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모(弔問帽)

 

 

 

평소처럼 모자를 챙겨 외출하려는데 없다. 잊어버린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마크가 음각으로 새겨진 멋진 야구캡이다. 멋도 멋이지만 머리에 잘 맞아 늘 즐겨 쓰곤 했다. 아무래도 어젯밤 산책을 하다 어디선가 흘린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하고 공원을 다시 가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3년 이상 쓴 낡은 모자라 누가 훔쳐갈 일도 없을텐데. 

 

누구가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늘 곁에 있어 피부처럼 익숙한 대상이 사라졌을 때 겪는 낭패감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시대 또한 초월한다. 조선시대 유씨 부인은 바느질을 하다 부러진 바늘을 애도하는 조문을 쓰기도 했다(규중칠우쟁론기 중 조침문). 

 

어떤 사람에게는 하찮은 물건에 불과했을 바늘에 이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때문일까? 이성적으로 보면 전혀 쓸모없는 짓이다. 아무리 오랜 동안 함께 했어도 이미 없어졌거나 고장난 물건에 집착하는 건 매몰비용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곧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게 어찌 시계침처럼 째각째각 움직이기만 하겠는가? 익숙한 대상과 결별하는 건 마치 내 몸 한 조각을 떼어낸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눈과 귀에서는 멀어졌지만 심장은 사라져버린 사물과의 기억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새 모자가 하나 더 있어 딱히 어려운 점은 없다. 그러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같은 걸로 하나 더 사볼까도 생각했지만 워낙 옛날 모델이라 지금은 구할 길도 없다. 설령 똑같은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 모자에는 추억이 없다. 언젠가 새 야구모자와도 친해지겠지만 당분간은 그냥 다닐 것이다. 그것이 나와 이별한 모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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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p doing what you are doing

 

 

모든 일은 순식간에 닥친다. 그것도 한꺼번에 연달아. 아버지가 말기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회사에서는 잘리고 아내와는 극도로 사이가 나빠져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똑같지는 아닐지라도 이와 비슷한 일은 어느 가정에나 일어난다.

 

사람은 외부 상황에 민감하다. 평소 경험하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는 더더욱 당황한다. 아무리 준비를 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패닉상태에 빠지면 빠질수록 문제는 수렁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엎친데 덮치는 격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일상의 회복이다. 곧 평소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물론 힘들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니까.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건 마음의 문제지 시간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 상을 당해 삼일동안 장례식장에 있었다. 다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이었다. 나는 잠깐 짬을 내어 식장 근처를 30분쯤 걷듯이 뛰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식사후에 매일 하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슬픔을 가누지 못해 정신줄을 놓았다면 나는 내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나는 확신한다.

 

실제로 평소의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아차피 내게 닥친 일은 당장 스스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반면 일상의 행동은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밤을 새고 일을 했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번 가는 등산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이상 쓸 소재도 없고 글을 쓸 마음도 들지 않지만 책상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커서가 껌뻑이는 것이라도 봐야 한다. 이 모든 일상은 두렵고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필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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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군함도 세트 - 전2권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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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개봉한 블럭버스터 영화가운데 가장 큰 실패는 맛 본 것은 <군함도>다. 개봉 전부터 연출자 학대 논란을 빚더니 정작 뚜껑을  열고나서는 내용으로 비판을 받았다. 곧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악랄한 짓을 한 한국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군함도내에서 술을 마시며 여흥을 마시는 것은 지나친 묘사하는 지적이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기에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곧 작가의 시선과 감독의 작품관이 부딪친 것이다. 물론 소설의 영화화는 불가피하게 각색을 거치기 때문에 원작과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그중에서도 수탈의 상징인 군함도를 대하는 자세가 다른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면 영화도 별로지만 원작도 그렇게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예상가능한 인물에 뻔한 스토리였기 때문이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에서 악랄하면서도 매력적인 염상섭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을 보라. 결과적으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그렇다고 아주 망한 것은 아니지만, 오리지널 소설마저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역사, 특히 근대사를 소설로 다룰 때는 감정개입을 적절히 해가며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들이 펄펄 뛰어디니게 해야 하는데 한수산은 그러지 못했다. 매력적인 소재를 범작으로 전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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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 일공일삼 11
엘레노어 에스테스 지음, 루이스 슬로보드킨 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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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할 때가 있다. 왕따가 그렇다. 아무리 떠올려도 그런 적은 없었던 듯 싶다. 혹은 비슷한 경험은 있었지만 그렇게 마음에 큰 상처가 아니어서 넘어갔는지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할 때 선생에게 뺨을 얻어맞은 장면은 여전히 되풀이되어 나를 괴롭히지만.

 

아이들에게 친구는 세상의 전부다. 쉽고 친해지고 금세 헤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쁨이나 아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벗을 사귀기 위해서라면 과장이나 거짓말은 기본이고 스스럼없이 폭행을 가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허풍을 떤다. 매일 같이 같은 옷을 입고 가는 그녀를 비웃은 반 아이들에게 우리 집에는 백벌도 넘는 드레스가 있다고 뻥을 친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반응이다. 그래, 어디 그럼 한 번 보여줘. 당연히 진실일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완다는 대응하는 대신 사라져버린다.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은 그럴줄 알았다며 흥, 하고 한번 비웃고는 더이상 신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백벌의 드레스는 있었다.

 

주말에 한차례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학생들도 있다. 방학 때면 초등학생들도 온다. 그저 겉보기에 마냥 순진해보이지만 친구들끼리의 질투와 애정은 장난이 아니다. 한 주 한주 지날때마다 그들의 권력관계 변화는 삼국지 저리가라다. 심지어 상처받고 더이상 운동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다른 핑계를 데겠지만. 

 

아이들은 어른처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게 때문에 감정에 휩쓸려 간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려 결국 승자는 모든 관계를 독식하고, 패자는 말없이 홀로 조용히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어렸을 때 딱히 시달리지 않은 이유는  일찌감치 백기를 올리고 투항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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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 6일. 그날 나는 회사에서 파견나와 대학로 한 편집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붉고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보이는 거리는 로맨틱했다. 오후 늦게 잠깐 숨도 돌릴겸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건물 테라스에 앉아 밀린 전화 문자를 확인했다. 김광석 죽은 거 아세요? 그녀는 일 때문에 만난 사이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건만 때때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업무가 아니라면 내가 먼저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티가 너무 나서 내가 도리어 미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짤막한 글귀에도 슬픔이 가득 베어 있었다. 그녀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한동안 우울했다.

 

김광석이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극장에 들렀을 때 그의 이름을 단 다큐영화를 상영하고 있어 의아했다. 게다가 감독은 이상호 피디.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다룬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실체는 전혀 달랐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였다.

 

고 김광석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오래오래 남을 자격을 갖춘 가수다. 흔히 천재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요절은 신비감을 불어넣는다. 게다가 자살이라면 더욱 더. 그런데 새로 밝혀진 사실은 그에게 딸이 있었고 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전처가 있고, 그녀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김광석의 위엄을 받들며. 벌써 스토리가 꽉 짜인 느낌이 들지 않는가? 결과가 어떻게 밝혀지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수순으로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우상화는 더욱 강화되고 우리 세대가 다 죽은 다음에는 신화로 우뚝 솟을 것이다. 음악적 업적과는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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