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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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죽은 장르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더이상 써먹을 소재따위는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한 이야기는 영속하게 마련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제목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제목은 '화산 자락에서'지만. 위대한 오역인 셈이다. 여름이 주는 나른하면서도 치열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일본은 장인의 나라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를 중심으로 단체를 만든다. 이 조직들끼리 경쟁하는 구도가 또 다른 장인을 만든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화가 없다. 해방이후 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며 살아남기 전쟁이 몰두한 결과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그 문화가 남아 끝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장인 문화는 사회의 안정기가 지속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본 특유의 장인 사회를 축소하여 보여주고 있다. 외양은 건축사무소의 여름 별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촘촘히 짜여진 시스템 사회의 갑갑함과 그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우아한 문장으로.

 

덧붙이는 말

 

일본 소설은 전통적으로 사소설에 근거하고 있다.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보다는 내면의 흐름을 섬세하게 캐치한다.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는 일본이 매우 빈틈없이 꽉 짜여진 사회임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외부의 변화는 소수의 권력자에게 맡기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자기 속으로만 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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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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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취미에 푹 빠졌다.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버려진 가전제품을 보면 가져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디오다. 대부분 철지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들이다. 가끔은 씨디 플레이어 기는이 있는 것들도 있다. 당연히 고장났으니 버렸겠지만 신기하게도 라디오 기능은 살아 있다. 주파수를 잘 맞추다보면 어딘가에선 반드시 아련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컹하며 엄춘다. 팔다리가 잘린 미인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기분이라서 드렇다.

 

<무한화서>의 첫 이야기 0은 이렇게 시작한다.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중략) 무한화서는 및에서 의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꽃이지요.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청량한 소프라노의 노래를 듣다 이 사람 진짜 시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시란 이런 거구요, 저런 감정을 느껴야 한답니다, 라는 식의 겉멋 들린 시인 흉내를 하는 책을 써 냈다면 경멸했을텐데.

 

위로를 받았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행위는 비참하고 추해 보일지 모르지만 고철 덩어리는 그 참담함을 뚫고 청아한 음악을 들려준다. 마치 진흙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 음악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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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마을 식당
오쿠다 히데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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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은 죄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천지다. 여전히 구형폰을 쓰는 나는 멀뚱멀뚱 앞만 바라보기 일쑤다. 엠피쓰리로 라디오를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말 원시시대 사람이군. 읽을거리를 찾아 눈이 바빠지지만 신문을 펼치기에는 객차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럴 때는 문고판 정도의 책이 딱인데. 

 

오쿠다 히데오의 에세이는 나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딱이다. 에피소드 위주의 짧고 경쾌한 글이 듬뿍 담긴. <항구 마을 식당>도 그랬다. 동네 운동장을 열바퀴 정도 뛴 다음 숨도 고를 겸 벤치에 앉아 부산편부터 읽었다. 읽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5분. 으슬으슬 추워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언제 짜투리 여유가 생기면 그 때 또 읽어야지, 라고 다짐을 하면서.   

 

 <항구 마을 식당>은 부산을 포함하여 항구에 인접한 도시를 여행하여 먹고 마시고 떠드는 이야기다. 매우 유쾌하면서도 실랄한데 이를 테면 한국의 아이들이 떠드는 정도는 일본을 넘어선다는 식이다. 이런 말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잣대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어쩌면 막 쓰는 것 같은 그의 글이 사실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장소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교묘하게 엮어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차마 입밖으로 내기 힘든 말을 누가 대신하여 팟하고 내뱉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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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보급판) -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 지음 / 풀빛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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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상식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런 저런 법조문을 활용하여 피해나가는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 변호인단이 주장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법은 저렇게도 악용될 수 있구나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법이 지금과 같은 보편 타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이다. 법은 오랫동안 지배 계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아랫사람을 부리곤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법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음을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김영란은 법은 스스로 지키는 자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누구도 아닌 모두가 법을 알고 잘못 작용될 경우 바로 단죄할 수 있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조문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법이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말이 당연시된 지도 얼마 안된 것을 보면 말이다.

 

조만간(?) 새 대통령을 맞이할 것이다. 과거는 강물에 떠내려보내라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챙겨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헌법과 법률을 유린한 지도자는 언제나 국민의 탄핵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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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니스트 아워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 벤 포스터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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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즈니의 감정은 에니메이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도 매력적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나는 뮤지컬과 같은 재미만점, 또 다른 하나는 감동실화. <파이니스트 아워>는 후자에 해당한다.

 

실화를 영화 소재로 활용하는건 양날의 칼이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부함을 주게 될 우려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논픽션이니 재미가 없을 거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파이니스트 아워>는 이 두 지점을 절묘하게 빗껴가고 있다.

 

장쾌한 바다 장면을 듬뿍 담아 실제 사건을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짜릿한 쾌감을 준다. 단지 이뿐이었다면 다큐에 가까웠을텐데 여기에 드라마적인 요소를 극적으로 드러내며 영화의 수준을 높여준다. 죽음을 무릎쓰고 출동해야 하는 해안경비대 사람들간의 갈등,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를 험한 바다로 내보내고 가만 있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제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긴장감을 끝까지 놓치지 않게 한다. 마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단골로 등장하는 자연과 싸워 이긴 사람들 이야기를 영화로 보는 기분이 든다.

 

덧붙이는 말

 

<셜리>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역시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사명을 다했겠지만 결과는 너무도 허망했다. 먼저 뛰어내린 세명과 구조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사망한 한 명을 제외하고 서른 두명을 모두 구조하고 돌아온 해안경비대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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