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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바벨의 도서관 27
허먼 멜빌 지음, 김세미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멜빌은 노력하는 소설가였다. 타고난 작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호손이 <주홍글씨>로 이미 당대에도 유명한 소설가였지만 그는 음지의 글쟁이였다. 죽고 나서 빛을 본 경우다. <모비 딕>이 대표적인 예이다.
<필경사 바틀비>는 단편이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타자기도 없고 인쇄시설도 미비하던 시절 필경사는 꼭 필요한 직업이었다. 주로 공문서를 베껴쓰는 일이었다. 바틀비는 어떤 이유인지 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펜에 손을 대지 않고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보다못한 사장은 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필경할 것을 종용하지만 바틀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듯 싶은데요"라는 말만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우리같으면 당장 패버리고 쫓아낼텐데 서양인의 양심은 그런 야만을 허락하지 않는가보다. 이래도 저래도 소용없다고 느끼고 도리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는 그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여겨질 무렵 필경사는 홀연히 사라진다. 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멜빌은 말년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 소설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자 부둣가에서 잡일이나 필경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필경사 바틀비>는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듯 싶다. 곧 머리속은 소설의 구상이나 집필로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데 몸은 공문서를 배께쓰는 일따위를 해야하는 모순이 소설의 발단이 된 것이다, 라고 나는 추측한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의 대부분은 하찮다. 아무리 중요하고 고귀하다고 떠들어봤자 헛소리다. 결국 가진 놈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렇게 해야만 체제가 유지된다고 믿는 우두머리와 또 철썩같이 믿는 우매한 민중들이다. 바틀비는 조용히 반기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