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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권력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지음, 이유영 옮김 / 원더박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아버지는 장사꾼이었다.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돌아가실 때 남긴 빚이 3억 원 정도였던 걸 보면. 살아계실 때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등기부등본은 줄쳐진 페이지로 가득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보루였던 집마저 암투병이 길어지면서 홀랑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집을 처분하고 용인의 아파트먼트로 이사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는 찰나 갑자기 병이 더 도지는 바람에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후 아버지는 삶을 마감했다. 지금 그 집은 아직도 살아 남아 구매 당시보다 몇 십배나 오른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인을 대접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신분 서열(사농공상)에서도 맨 밑바닥이었다. 그만큼 천한 직업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치고 재벌이 성장하면서 상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바뀌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멸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부러워하면서도 욕하는.
그러나 상인이 없다면 이 사회는 절대 굴러갈 수 없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과 방, 그리고 전구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시장에서 팔았기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곧 판매와 구매 사이에 상업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없었다면 만드는 사람이나 사려는 이들 모두 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시장을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다. 국가나 정부가 적절한 가격으로 필요한 만큼만 물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제공하면 사적 시장이 필요없다는 발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장과 상인을 배제한 시스템의 붕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상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시스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이다. 다른 업종이 대부분 권위에 의존하거나(법, 제도)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일이었다면(제조) 상업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술사같은 일을 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물건과 적절한 가격을 귀신같이 알아서 제공하지 않는가? 제조업자에게 보다 더 싼 값으로 물건을 만들도록 독촉하는 것 또한 상인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상인에 대한 인식은 좋지 못하다. 상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에서 보듯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나오는 스쿠루즈는 또 어떤가?
그러나 겉모습을 한번 뒤집어 보면 상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버티는 버팀목임을 알 수 있다. 돈 앞에서는 상대가 누군지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친절하며 냉정해야만 하니까.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그러질 못했다. 장사꾼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건 돈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낸 탓이 크다. 집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갔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