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지같은 학교야.’


경호는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였다. 자신의 말로는 지방출신의 서울선호 때문이라고 하는데. 표준말을 또박또박 쓰는 게 너무 신기해보였단다. 아무튼 한 달 남짓 대학생활하는 동안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서서히 친해지려던 순간 매몰차게 돌아선 게 여전히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재수를 할 때도 연락을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불태워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나와”

“내가 왜 거기 가냐? 죄다 2, 3학년들 아니야?”

“뭔 상관이야, 다들 동기인데”

“그래도 ...”

“아무튼 오는 걸로 알게. 7시다. 7시. 학교 앞 베어스 타운 알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경호는 예나 지금이나 내게 잘해줬다. 말로는 쪽수만 채우면 된다고 했지만 세심하게 배려했음이 틀림없다.


그 자식은 변함이 없었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경호를 꼬나보더니 대뜸, “야, 어디 1학년이 4학년 미팅하는데 나오냐”라고 말했다. 차라리 나에게 직접 이야기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무슨 소리야, 이건 내가 주선한 거야. 숙대 무용과 애들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군대도 빠진 주제에’

무슨 빽을 썼는지 그는 군에 가지 않았다. 심지어 방위조차. 부모덕으로 부정입학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뭘 그렇게 빡빡하게”

경호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그를 달랬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돌려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성훈아, 미안, 내가 조금 있다 다시 연락할게.”


별 일 아니었다. 그깟 미팅 나가서 뭐하냐. 복학생 주제에. 다시 이 학교에 환멸감이 몰려왔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혼자만 왕따가 된 것 같았다. 정문을 통과해 경사진 보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다시 입학시험을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 노 여기 근처에 복사하는 데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3초쯤 아무 말 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나한테 묻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긍정의 미소를 보내주었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의 초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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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은 매우 어수선했다. 마치 내 마음을 반영하듯이. 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 달인가를 다니다 다시 재수를 선택했다.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말은 변명이고, 사실은 내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나은 대학교로 가고 싶었다. 그 땐 몰랐다.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를. 결과는 단 10점 올랐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원래 원했던 학교에 원서를 썼다. 혹시 아나, 행운이 내 편이 되어줄지. 


“자네는 잠바 지퍼를 다 채우는 게 낫지 않나?”


딱 봐도 교수 인듯 싶은 심사관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보자마자 꺼낸 문장이 고작 그거라니? 그 때 이미 체감했다. 아, 떨어졌구나. 정문까지 이어진 기나긴 길을 걸어 나오자마자 병무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게 낯설었다. 아는 얼굴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의실에서 3년 전 나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막타워 앞에 선 기분이었다. 분명한건 난 뛰어내려야했다. 그 장소국 혜자도 있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야, 어때 복학한 소감은?”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 이제 2학년이 된 동기였다.


“글쎄 ...”

“너 이번에 도망치지 마라. 그럼 나한테 죽어.”


휴학계를 내겠다고 했을 때 나를 응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맙다, 너 밖에 없다.’ 속으로 주절거렸다. 

“뭘 멍하게 있어? 가자, 제대 기념으로 선배가 술 한 잔 살게”

“선배는 무슨?”

“너 임마, 이게 선배한테 게기네. 그럼 니가 사든지”

“알았어, 가자구 자”


결국 우리는 필름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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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 마치고 스무 살 가까이 되어서 우리나라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집에서 한국말을 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등학교까지 죽 일본인 학교를 갔으니.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가 좋았다. 선망과 비아냥 사이 어딘가에서 서성이며 거리를 두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성훈 상은 제가 어디가 좋아요?”


그녀는 언제나 내게 상을 붙여 말했다. 처음엔 ‘아차’ 하면서 ‘미안’이라고 했지만 나는 듣기 좋으니 괜찮다고 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럼 너는 내가 왜 좋아?”


혜자는 그럴 때면 고개를 살짝 돌리며 ‘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내심 기뻐했다. 어쩌면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되묻는지도 모른다. 그게 벌써 8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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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우울과 무기력에는

작고 소소한 성취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지금의 나에게는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칵테일을 만들고, 플랭크를 하고, 한 권씩 책을 읽는 일이 그렇다.


_하수연


미치도록 글이 쓰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평범한 하루였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예약해둔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가고 동네 빵집에 들어 꽈배기 3개를 2천 원에 사고 바로 옆 커피점에서 열 번 마신 쿠폰으로 천오백 원짜리 커피를 천 원 할인받아 오백 원에 겟해서 꽈배기와 함께 먹고 마셨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다.


저녁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동차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아, 이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하필 내 차 앞의 자동차 후미등이 계속 켜져 있다. 당연히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끌 줄 알았는데. 안내원에게 이야기하니 시동을 키면 꺼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부랴부랴 검은 비닐로 막았지만 내내 거슬렸다.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집 근처 주자장에 차를 세우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현관 문 앞 보도에 대형 오토바이가 떡하니 서있다. 그렇게 몇 번이나 관리실에 이야기하고 당부까지 했겄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오늘 하루 좋았던 모든 기분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더 화가 나는 건 오토바이를 세운 사람은 내게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는 걸 모를 거라는 확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냅다 발길질을 해서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신문 사회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 붉히고 생돈을 뜯기는 일이 생길 것이다.


애써 가라앉히고 집에 돌아왔지만 아대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고 한 삼 십 분을 노려보다 겨우 써나갔다. 세상의 불의와 유쾌하게 맞서 싸우는 몇 안 되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을 준 하수연 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강박과 완벽주의는 같은 고리를 타고 났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아참 내일 아직도 그 자리에 괴물이 있다면 점잖게 <보도위 오토바이 주차금지>라고 쓴 종이를 붙이고 올 생각이다.


관련 블러그 : https://blog.naver.com/mmsnmm/22184538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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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에 매달리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못하는 현상을 집념증후근이라 한다. 영어로는 tenacity syndrome이다. 좋게 말하면 끈기고, 나쁘게 보면 집착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런 성향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이치를 따지기 좋아하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속이 시원하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예를 들면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면 좀 참고 넘어가면 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려고 한다. 원인을 알게 되면 다소 시끄럽더라도 납득이 되어 넘어가게 된다. 


흥미로운 건 4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리어 집념증후근이 빛을 발하는 분야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코딩을 하거나 아이티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마치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하는 열정이랄까? 물론 문제도 크다. 일상생활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소하고 별일 아닌 것에 똑같은 열정을 쏟아붓다보면 몸과 마음은 분열을 일으키며 무너지고 만다. 내 경우에는 원칙이 있다. 일정한 울타리나 천장을 치는 것이다. 곧 어떤 사소한 일이 꽂히면 이일은 언제까지 하겠다고 미리 마음을 먹는 거다. 만약 그 경계를 넘어가면 두말없이 손을 놓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뇌란 천방지축이라 주인이 무언가에 몰두하여 풀가동하면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연습이고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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