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증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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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큰 나라다. 소설의 주제나 내용도 다양하다. 그만큼 시장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작가들이 적으니 어쩔 수 없다고 자조하지는 말자. 그럼에도 아쉬운 건 사회적 이슈가 터지면 면밀히 조사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소설가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보다 깊숙히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그러려면 작가들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어설픈 자기고백이나 헛된 위안따위로 포장해서는 한 두 권은 성공할지 모르겠으나 지속적으로 글을 쓸 수 없다. 한마디로 글쟁이도 공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가 법정 드라마의 아이콘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한때 존 그리샴이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도 빼어나지만 내 취향은 코넬리다. 그리샴이 개천에서 나서 용이 되고자 하는 변호사의 도전이라면 코넬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회 정의를 실혀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증인>은 특히 사회성이 강한 소설이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을 차압당하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던 상황을 빗대 배경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이건 실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집주인을 은행에 속아 넘어간 선한 인간이 아니라 이중성을 지닌 범죄자로 설정한 것이 압권이었다. 뻔한 이야기로 흐를 길목을 단단히 틀어막은 것이다.

 

우리는 아이엠에프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파산사태를 겪었다. 서민들은 죄다 죽어나갔고 정작 책임을 져야할 기업은 더욱 살을 찌웠다. 그 결과 갑질횡포를 포함한 회사조직의 파상적인 공세도 여전하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 글을 쓰는 소설가가 나와야 마땅하다. 법정이든 시장바닥이든 주식거래소든 배경은 어디는 상관없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죄다 집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힐링을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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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어스 시즌 5 박스세트 (5disc)
켄 올린 외 감독, 제니퍼 가너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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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의 강연을 유튜브로 보았다. 주제는 페미니즘이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배우생활을 하는 그지만 어렸을 때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세상에나? 여하튼 열등감은 깊어져만 갔는데 게다가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져오면서 매력없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컸다고 한다. 흔히 여성운동하는 이들은 못생기고 괴팍한 사람이라는 편견에 자신도 해당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여자의 무기는 외모와 몸매뿐이라는 의식도 문제지만 여성성을 무시한 동등주의 또한 사려깊은 생각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드러나는 특성 또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구분이 격차가 되는 것이다. 결국 차별을 줄여나가면 서로의 다름은 존중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앨리어스>는 절반의 성공을 이룬 시리즈다. 걸 크러쉬를 앞세운 여성 주인공이 남자들이 득실대는 스파이계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하지만 동료들과의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버디 문화는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다. 마치 여자는 위대하고 남자는 죄다 졸이라는 식이다. 물론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제니퍼 가너에게는 찬사를 보내지만 스토리 연결은 부자연스러웎다. 곧 그녀를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하다보니 어긋났다고나 할까? 그 결과 다섯번째 시즌이 마지막이 된지도 모르겠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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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자존감을 부탁해 - 온전히 나답게 살기 위한 자존감 연습
슈테파니 슈탈 지음, 김시형 옮김 / 갈매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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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유행이다. 소의 갑질문화가 뉴스에 빈번하게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만큼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을 높이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과거에는 아예 당연시되었다는 뜻이다. 권위주의의 뿌리깊은 역사때문이다. 문제는 극복방법이다.

 

우선 살아오면서 그 때 이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빈도와 해서 창피했던 경우를 비교해보라. 흔히 우스개소리로 말하는 결혼은 해도 안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냉철하게. 만약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토로한 사람이라면 굳이 자존감 운운할 필요가 없다. 이런 분은 이미 충분히 갑질이 몸에 밴 분이다.

 

정작 괴로운 사람은 참는 것이 체질화된 이들이다. 특히 여성분들이 그렇다. 자기 마음을 말로 드러내는 훈련이 되지 못해 엉뚱하게 터진다. 이해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억눌려왔기 때문이다.

 

<심리학, 자조감을 부탁해>는 해결을 제시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진단하는 책이다. 자신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인지, 그 정도는 어떠한지를 세심하게 살펴본다. 힘들겠지만 자신을 직면하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의 고비고비에서 결정적 장면을 꼽아보자. 왜 그 때 아무 말도 안했니, 라고 자기에 물어보자. 어떤 말도 하지 못해 차곡차곡 쌓인 무거운 짐이 온 몸에 구석구석 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자존심 회복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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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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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 좋았다, 라는 말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구세대가 늘 지껄이는 레퍼토리다. 90년대를 거슬러 80년대까지 복고로 치장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79년 유신시대로 돌아가 아, 참 기막힌 시절이었어, 라고 감탄한다. 암울한 이야기는 살짝 양념만 친 채로.

 

그러나 이해한다. 자신이 즐거웠다고 했던 때로 돌아가면 젊디 젊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역시 20대였던 시기에는 싱그러움 그 자체였으니까. 흥미로운 건 조금 더 나이를 낮추면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 아주 신났거나 매우 끔찍했거나. 사춘기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는 각종 광고문안에 응모하며 돈이나 상품을 받으며 살아가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왠지 억척스러우면서도 유머스럽다. 또 그런 기회가 많이 있는 미국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대회같은 것은 있지만 광고문구를 직접 공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엄마는 기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제안으로 상을 여러번 받는데, 아이 눈에는 그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만약 내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다면 유년시절이 행복했을 것이다. 늘 아이디어를 짜내고 습작을 하며 글을 다듬어나가는 부모가 곁에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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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 익스트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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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멸망한다. 괜한 헛소리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언제일지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약 50억 년정도 되는데 태양과의 거리를 고려할 때 앞으로 30억년 이내에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곧 내 문제는 절대 아니다. 만약  행성간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그러나 만약 인류가 계속 살아간다면 언제가는 지구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세대는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또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할까? 사람들에게 알릴까? 아니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까?

 

<멜랑콜리아>의 주제는 무겁다. 모든 것의 멸망을 다루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라게도 그 사실을 아는 단 한사람은 결혼을 앞둔 신부다. 그녀는 혼돈에 휩싸인다. 다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들 며칠후면 죄다 사라지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되는대로 남은 시간을 보내면 그만 아닌가? 낯선 남자와 결혼식장에서 빠져 나와 섹스를 하고, 무기력에 젖어 술을 마시고, 헛된 꿈을 꾸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은 전염성이 강하다. 어느새 그녀의 낌새가 이상함을 알게된 주변 사람들 또한 서서히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영화는 지구의 종말은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정답은 없다. 왜? 죄디 없어져버리니까. 그러나 파멸은 단지 지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살아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낸다면 그 자체가 개인에게는 종말이다. 감독은 거대한 엔드를 제사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요구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망하는걸 알게 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할 것인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조용히 맞이하면 된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평소에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은 오늘 하루를 파국적으로 지냈는가? 아니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알차고 의미있게 보냈는가?

 

덧붙이는 말

 

메시지는 거창했지만 영화 자체는 지루했다.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2시간 넘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면 그건 고욕이다. 소문에 비해 그렇데 대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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