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래식 세트 - 전3권 더 클래식 시리즈
문학수 지음 / 돌베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고전음악을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잘못된 표현이다. 클래식이란 그 분야의 기준이 될만큼 오랫동안 회자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테면 비틀스 또한 팝 음악의 고전이다. 따라서 서양고전음악을 클래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식 명칭은 클래시컬 뮤직이다.

 

아무튼 이 책은 서양고전음악의 사연과 관련 음반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안동림의 이 한장의 명반 현대판이라고나 할까? 안 선생이 활동하실 때는 정보나 자료가 귀할 때라 그런 책이 먹혔다.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를 짜집기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반도 죄다 엘피라 실제 들어본 사람도 드물어 객관적인 평가가 드물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양고전음악의 음반 또한 씨디 혹은 디지털 음원 더 나아가 유튜브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보는 눈과 뒤는 귀가 많아졌다. 평론가의 사소란 실수 하나라도 발견되면 쥐잡듯이 뒤지는 세상 아닌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성실성이다. 저자가 직접 듣고 쓴 티가 제대로 난다. 음악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중에는 제대로 처음부터 끈까지 듣지도 않고 애매하고 모호하게 몽환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멋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수는 겉멋 따위는 던져 버리고 직관적으로 음악 평을 써나가고 있다. 초기 고전음악부터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도 장대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음악은 설명으로 접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으니 초심자들은 피하시길. 다시 말해 책의 두께에 질려 가뜩이나 어려운 서양고전음악을 기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설명 따위는 다 건너뛰고 소개하는 음반을 유튜브에서 찾아 배경음악 삼아 틀어놓고 생활하기를 권한다. 문학수씨처럼 처음부터 전력투구하듯 클래시컬 음악을 들어버릇하면 지쳐 나가 떨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환경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높았던 시기가 있었을까? 연일 미세먼지 농도를 일기예보에서 알려주고 신종플루, 메르쓰, 구제역 소식에 대한 보도가 끊이질 않는다. 뒤늦게나마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이 부각되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헬환경에 살고 있는 것인가? 역설적인 사실은 평균 수명은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아이들의 체격은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좋다. 암 환자의 치유율도 높아지고 있으며 그 결과 고령 인구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환경은 건강과 직결된다. 특히 아이와 노인은 주변 환경에 민감하다. 그 이유는 면역력이 차이 때문이다. 곧 전반적인 위생 환경은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면역력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어떻게 면역력을 확보하느냐다. 저자는 지나친 자연주의 물결에 반기를 든다. 백신주주사를 맞느니 자연에서 뛰어놀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우리나라도 일부나마 이런 움직임이 있다. 율라 비스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주사를 피할 이유는 없으며 그렇다고 약물만으로 면역력을 기를 수는 없다.

 

글쎄? 개인 경험으로는 자연이야말로 유일하면서도 위대한 치유제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나는 어른이 되어 잦은 몸살 기운에 시달렸는데 그 이유는 서울이라는 공간간의 갇힌 사무실에서 일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돈이 없어 인천으로 집을 옮기면서부터다. 산 중턱 아래 자라잡은 빌라로 이사간 나는 석달간 극심한 이명으로 고생을 했다. 터전을 옮겨서 그런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쌓인 독을 빼내는 과정이었다. 그 기간을 거치고 몸과 마음이 거뜬해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극단적으로 말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일을 하러 가게 되면서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기운을 회복하는데 반나절 이상이 걸릴 정도였다. 옛날 어른들이 서울은 살 곳이 못되다는 말을 실감했다. 당연히 꼬박꼬박 출퇴근을 하는 심지어 야근까지 하는 일자리는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한 건 집 근처 산을 쏘다니고 거의 매일 십킬로미터를 뛰어도 힘든 줄은 모르겠다. 문제는 서울만 갔다오며 발생한다. 

