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어딘가를 가서도 꽉 보아야 하는 유명 장소는 도리어 피했다. 관광지 특유의 번잡스러움이 싫었다. 코비드 19 덕에(?) 집에 있는 날이 늘었다. 예전에는 없던 현상들도 나타난다. 여행도 그 중 하나다. 답답함이 가중되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진다. 사실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건 작년부터다. 집에서 가까운 호수에 다녀오고 나서였다. 토요일 오후 지하철을 타고 한 바퀴 빙 돌고 온 게 전부였는데 여운이 컸다. 이후 짤막짤막하게 다녀오곤 했다. 그러다 결국 강원도까지 갔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특히 주변이 차분히 정돈되어 있어 내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은 가기 전의 설렘과 다녀오고 난 후 갖게 되는 추억이다. 사실 여행지에서는 이런 저런 불편함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홈페이지로 봤을 때는 환상적인 숙소였는데 정작 묵고 보니 귀곡산장이었다거나 맛집이라고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돈 주고 쓴 블러그였다는 식이다. 다시는 오나 봐라 하며 발길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며칠 지나고 나면 또다시 발동이 걸린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참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어렵게 짬을 내 양평에 다녀왔다. 저렴한 가격에 리조트를 빌릴 수 있어서다. 큰 기대 없이 바로 가서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자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래도 두물머리는 가봐야하지 않겠냐고 잠시 들렀는데. 장관이었다. 일 때문에 약 10년 전 쯤 들렀을 때오는 달랐다. 그 때도 여전히 관광지였지만 지금이 훨씬 좋았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도 나름 멋이 있었지만 적당한 소음과 포토존 등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주차를 포함한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만족감이 컸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두물머리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연잎 핫도그도 맛을 보았다. 개당 3천원이라 살짝 비쌌지만 두툼한 크기라 감당할 만 했다. 아주 맛있다기 보다는 분위기 아니겠는가? 참 나도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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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다. 매년 오는 명절이지만 올해는 남다르다. 코로나 때문이다. 예년과 달리 고향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분위기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나는 한가위를 좋아했다. 오랜만에 친척을 만나서는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스트레스였다. 가장 큰 즐거움은 날씨였다. 가을의 절정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맘때같기만 하다면. 소소한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명절을 앞두고 받아보는 신문의 티브이 편성표는 보기만 해도 풍성했다. 사훌 혹은 나흘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선물처럼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형광펜을 꺼내 그 많은 방송 중 꼭 봐야만 하는 보석을 골라내는 게 살짝 서글펐지만. 지금이야 누가 그러냐 싶지만. 


밀린 신문을 정리하다 오늘 배달된 특집편을 보니 역시나 편성표가 있었다. 과거와 달리 넷플릭스의 볼거리도 포함되어 있어 더 뿌듯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정작 늘자 티브이는 빠져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신문을 죄다 뒤져보았지만 없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방송표는 본 적이 없네. 물론 신문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구독하는 한국일보에는 없다. 옛날에는 무조건 가장 뒷면 보기 좋은 자리에 한 장 가득 티브이 편성이 있었는데. 아무튼 덕분에 옛 추억도 되살리고 오랜만에 볼만한 프로그램에 동그라미도 치며 살짝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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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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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제각각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중 으뜸은 치통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가 좋지 않았다. 유전적 요인이 컸다. 첫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여전히 두렵고 공포스럽다. 치과에 가는 길부터가 무섭다. 그 날은 세상의 종말을 맞는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조린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 문을 열면 지옥이 시작된다. 치과 특유의 약품냄새와 이를 갈면서 내는 기계소음이 어우러져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게다가 옛날에는 치과의사는 왜 다들 클래시컬 음악을 좋아했던지. 간혹 바이올린 음악이라도 들리면 바로 죽음이었다.


왜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치과를 계속 언급할까? 지금까지 읽은 작품 중 치통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칫 로맨틱하게 들리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면 제대로 낚인 것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원래의 모습을 가고 있는 자연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는 이가 아파 고생하는 늙은이도 포함된다.


