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북한을 비아냥댈 때 거주 이전이 제한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곧 각 도시간 이동이나 주거 이주가 근본적으로 막혀 있다. 아주 예외적으로 이 규정을 완화한다. 문제는 그 이유라는 게 자의적이다. 권력 마음대로 만들어 제 입맛에 맞게 적용한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외지로 몰아내는 것이 한 예이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2020년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정권 출범이후 스물한번이나 내세운 부동산 정책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책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다. 대출규제에 이어 거주이전까지 막고 나섰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다른 지역에 이미 집이 있는 경우 대치·잠실 등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 거주해야 하는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특정 지역에 살기 위해서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 세상에, 내 돈 내고 내가 집을 산다는데 이유를 밝혀야 한다니. 게다가 정부가 심판자 노릇까지.


정부의 답변은 괘변에 가깝다. 국토부는 유주택자의 경우 신규 주택 취득을 위한 토지거래계약허가 신청 시 거주해야 하는 사유 또는 추가 취득해야만 하는 사유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소명해야 허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서울과 경기 성남시 등 인접 지역 거주 유주택자는 여기에 더해 기존 주택을 매매 또는 임대하겠다는 계획서를 내도록 했다. 다시 말해 강남으로 이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집을 팔든지 세를 주어야 한다. 아니 세금을 회피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참 정책 담당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집을 사고 팔거나 임대를 주어본 사람은 안다. 무슨 아이폰 파는 것처럼 뚝딱 팔아치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안 팔리고 안 팔리다가 결국 세를 주고 마는 경우가 파다하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적어도 ㅁ 하나쯤은 날아간 국가가 되고 말았다. 무슨 전시상황도 아니고 강남집값 상승이 국가재난을 가져오는 것도 아닌데 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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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마술피리
버로스 (Stuart Burrows) 외 노래,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 Decca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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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감상하려면 각오가 필요하다. 아무리 자막이 달린 스크린이 있다고 해도 서너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바그너의 링 시리즈를 본다면 철문이 닫힌 채 꼬박 열 시간 이상 갇혀 있어야 한다. 음반으로 듣는 것도 꽤 고욕이다. 하이라이트가 아니라면 기본이 세 시간이다. 시디라면 세장을 연달아 플레이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오페라는 극소수만 좋아하는 골방 문화쯤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오죽하면 오페라 평론가조차 자동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꼼짝없이 ‘라 트라비아타’ 전곡을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하겠는가? 사 놓고 계속 미루던 <마술피리>를 아침부터 들었다. 중간에 시디를 갈아 끼운 시간을 빼고서도 세 시간이 족히 걸렸다. 되도록 다른 잡다한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한 결과, <마술피리>는 천상의 음악임을 깨달았다. 비록 알아듣는 말은 파파케노 정도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괜히 겁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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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질리 홉킨스 일공일삼 40
캐서린 패터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비룡소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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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책장에 쭉 꽂혀 있는 책들 가운데 마음이 내키는 것들을 골라 이리저리 뒤적이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라고 결정하고 간단하게 토스트와 커피로 끼니를 때우고 마란츠 오디오에 어제 골라놓았던 시디를 넣고 두세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상상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있을 때 권할만한 책은 역시 아동서적이다. 일단 짧고 간결하다. 원서와 함께 읽어도 부담이 덜하다. 또한 교훈적이다. 나이가 들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보다 우여곡절은 있지만 끝은 해피한 게 당긴다.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는 이 조건에 딱 맞다. 엄마가 있지만 위탁모에게 맡겨진 질리.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적응과 반항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사실 눈물 나는 이야기지만 캐서린은 두 눈 부릅뜨고 가감 없이 현실을 도려낸다. 이 소설의 필살기는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대사다. 어쩌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지.


질리처럼 불행한 처지는 아니라도 어린 시절이 꼭 행복으로 치장되어 있는 건 아니다. 아픔과 괴로움, 그리고 씁쓸함이 누구에게나 배어 있다. 그럼에도 그 때를 즐거움으로 떠올리는 까닭은 언제나 계속될 것 같던 그 시대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진부해서 새로움이란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았던 과거가 못내 그리운 건 왜 일까?


옛날 옛적, 풀밭과 숲과 시내와

대지와 온갖 진부한 광경이

천상의 빛처럼 그리고 꿈처럼 성대하고 생생하게 치장한 것인 듯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아서

밤이든 낮이든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옛날에 보았던 것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_윌리엄 워즈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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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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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단다


“조너스는 친구들이 아무 활력도 없는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는 사실에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친구들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화가 났다.”



좋은 글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확한 문장, 풍부한 표현, 올바른 전달.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쉽게도 정답은 없다. 그냥 읽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다.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가 그렇다. 현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사회는 철저하게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열두 살이 되는 순간 남은 평생의 직업이 결정된다. 누군가는 엔지니어가 되고, 의사가 되고, 학자가 되고, 연예인이 되고, 산모가 된다. 그렇다. 아이를 낳는 전문 직업이 따로 있다. 일인당 딱 세 명씩. 이후에는 육체노동자로 살아가야 한다. 어째, 점점 으스스해진다. 그런데 웬일인지 사람들은 불만이 없다.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 중에는 전지자도 있다. 단 한 명이다.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해주는. 다른 일과 달리 이 직업은 몇 십 년 동안 공석일 때도 있다. 후임자가 마땅치 않거나 도중 탈락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조너스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두려우면서도 내심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전임자로부터 기억을 전달받게 되는데.


이번 한 주 꽤 힘이 들었다. 우선 휴대전화기가 고장이 났다. 작년 이 맘때도 같은 일을 겪어 어찌어찌 새로 사서 써왔는데 그만. 혹시 하는 마음에 서비스센터에 가봤지만 예상대로 사망. 새 폰을 사야 하나 2G 보상을 기다릴까 하면서 이리저리 알아보느라 지쳤다. 더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윈도우 10이 지멋대로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면서 지금까지 써왔던 글이나 기능들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이전 버전으로 돌아가려고 매일 두세 시간씩 노트북에 매달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마디로 힘은 힘대로 빼고 성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기버>를 읽게 되었다. 당초 원서를 먼저 보았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영어가 힘든 건 아닌데 파악하기가 알쏭달쏭했다. 번역 책을 보자 바로 이해가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였지만 내용은 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점 심신이 안정되어 갔다. 딱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몰입도가 높았던 것 같다. 곧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일체의 잡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빼어난 책이란 바로 이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미루어왔던 휴대전화도 알아보고 무려 6개월여 만에 이발도 하고 동네 놀이터 그늘 등 없는 벤치에 앉아 나머지 절반을 마저 보았다. 오랜만에 행복한 토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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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보지 못하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집안 살림도 마찬가지다. 누가 되었건 이 일을 하게 되면 패닉에 빠진다. 문제는 지금까지 여자가 오랫동안 이 역할을 해왔다. 최근 들어 근나마 분담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 억울하다. 여자들로서는. 아이도 낳고 살림도 해야 한다니. 게다가 내조라는 이름으로 남편 뒷바라지까지. 누군가는 이 고리를 끊어었어야 했다. 1982년 김지영이 다소 과장되고 극적인 스토리인건 맞지만 그럼에도 살림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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