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느려지고, 공간은 수축되고, 질량은 늘어난다 


뉴턴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어 있고,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고, 우주의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우주는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대였고, 모든 관찰자에게 사건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이 동일하게 보이는 극장이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질량, 길이, 시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은 관찰자의 상대적 움직임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쌍둥이에 비해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하는 또 다른 쌍둥이 우주인에게 시간은 느려지고(움직이는 시계의 바늘이 느려진다), 공간은 수축되고(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줄어든다),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특수” 상대성의 이런 결과는 모두 20세기에 수행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었지만, “특수”이론에는 가속이 포함되지 않았다. _만지트 쿠마르, <양자혁명> 가운데_


책상 위에 올려두고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읽을 책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양자혁명>이 그렇다. 벌써 다섯 번째 보고 있는데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마치 마법사들의 초극강 대결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계속 책을 집어 드는 이유는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느려지고, 공간은 수축되고, 질량은 늘어난다니. 이거야말로 매직이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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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맞서 싸우거나, 회피하거나. 대체로 젊었을 때는 전자를, 나이가 들어서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사람 성향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나 같은 경우는 부딪치는 걸 택하면 살아왔는데, 살아보니 매우 불편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곧 편익 대비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세상에 거슬리는 일이 한두 가지겠는가? 


어제도 그랬다. 베란다에 나갔는데 갑자기 눈이 부셨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비치는 강한 불빛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집이 아니라 맨꼭대기층 복도가 근원지였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 전전긍긍하다 늦은 시간이지만 관리실에 전화하여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일단은 피하는 게 우선이다. 집안을 돌아다니면 검정색 종이판을 찾아 임시로 창문에 덧대어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월요일 오전에 다시 한 번 문의해야지. 요컨대, 일단 피하고 다시 맞서 싸우는 전략을 정한 것이다. 


덧붙이는 말 


정신의학에서 강박을 치료하는 수단은 두 가지다. 노출과 외면. 곧 자신이 강박을 느끼는 상황을 과다하게 노출함으로써 익숙해지게 하거나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거다. 내 경험상 승자는 외면이다. 아무리 자주 본다고 해서 꺼림칙한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이미 환자가 아니다. 차라리 피하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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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 마주한 로봇이 엄마라면


모성애란 타고난 것인가? 만들어졌는가?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언젠가 소설의 소재로 쓰겠다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때의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긴다. 그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몰랐다. 여자 친구도 있었다.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둘은 연인이었다. 남자는 수수했고 여자는 화려했다.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내 잊어버렸다. 그들과 만날 일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갈 무렵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여자가 자살했다. 갓 돌을 지난 아이와 함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였다. 원인은 산후우울증. 기이한 경험이었다. 


넷플릭스 영화 <아이 엠 마더>를 보았다. 인류와 기계의 대결이라는 흔한 설정이었지만 특이한 건 모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점이다. 곧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전유물인가? 아니면 조작된 것인가? 태어나서 줄곧 로봇에 의해 자라 엄마라고 믿는 딸. 어느 날 자신을 낳은 친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혹은 그렇다고 믿게 되고 로봇엄마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데 알고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이쯤에서. 


어찌 보면 모성애란 만들어낸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엄마에 대한 감정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온 세상 모든 어머니가 아이들에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게 아니다. 그 중에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심지어 자식들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 죽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최근 5년간 0세에서 1세 사이 영유가 132명이 살해되었다. 대부분 부모, 특히 어머니가 범인이었다. 단순히 병리적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원래 없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모성애가 유지되는 이유는 직간접적인 사회의 압력 탓이 크다. 곧 가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묵적인 합의가 강하게 작용한다. 여기에는 다른 동물과 달리 미완성 형태로 태어나는 인간에 대한 배려도 작용한다. 탄생 이후에도 일정기간은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성애도 이런 기간을 유지하기 위한 진화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영유가가 바로 부모에게 격리되더라도 케어가 보장된다면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 된다. 영화 <아이 엠 마더>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유전적 모성애보다 사회적 보살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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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잠실야구장에서 치루어지고 있는 한국프로야구 연습경기 


플레이 볼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짤막하게나마 야구 장면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경기와는 살짝 다르다. 평면이 아니라 외야 부문은 직각으로 기울어져 있다. 또 특이한 점은 관객이 매우 적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후변화 현상이 생기면 바로 중단한다. 상상력의 결과라고 여겼는데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코로나 19로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그중에서도 스포츠가 사라진 건 놀라운 일이다. 물론 운동경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정식으로 경기를 치루는 모든 종목은 취소되었다. 오죽하면 올림픽까지 연기되었겠는가? 다행히 우리나라는 진정세로 가면서 프로야구가 개막을 앞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4월 21일부터 당일치기 연습게임을 하고 있다. 곧 하루를 숙박하지 않고 버스로 이동가능한 팀끼리 맞붙는다. 오늘 우연히 티브이 중계를 보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관중이 없는 경기장은 마치 진공상태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던지고 치고받고 뛰고 있었지만 어쩐지 무중력상황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천만다행이다.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기분이 아닌가보다. 야구의 종주국인 미국은 물론이고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매우 관심이 높다. 실제로 한국야구 관련 뉴스가 부쩍 늘었다. 부디 큰 탈 없이 한 시즌을 마치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말


굳이 야구라는 단어를 두고 베이스볼을 제목으로 쓴 까닭이 있다. 야구 野球는 일본에서 쓰는 한자말을 그대로 쓴 것이다. 들판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의미인데 영 마땅치 않다. 대신 베이스볼은 베이스를 두고 벌이는 게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고로 대만에서는 봉구라고 부른다. 방망이로 공을 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이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관련 기사 : file:///C:/Users/choi%20youngsim/Desktop/article_f334b9eb-87b6-599c-8798-040ef73ef44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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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고민과 걱정은 선택 때문에 생긴다. 곧 이걸 할까, 저걸 고를까? 문제는 어떤 결정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 다른 대안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쓰이는 영어표현이 바로 Think Outside the Box다. 우리말로 하면 상자 밖으로 나와 생각을 해보라쯤 되겠다. 곧 지나치게 골똘하게 생각하다보면 주어진 상황이 전부인 줄 알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 땐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어제 내가 그랬다. 티브이 화면에 흰줄이 계속 지나간다. 전에 없던 현상이라 나름 인터넷도 찾아보고 몸을 써가면서 텔레비전을 들었다 났다 해가면서 고쳐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 여하튼 나름의 조사 끝에 내린 결론은 티브이 혹은 셋탑박스의 문제라는 거다. 곧 둘 중 하나가 범인이다. 만약 셋탑이 문제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혹시 티브이가 불량이라면 이건 교체 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셋탑을 설치해준 통신사와 통화해 기사 분을 모셨다. 당장이라고 셋탑을 뜯어 분해하여 속을 볼 줄 알았는데 증상을 이야기하니 대뜸 해상도 문제라는 게 아닌가? 무슨 말인지 잘 들어보니 우리 집 티브이가 에이치디 화면을 받을 수는 있지만 브라운관형이라 흰줄이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상도를 떨어뜨리거나 과거 에스디 화면을 설정하면 화질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줄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리모컨으로 설정에 들어가 직접 해상도를 조정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 이렇게 쉬운 방법이. 아쉬운 대로 낮은 화질로 보거나 아니면 새 티브이를 사거나 하면 되는 것이었다.


박스를 벗어나고 보니 완전히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 후회되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돈이 굳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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