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깨지라고 있는 것

<란제리 소녀시대>에서 인생 연기를 보여 준 김선영
드라마를 챙겨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방을 시청한 경험도 전무하다. 차리리 영화 한편을 제대로 보자는 주의다. 아무래도 들인 공을 고려한 까닭이다. 곧 드라마를 보는 시간에 아직 접하지 못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라나 예외없는 규칙은 없는 법. 원칙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란제리 소녀시대>다. 엄밀하게 말해 1, 2회는 제 때 보지 못했다. 배경이 70년대 말이고 장소는 대구 등장인물 이름이 정희라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송 초기에는 희한한 사투리와 반공 미화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초반의 설정은 빅 픽처를 그리기 위한 밑밥이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케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더니 7회가 끝나고 나서는 한 회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비록 시청율은 4퍼센트에 머물렀지만 작품성만 놓고보면 50퍼센트 넘는 드라마 못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배우들의 연기에 위화감이 없다. 사실 걸그룹 맴버가 여자 주인공을 맡고 보이밴드 출신이 중요 인물로 나온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그 시대를 재현해낼 수 있을까? 실제로 <응답하라 1988>의 경우 정직하게 말해 혜리나 박보검은 좀 답답했다. 연기를 못한다기 보다는 그 시대를 지낸 온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반면 란제리는 마치 그 시절을 직접 살아가는 듯한 현실감을 주었다. 보나나 채서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조화가 잘 어루어진 덕이다.
둘째, 순정이 통했다. 유신시대 말기라는 혹독한 상황에서도 청춘들은 밝게 빛났다. 그 원천은 순수함이었다. 손진을 짝사랑하는 정희, 정희만을 위하는 동민, 혜주를 연모하는 손진, 그리고 영춘을 그리워하는 혜주의 관계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특히 결말이 해피엔딩이었다는 점에서 시청자의 만족도도 높았다.
셋째, 주연 못지 않는 조연들의 활약이 컸다. 정희 어머니 역의 김선영은 그야말로 인생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망기지는 배역이라도 완전히 몰두하기는 힘든 법인데, 더우기 여자인데, 정말 리얼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남편의 바람을 알고도 서툰 화장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그런 일이 없다며 변명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듯 완전히 몰입되었다. 이밖에 아버지 역의 권해효나 이모라고 불리는 박하나, 정희의 동생, 학교 선생, 여자 교련 간부 등 모두 모두 빛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