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 꼭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일단 내가 잘 모르는 분야다.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쓴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몇 번이나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희한한 일이다. 주식 광풍이다. 발단은 코로나 바이러스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주가가 동시에 하락했다. 다들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중에는 이 기회에 주식을 좀 사두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무릎에서 서서 어깨에서 팔겠다는 심보로. 실제로 주식 거래량은 급등했으며 심지어 빚을 내서 투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주식을 사고 판 적이 없다. 유혹은 있었다. 대학 다닐 때 경영학과 친구가 함께 주식공부를 해보자며 백만 원씩 넣어보자는 권유도 있었고, 직장에서도 유망주가 있다며 넌지시 정보를 던져주는 동료도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곧 내가 직접 조사하고 겪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만 믿고 투자한다는 게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주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단기 수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향후 목돈마련을 목적으로 묻어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요즘 한창 뜨는 네이버나 카카오 주식의 10년 치 변동을 보면 명목가격으로 한 주당 약 20만 원 이상 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향후 십 년 후에도 더 오를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이들 회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본전은 건진다는 말이다. 그래, 올 6월에 만기가 되는 정기예금을 주식으로 돌려보자.


최종 결정만 남겨둔 셈이다. 그러다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소위 주식 전문가가 패널로 나왔다, 그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의 주식 광풍은 부동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 그동안 지나치게 그곳에 투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찾고 있다. 반면 부동산으로 차익을 실현한 사람들이 여유자금으로 주식에 몰린다는 설명이다. 요컨대, 수익 측면에서 주식은 부동산에 미치지 못한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아무리 주식의 고수라고 해도 원금의 서너 배 이익을 보기는 극히 드물다. 도리어 까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부동산은 다르다. 입지가 좋은 아파트먼트의 경우 분양가를 넘어서는 수익은 쉽게 발생한다. 이유가 뭘까? 고정성 때문이다. 주식은 수시로 사고팔며 각종 수수료가 붙지만 부동산은 억지로라도 고정되어 있고 진입장벽이 있어 단기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이익이다. 또한 집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하기 때문에 강제저축의 성격도 강하다. 곧 쓸데없는 소비를 막는다.


그렇다고 주식 대신 부동산 투자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럴 여력이 있는 사람들 자체도 드물지만. 단 여윳돈이든 빚을 내서라도 주식에 투자하면 위험이 따르는 건 분명하다. 차라리 그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집을 최대한 빨리 장만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식은 잃으면 말 그대로 깡통을 차지만 집은 가격이 오르든 내리든 일단 살 집이 남지 않는가? 그 집을 담보로 사업도 할 수 있고 하다못해 생활자금으로도 쓸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입] 안드레아스 숄 : 칸타테 [독일 바로크 칸타타의 탄생과 역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외 작곡, Basel Consort 연주, / Harmonia Mundi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소박한 아름다움의 결정체, 어느새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안드레아스 숄 : 칸타테 [독일 바로크 칸타타의 탄생과 역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외 작곡, Basel Consort 연주, / Harmonia Mundi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지상 최고의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클래시컬 음악 분야에서는. 누가 뭐래도 최고는 오케스트라며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교향곡이다, 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는 다를 수 있다. 남자의 경우 베이스 보다는 테너, 여자는 메조 보다는 소프라노 식으로. 안드레아스 숄은 우리에게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귀를 간질이는 속삭이는 듯 한 음색이 매력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나는 카운터 테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통 성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높은 목소리로 뽐내듯이 부르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안드레아스 숄의 칸타타는 이런 내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음반이다. 마치 독일의 허름한 마구간에서 동네 사람 몇 몇을 불러놓고 모든 기교를 내려놓고 신앙심을 고백하는 듯하다. 노래를 듣는 동안 어느새 나 또한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은 1905년 평양에서 설립된 숭실대학이다. 성균관이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대적 의미의 대학은 아니었다. 지난 100여년 이상 대학은 무럭무럭 성장해 현재 400개가 넘는다. 학생 수는 350만 명 정도 된다. 정망 엄청난 숫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뀐 일상 가운데에는 학교 문을 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의무교육기관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대면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하는데 돈을 내야 한다는 게 이상한 거다. 아무리 불가항력이라고 해도. 아니나 다를까 대학 등록금 반환소송까지 생겼다. 승소를 할지 안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건 대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사실 한국에서 대학이란 전문지식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간판의 성격이 강했다. 곧 이른바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야 취업에 유리한 구조였다. 선 기능도 있었다. 양질의 값싼 인력을 대량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고 대학이 흔해진 지금 과연 과거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인구가 줄어들었다. 대학에 들어갈 사람이 적어지니 당연히 많은 교육기관이 필요 없다. 일류 대학에 대한 선호도 예전만큼은 아니다. 물론 SKY 대학의 특정 학과는 여전히 가고 싶어 안달하겠지만 다른 학과의 경우 졸업이 바로 취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은 만약 내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학을 가야 한다면 굳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최소 2~3년간 최소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금여유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한다. 소위 유렵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1년 동안 유예기간을 주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대학에 가는 걸 서두를 이유가 없다.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면 된다. 대학과 사회생활을 일종의 기회비용으로 보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대학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서서히 범용 학습기관으로 대체될 것이다. 일종의 백화점 교양센터처럼 아무나 누구나 편한 시간에 공부할 수 있게 된다. 대신 전문교육은 진정으로 그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대학원으로 재편될 것이다.


올해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이번 사태로 대학의 허상이 벗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은 포스트 코로나 이후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학교의 이름만으로 직업을 갖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반면 교육을 받을 기회는 널려있다. 누가 이 자리를 선점할지 자못 흥미진진해진다. 


관련 기사 : http://h2.khan.co.kr/view.html?id=202005281138001&code=940401&ref=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row1_thumb_2&C=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년 5월 27일 기준 하루 동안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신규 감염자수는 40명이었다. 이태원발 감염으로 어느 정도 늘다가 적정한 선에서 유지된다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문제는 경로를 모르는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5차, 6차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정직하게 말해 이런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감염은 늘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억제책만 펼 수 없는 이유는 생존이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곧 어느 정도 환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 케이 방역 운운하며 자화자찬을 하는 건 꼴 보기 싫음을 넘어 곡해를 낳는다. 적어도 코비드 19에 관해 어떤 대책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대규모 검사와 격리가 과연 옳은지도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모든 결과는 사태가 다 지난 후에야 판가름 난다. 여하튼 계속 다시 감염자가 늘면서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한두 달도 아니고 석 달째 계속 감염자수와 사망자수를 바라보며 사는 삶이 정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언제 종식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그나마 우리는 낫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섣부른 국뽕은 잠시의 위안을 줄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