 

의학전문기가 홍혜걸은 말한다. 인간의 몸이란 움직이라고 있는 거다. 의자에 않자 혹은 소파에 몸을 기대로 서너시간 기대 있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결국 최고의 면역은 공기 좋은 곳에서 움직이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미네 집 -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전몽각 지음 / 포토넷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람의 수고가 다른 이들에게 고마움을 불러일으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왜 저래? 아무리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딸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다니면서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데이트 하는 현장까지 쫓아와서.

 

<윤미네 집>은 단순히 한 가족의 기록이 아니다.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이다. 사진 한 장이 그 어떤 역사책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가감없이 보여준다. 만약 아버지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작업을 했다면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덕이었다.

 

간혹 아파트먼트 단지 안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진 사진첩들을 볼 때가 있다. 한 때는 화목했을 물론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으나 버려진 사진들을 보면 왠지 내 추억도 함께 나뒹구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태우는 것은 불법이나 잘개 잘라 보이지 않는 봉투에 담아 버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름 시대가 아니니 도리어 사진을 쉽게 찍고 지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의미없이 지우는 여러 사진들 중에 혹시 소중한 추억도 있지 않을까? 대수롭게 않게 삭제했다가 먼훗날 그 사진이 미치도록 그리워 울먹이지는 않을까?

 

사진은 영원의 한 순간이다.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사진은 영생을 얻는다. <윤미네 집>은 용케 살아남아 우리에게 속삭인다. 평생 남을 사진이라 생각하고 신중하게 찍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광준의 생활명품
윤광준 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한 때 윤광준의 팬이었다. 그가 쓴 <소리의 황홀>을 읽고 우리나라도 선진문화국가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이유는 상업적 물건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곧 클래시컬 음악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음반 평이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쓸 수 없는 오디오 기기에 대해 비판을 했다.

 

<윤광준의 생황명품>은 그 폭을 넓히고 있다. 오디오를 포함하여 배낭, 의자, 필기구, 심지어 막걸리까지. 우리 생활을 둘러싼 물건 가운데 잘 만든 것들을 뽑아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단지 기능 설명뿐이었다면 그건 사용설명서와 다를게 없었을 것이다. 심미적 안목을 결합시켜 한 물건을 품격의 대상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나는 상업주의야말로 사람들의 욕구를 가장(?) 건전하게 분출하는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돈이란 벌기도 하지만 쓰기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버는 것에 대한 조언이나 충고는 차고 넘치지만 제대로 쓰는 법에 대해서는 별반 이야기가 없다. 그저 남이 좋다고 하면 사는 식이다. 돈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물건의 좋고 나쁨을 비교하여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다. 그 능력은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부단한 시행착오 끝에 얻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윤광준은 그 지점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루이스 루시아 감독, 마리솔 출연 / 폰즈트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어떤 기억은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져 두고두고 꺼내 먹을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스카라 극장. 과외 선생을 따라 영화를 보러 갔다. 스크린의 여자애는 너무도 예뻐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예쁜 아이가 마음이 아파 울 때는 나 또한 울먹였다. 그러나 명랑하게 산타루치아를 부를 때는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내게는 그 여자아이가 부른 산타루치아가 최고다. 

 

어른이 되고 되서고 그 영화가 내내 떠올라 수소문 끝에 비디오 테잎을 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곁에 두고 있게 되자 그리움이 사라져버렸다. 언제 시간 나면 보면 되지, 라고 말은 하면서도 단 한번도 틀어보지 않았다. 무려 만 원이나 주고 샀는데. 참고로 20년 전 물가다. 

 

나만 이 영화를 좋아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마리솔의 팬들이 여전히 그리고 강력하게 군림하고 있었다. 이런 압박이 통했는지 드디오 디브이도로 출시되었다. 스페인 영화치고는 치칙사 대접을 받은 셈이다. 

 

여전히 마리솔은 예쁘고 할아버지는 근엄하면서도 순진하고 남자 아이들은 마리솔 바라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나? 나는 나이가 들었다. 마리솔을 보고 가슴 뛰던 소년은 머리속에서 뛰쳐 나올줄을 모른 채 굳어 버렸다. 산타루치아만 공허하게 맴돌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