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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표창원 국회의원이 후원하는 시국 비판 전시회에서 대통형을 나체로 풍자한 그림이 논란이다(2017년 1월 25일) 구체적으로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더러운 잠>이라는 이 작품은 백인 창녀 얼굴에 박근혜를 흑인 하녀를 최순실로 둔갑시켰다. 여러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여성을 비하했다는 것이다.
평소의 나같으면 중립을 지켰을 테지만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작가의 성별을 보자, 남자다. 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겠다. 이 작품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마네 또한 남자이다. 그 둘이 부인하든 아니든 여성을 보는 시각이 철저하게 남성적임을 알 수있다. 곧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남자의 나신에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될 수 있을까? 물론 남성의 나체를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들도 많다. 대부분은 남성의 힘을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자의 나체는 강력함을 여성의 누드는 수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네의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수줍은 듯 살짝 보여야 마땅한 여성의 누드를 과감하게 전면으로 그것도 관객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 봐라, 이게 내 몸이다. 너희들이 침 흘리는. 이렇게 똑바로 보고서도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냐?"
이 그림은 더 나아가 엄숙주의를 강요하는 프랑스 기득권 화가 사회에 대한 철퇴였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웃기자 마. 너희들이 그렇게 주곡 못사는 "미"라는 게 결국은 지배세력의 알랑한 기호를 맞추는 노예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겠느냐?
과연 <더러운 잠>의 작가가 이런 배경을 알고 <올랭피아>를 모티브로 삼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건 마네만큼 깊이 고민하고 이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침대를 배경으로 누워있는 여성이 있는 그림을 고르다 세월호와 주사바늘 등을 짜집기하여 시국 그림이라고 급하게 그려낸 것은 아닌지?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제목도 <더러운 잠>보다 <나른한 잠>이 더 낫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말
이른바 보수단체 회원이라는 극우파 할아버지가 국회로 달려가 작품을 패대기치는 것도 모자라 찢어발기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작가의 수고를 저렇게 대할 수 있는가? 이는 패미니즘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자는 당연히 책임을 지고 벌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