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외 감독, 잭 니콜슨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큐브릭의 무덤에 찾아가 엎드려 절을 하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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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외 감독, 잭 니콜슨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은 영화 <샤이닝>이 별로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담겨있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그러나 결과는 폭망. 반면 영화 <샤이닝>은 불멸의 자리에 올라섰다. 스탠리 큐브릭은 킹에게 아이디어만 얻었을 뿐 완전히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첫 장면에서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 자동차 장면부터 압권이었다. 폭설로 고립된 호텔. 그곳에서 글을 쓰는 작가. 주변엔 오로지 아내와 아들뿐. 누군가는 미쳐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소설가가 주인공이 되고 만다. 원작의 독백형태 넋두리는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연기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영화 기술적으로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놀랍다. 자세히 보시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 씬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호텔 외관에서부터 객실과 로비에 이르기까지. 마치 정상과 비정상을 오고가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미로 추격씬도 놓치기 아깝다. 마치 내가 살인범에게 쫓기는 것 같다.


그러나 가장 멋진 순간은 마지막이다. 이제 드디어 절정에 다다르려는데 순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치 후편이 있다는 듯이. 스탠리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공포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직접적인 살인 같은 끔찍한 장면은 거의 없다. 도끼 살해장면을 빼면. 그럼에도 심장이 죄어오는 이유는? 엔딩 씬이 올라가고 난 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어서다. 스티븐 킹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큐브릭의 무덤에 찾아가 엎드려 절을 하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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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배가 사장인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이 장점인 반면 늘 화가 많았다. 대표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만두었다. 나중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이었다.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다 발견했는데 이미 때나 늦었다. 분노가 먼저인지 아니면 병이 우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둘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후배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분노보다는 우울이 낫지.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잖아. 재택근무를 한 지도 두 달이 지나간다. 나름대로 일상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집에 있다고 해서 마냥 편안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시도때도없이 울리는 초인종. 쓰레기 버리기. 청소하기. 밥하기. 고장 난 가전제품 에이에스 신청하기. 별 것 아닌 일인 듯싶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면 짜증이 난다. 괜히 주부 우울증이 생기는 게 아니다. 


오늘도 그랬다. 그저께 산 공적 마스크가 포장을 뜯어보니 불량이다. 바꾸러 가야 한다. 귀찮은 마음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약국에 간다. 교체한 후 재난기보소득을 문의하러 주민센터에 방문했다. 해당 날짜가 아니어서 기대를 안 했는데 그냥 신청하면 된단다. 다행이다. 잠깐 짬을 내 공원을 산책한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 이해가 간다. 나처럼 집안일을 하다 잠시나마 시간을 낸 거다. 그러나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오후 1시에 티브이 수리하러 사람이 오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으로 행한다. 현관문을 열자 땀부터 난다. 뒤늦게 아침식사를 한다. 빵과 커피가 전부다. 그나마 언제 오실지 몰라 급하게 먹는다. 겨우 시간에 맞추어 다 먹었는데 오지 않는다. 맥이 빠진다. 슬슬 화가 치민다. 동시에 우울하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기에는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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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아도 너무 얇다고 선전하는 슈퍼슬림 티브이. 지금 보면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출시 당시에는 최신식이라 백 만원 넘게 주고 구입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우리 집 티브이는 브라운관이다. 브라운관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분들도 많을 것이다. 원래는 사람이름이다. 곧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 때는 1897년, 독일인 브라운은 유리로 만든 진공 용기, 전자총, 편향 코일, 형광면을 합쳐 음극선관을 만들었다. 원래는 티브이 용도가 아니었으나 텔레비전용으로 활용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브라운관의 핵심 기능은 전자총이다. 이 총이 영상을 골고루 표면에 분사시키게 된다. 수명이 오래가고 자연스러운 색감을 낸다는 특징 때문에 오랜 사랑을 받았다. 문제는 큰 화면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브라운관 티브이의 최적 화면은 20인치 내외이면 40인치만 넘어도 화면 구석에 번짐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화면을 키우려면 유리두께도 같이 늘려야 하기 때문에 무거워진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금은 단종이 된 상태다. 엘지의 경우 2010년 생산을 중단했다.


그럼에도 브라운 티브이 애호가들이 아직도 있는데 나도 그 중 한명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으뜸은 색감이다. 흔히 에이치디 색상이 더 좋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자연색에 가깝다는 뜻이지 실제 눈에 보이는 색과는 다르다. 세트장이나 실내 촬영 화면을 보면 에이치디는 매우 부자연스럽다. 음향도 마찬가지다. 에이치디는 자체 증폭기가 내장되어 있지 않아 소리가 속된 말로 먹힌다. 반면 브라운관은 스피커가 있어 화면과의 분리현상 없이 편안하게 들린다. 우퍼나 사운드 바니 하는 것은 사실은 소리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꼼수다.


문제는 브라운관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에이치디나 올레드에 비해서는 훨씬 길지만 세월은 감당할 수 없다. 과거 엘지 전자에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선전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브라운관의 수명을 알려준다. 이미 한번 교체하고 새로 산 평면 브라운관 티브이를 쓴 지도 이미 15년이 지났다. 규격이 달라지면서 위아래양쪽 화면이 조금씩 잘라져서 보이지만 디브이디, 셋탑, 오티티 등 모두 연결이 가능해 만족하면서 시청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화면에 흰 줄이 가끔 보이면서 임종이 가까웠음을 직감한다. 이제 더 이상 살 수도 없는데 걱정이 앞선다.


관련 기사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18&aid=000024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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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시켜야 한다


기본소득은 노동이나 재산유뮤와 상관없이 무조건 지급하는 돈을 말한다. 2017년 핀란드에서 최초로 도입되었지만 그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에 처음 등장하였다. 책제목처럼 정말 꿈같은 일이라고 여겨졌던 일이 현실이 되는 데는 500여 년이 넘게 걸렸다.


경기도 주민들은 재난기본소득을 받고 있다. 신용카드로도 가능한데 아무래도 노년층은 직접 받기를 원해 지급 첫날 혼란이 있었다. 코로나 19라는 비상상황이고 생계를 책임질 정도의 돈은 아니며 또한 사용처와 기간이 정해져 있어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첫걸음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급과잉사회에 살고 있다.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를 사려고 해도 너무 많은 선택지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떤 형태든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급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다. 곧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공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공짜 돈이라며 사회주의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대답 대신 지금까지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나라에서 왜 기본소득을 공급하지 않았는지가 더 의문 아니냐며 되묻겠다. 배급제와 기본소득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고 후자는 시장을 살리기 위한 방책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는 쌀이나 비누 같은 생필품을 나눠주는 반면 자본주의는 쿠폰이나 가상화폐를 지급하여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한다.


정부는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타성에 젖어 적자재정을 걱정하고 있지만 지금은 역기능보다 장점이 훨씬 더 크다. 국민의 70퍼센트 식으로 선을 그으면 그걸 가리기 위한 쓸데없는 행정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된다.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부자가 죄인도 아닌데 더 많은 세금을 내고도 받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잘사는 사람이 그깟 백만 원이 뭐가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 돈으로 기부를 하든 아니면 쓰지 않고 내버려두건 그건 정책결정자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의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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