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시켜야 한다
기본소득은 노동이나 재산유뮤와 상관없이 무조건 지급하는 돈을 말한다. 2017년 핀란드에서 최초로 도입되었지만 그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에 처음 등장하였다. 책제목처럼 정말 꿈같은 일이라고 여겨졌던 일이 현실이 되는 데는 500여 년이 넘게 걸렸다.
경기도 주민들은 재난기본소득을 받고 있다. 신용카드로도 가능한데 아무래도 노년층은 직접 받기를 원해 지급 첫날 혼란이 있었다. 코로나 19라는 비상상황이고 생계를 책임질 정도의 돈은 아니며 또한 사용처와 기간이 정해져 있어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첫걸음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급과잉사회에 살고 있다.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를 사려고 해도 너무 많은 선택지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떤 형태든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급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다. 곧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공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공짜 돈이라며 사회주의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대답 대신 지금까지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나라에서 왜 기본소득을 공급하지 않았는지가 더 의문 아니냐며 되묻겠다. 배급제와 기본소득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고 후자는 시장을 살리기 위한 방책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는 쌀이나 비누 같은 생필품을 나눠주는 반면 자본주의는 쿠폰이나 가상화폐를 지급하여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한다.
정부는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타성에 젖어 적자재정을 걱정하고 있지만 지금은 역기능보다 장점이 훨씬 더 크다. 국민의 70퍼센트 식으로 선을 그으면 그걸 가리기 위한 쓸데없는 행정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된다.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부자가 죄인도 아닌데 더 많은 세금을 내고도 받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잘사는 사람이 그깟 백만 원이 뭐가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 돈으로 기부를 하든 아니면 쓰지 않고 내버려두건 그건 정책결정자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