀로그냐, 디지털이냐가 아니라 그 기술이 사회에 어떻게 반영되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느냐다. 그가 예로 든 엘피판은 등장 초기에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도넛츠판이라는 작은 사이즈로 노래 한곡밖에 못담았던 것이 무려 앞뒤 50분 가량 저장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놀아웠겠는가? 그러나 그 시대에도 엘피는 진정한 음반이 아니라면 굳이 축음기로 음악을 감상하던 이들이 있었다. 수백곡 아니 인터넷만 연결하는 무제한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아날로그의 반격>은 한 때의 반항이다. 언제나 이런 류의 흐름은 있어 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