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 닥치고 영어 - 영포자가 하버드를 가게 된 기적의 독학 훈련
모토야마 가쓰히로 지음, 이지현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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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독한 마음을 먹고 1년만 올인하면 실력을 급속도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문제는 실천이다.

 

<1년만 닥치고 영어>는 눈에 확 뛰는 제목이다. 원래 타이틀은 '영포자가 하버드를 가게 된 기적의 독학 훈련'이다. 일본의 밋밋한 설명식 문장에 비해 느낌을 잘 살렸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저자 모토야아 가쓰히로는 영어는 물론 공부와도 담을 쌓은 야구소년이었다. 처음엔 주변의 비웃음과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영어가 뭐 별건가, 라는 무심한 접근이 주요했다. 뭔가 절실하게 매달린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부터 적용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진격의 거인>을 영어자막으로 보는 식이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어느정도 궤도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험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데, 이유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스트는 사실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알고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리스닝이 약하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대부분은 결과에 낙담하여 좌절하겠지만 저자는 운동선수 출신 특유의 낙천적 성격을 믿고 끝까지 추진력을 잃지 않았다.

 

비록 영어를 잘해서 동경대를 가고 더 나아가 하버드 대학원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언어만큼 배움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심심풀이 삼아 비는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 한자 한 개씩 쓰며 외워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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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특히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거나 일주일에 한번 오르는 산에서는 귀에서 이어폰을 떼지 않는다. 주로 즐기는 방송은 그 때 그 때 다르다. 음악 프로그램을 듣다가 뉴스로 바꿨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듣는 식이다. 아주 가끔 뜻밖의 채널에서 놀랄만한 내용을 접할 때가 있는데, 지난주 일요일 밤이 그랬다. 주인공은 <케이비에스 무대>. 제목만 들으면 무슨 트롯가용방송 같지만 사실은 라디오 드라마다. 세상에나 아직까지 이런 방송이 있다니? 인터넷을 찾아보니 첫방송이 1957년이었다니 정말 천연기념물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내용은 최근 트랜들를 그대로 쫓고 있었다. 남과 식사를 같이 하거나 산보를 해주며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왠지 황당하면서도 그럴싸해서 1시간 가량 내내 듣고 말았다. 수시공모도 한다니 드라마 글쓰기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도전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뭐 떨어져봤자 밑져야 본전이니까?

 

kbs  무대 홈페이지

http://www.kbs.co.kr/radio/scr/stage/aod/aod/index.html

 

 

'KBS 무대'와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극본 집필 형식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안내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파일 제목: '작품제목(작가이름)' 
  * 제목 형식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제목에 '라디오극본' 혹은 'KBS무대' 등은 기재 금지. 작품제목과 작가이름만 들어가야 합니다.

- 파일 형식 : 한글
- 글자 크기 12, 줄 간격 160%
- 페이지 구성 : 표지 + 작의 및 등장인물 소개 + 본문
- 본문 글자 수(공백제외) : 14,000자 내외 (아래한글/파일/문서정보/문서통계 참조) #일반적으로 표지, 작의 등 제외하고 본문만 19~20페이지 정도가 적당합니다.
- 줄띄우기 : 장면과 장면 전환시 사용 권장
- 효과 및 음악 : 대사와 구별되게 표시(굵은 글씨체, 다른 폰트 등)

- 등장인물과 대사 부분 구별이 선명하게 표기할 것을 권장함.
- 페이지수 반드시 표시.

* 수시 극본 제출 : radiodrama@kbs.co.kr

* 제출자의 연락처(휴대폰) 꼭 기재!