어제 치과를 다녀왔다. 땜질한 곳이 떨어져 나가서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예약했다. 경험상 끌면 끌수록 더욱 괴로운 질병이 치통임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의사 선생님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안심시키며 단박에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살릴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살려서 써보자구요.” 참 양심적인 분이다. 괜히 10여 년 이상 다니겠는가? 멀어지고 나서도. 노인도 이 분을 알았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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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 대위가 인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위 출신이 맞지만. 여하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가 된다. 너 인성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할머니도 그거보단 빨리 뛰겠다. 연예인도 아닌데 이처럼 눈길을 끄는 이유는 탄탄한 전문성이 바탕이 뒤기 때문이다. 해군특수훈련단에서 갈고 닦은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스토리다. 태어나자마자 미국에 가서 자란 한 청년이 한국 군인이 되기 위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오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가짜 사나이>로 빵 뜬 게 아니다. 그가 출연한 여러 매체를 접하며 개인적으로도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근 대위는 군인은 늘 춥고, 축축하고, 지쳐있어여만cold, wet and tired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힘겨운 훈련은 단지 지휘관의 가학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코로나 19로 힘든 나날이 이어지면서 누구나 괴롭다. 나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어제는 저녁식사를 하다 이빨까지 빠졌다. 당장 치과를 가야하는 처지인데도 순간 고민에 빠졌다. 지금 같은 때 병원에 가야 하나? 그러나 하룻밤 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정도 일에 멘탈이 흔들려서야 하겠는가? 그야말로 춥고, 축축하고, 지쳐있는 상태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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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던 장관은 아니었지만

 

혼자 조용히 걷고 싶었다. 일곱 여덟 시간 정도. 한라산이 딱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때로는 맞다. 그렇게 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산에서 보기 힘든 현무암들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도리어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힘도 덜 들었다.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가벼운 하이킹을 나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때는 몰랐다. 얼마나 오만했는지. 속밭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숙소에서 마련해준 주먹밥을 먹으며 이러다가는 금방 백록담에 오르는 거 아니야 라고 기고만장했다. 오판이었다. 


지옥문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12시 30분까지는 진달래 능선에 도달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너무 속도를 올린 게 탈이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참고로 한라산은 보호구역이 많아 등산코스가 단 하나고 폭도 매우 좁다. 사람이 몰릴 때는 게다가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겹칠 때는 매우 혼잡하다. 진달래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 30분. 정확하게 출발한 지 세 시간 만이었다. 돌이켜보면 조금 더 쉬고 다시 출발했어도 좋을 뻔했다. 여하튼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제부터 진짜 한라산의 진면목이 보이는 구간이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 전까지는 하늘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한 산림이었다면 이곳부터는 서서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신 대가도 치러야 한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다. 게다가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한다. 이미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게를 줄인다고 다 마셔버린 생수 덕에 목은 바짝 말라오고 배낭의 무게는 천근만근으로 전해져 온다. 경사도 갑가기 가팔라진다. 


오로지 남은 건 정신력뿐. 정상에 가까워 오지만 백록담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움푹 파인 화산구니까. 그럼에도 띄어띄엄 보이던 등산객들이 어느 순간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들 한 목적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동지들이다. 정산 근처는 환호성이 끊이지 않는다. 연신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심지어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트게 틀어놓고 춤까지 춘다. 내가 바라던 장관은 아니었다. 왠지 머물고 싶지 않았다. 드물게 물이 많이 들어찬 백록담을 3분쯤 바라보고 바로 내려왔다. 내겐 흐릿한 기억밖에 남기지 않은 채. 10분쯤 내려오다 알았다. 이런 바보 같으니. 계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잖아.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를 대뇌이며 다시 한 번 올라갈까 순간 생각했으니 이내 포기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산길이 인상 쓰는 인간들 천지였다. 나도 조금 전만 해도 저랬는데. 그렇다고 마냥 여유를 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바닥은 미끌미끌 거렸고 설상가상 무게를 줄인다고 우산도 준비하지 않았다. 비옷이라도 가져올걸,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온 신경을 발끝에 모르고 조심조심 내려오는 수밖에. 그저 조용히 걷고 싶었다고, 웃기고 있네. 지금 당장은 이 산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미 이곳에 들어온 지 일곱 시간이 넘었는걸. 유일한 위안은 곳곳에 보이는 안내판이었다. 입구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내가 살아 돌아갈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증거였다. 재미있는 건 구간표지판이 입구에 가까울수록 늘어난다는 거다. 올라갈 때는 용기를 내려갈 때는 위로를 주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눈앞에 내가 출발한 곳에 들어온다. 바로 앞서가던 두 사람도 기뻤나 보다. 올해는 더 이상 산에 갈 일 없겠다. 징하다 징해. 그게 바로 내 마음이었다. 지하철 입출입구처럼 생긴 바를 손으로 밀며 비로소 8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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