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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ㅣ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때늦은 취미에 푹 빠졌다.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버려진 가전제품을 보면 가져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디오다. 대부분 철지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들이다. 가끔은 씨디 플레이어 기는이 있는 것들도 있다. 당연히 고장났으니 버렸겠지만 신기하게도 라디오 기능은 살아 있다. 주파수를 잘 맞추다보면 어딘가에선 반드시 아련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컹하며 엄춘다. 팔다리가 잘린 미인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기분이라서 드렇다.
<무한화서>의 첫 이야기 0은 이렇게 시작한다.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중략) 무한화서는 및에서 의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꽃이지요.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청량한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다 이 사람 진짜 시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시란 이런 거구요, 저런 감정을 느껴야 한답니다, 라는 식의 겉멋 들린 시인 흉내를 하는 책을 써 냈다면 경멸했을텐데.
위로를 받았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행위는 비참하고 추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철 덩어리는 그 참담함을 뚫고 청아한 음악을 들려준다. 마치 진흙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 음악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