* 제작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극본의 경우, 별도 연락을 드립니다. (평균 한달 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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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알리 모사파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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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로 보는 영화는 미국과 한국에서 만든 것이다. 홍콩이나 일본 영화가 반짝 인기를 끈 적 있지만 결코 대세는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독이 만든 작품을 찾아보는 이는 마니아임에 틀림없다.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듯이 파라디 또한 누구가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가족간 엃히고 설킨 복잡한 감정을 격하게 표현했다면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보다 세련되게 묘사하고 있다. 배경이 프랑스이고 등장인물 모두 불어를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방관자와 참여자의 위치가 서로 바뀌면서 내적 긴장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가족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는 건 인류 보편의 감성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온갖 감정의 발로인 가정은 때로는 격렬한 전쟁터가 되기도 한다. 어떤 군인이 그 폭력성이 그리워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지만 또 다른 사람은 꼴도 보기 싫어 시쳇말로 전역한 부대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드는 이 둘중 어떤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별겨중인 부인과의 이혼수속을 위해 다시 찾은 전 부인. 그녀에게는 자신의 피가 섞인 두 자녀와 다른 한 아이가 함께 있다. 다른 곳에 머물수도 있지만 아마드는 낯선 동거에 들어간다. 이미 다른 남자와 같이 살고 있는 전처의 집에서. 설정 자체는 기괴하지만 아마드의 시선은 끝까지 냉정하다. 이점이 탁월하다. 뭔가 파바박 하고 불꽃이 튀길 것 같은데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그는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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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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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게 정상이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자체가 오만한 것이다. 개가 고양이가 돼지가 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건 좀 이상한걸,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인간도 마찬가지다. 단지 뇌가 발달하고 언어기능이 있기 때문에 다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식기가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래된 연장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사실은 본능에 의한 것임을 통쾌하여 알려주는 책이다. 이를테면 심심치 않게 뉴스로 보도되는 선생의 학생 폭행을 보자. 남선생의 여학생 성추행이나 폭행은 천일공노할 범죄임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범죄여부를 따지려는게 아니다. 핵심은 선생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학교는 그러한 본성을 억제해야 함은 물론이고 미연에 방지해야 옳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법과 제도는 한계가 있다. 본성에는 본성으로 되받아쳐야 한다. 보는 눈을 많이 만들어 상기시키면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이 범죄임을 눈을 뜨고 감시해야 한다. <깨친 유리창>은 대표적인 예이다. 동네에 유리창 깨진 것이 뒹굴면 그 장소는 곧바로 쓰레기 버리는 곳이 되어 버린다. 반대로 화단을 만들면 주변은 산책로가 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집단에 취약하다. 곧 자아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적절한 규제와 통제가 있어야만 사회가 굴러간다. 우리는 군사문화의 영향 때문에 간섭에 거부감이 크지만 그건 사회적 합의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래된 연장통인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집단에 적용할 것이냐이다. 결국 시간이 답이다. 시간을 예로 들면 본성으로 살아온 기간은 24시간 거의 20시간에 가깝지 때문에 연장통을 떼어버리는데에도 그만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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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사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한다
세기 히로시 지음, 박현석 옮김 / 사과나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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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되도록이면 피해야 할 곳이 있다. 하나는 병원이고 또 다른 곳은 법원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되도록이면 건강하게 잘 살자는 바램이 반영된 곳이다. 예방차원에서라도 가야할 때는 가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다르다. 송사에 휘말리는 순간 피말리는 시계가 천천히 돌아간다. 잘잘못을 따진다는 본래의 취지는 퇴색하고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판결이 나오고나서도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 이기든 지든 마음에 남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을 일본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재판의 내막을 다루고 있다. 법이 정의실현의 수단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뼈저리게 들추어낸다. 결국 제도란 이용하기 좋은 사람의 먹이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낸 이유는 적을 알아야 내가 살듯이 재판의 불합리함을 이해해야 저항할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단지 일본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세월 법은 권력의 편에 서서 함께 호의호식한 사이이지 않는가? 독점이라는 카르텔을 친 채 말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 나조차 부당한 경우를 당했을 때 바로 법에 호소하여 불공정을 바로 잡을 자신이 있는지조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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