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인 수고나 돈에 비해 이익이 더 커야


삶은 비숫해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상황들에 맞닥뜨리기 일쑤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암담할 때도 있다. 이럴 경우 필요한 게 원칙이다. 비용편익도 그 하나다. 말 그대로 들인 수고나 돈에 비해 이익이 더 커야만 한다. 곧 급한 마음에 당장 뭘해야할지 몰라 당황하기보다는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써서 비용 대비 편익분석을 해보시라. 서둘러서 잘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예를 들어보자. 현관문 도어 클로저가 고장 났다. 문을 잘못 닫았는지 한쪽이 기울어져 문이 온전히 열리지 않는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제품과 수리비용을 합쳐 약 20만 원 가량 든다고 한다. 큰돈이다. 이 집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군, 하며 한숨을 쉬어 봐야 소용이 없다. 일단 문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자. 원인을 알아야 해결도 가능한 법이니까. 급한 대로 내려앉으면서 마저 뽑히지 않는 나사못을 힘겹게 처리하고 임시로 테이프로 봉했다. 한두 번은 열리더니 도로 기울어지면서 똑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아무래도 수리를 해야 할 모양이다, 라고 체념을 하려다 관리실에 연락을 했다. 엘리베이터나 배관처럼 고용시설에 주로 쓰이지만 현관문도 해당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리비 중에는 아파트 장기수선 충당금이라는 게 있다. 이것저것 망가진 부분을 고치기 위해 입주민들이 내는 돈이다. 원래는 집주인이 내야 하지만 세입지가 들어올 경우 관리비에 포함되어 납부한다. 따라서 이사할 때는 반드시 환불받아야 한다. 살면서 집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수선충당금을 쓸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결국 관리실에서 사람이 왔다. 크게 수리해야 한다면 할 수 없지만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나사만 교체하고 지렛대에 해당되는 부분은 조이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만약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여 당장 몽땅 수리해야 한다고 서둘렀다면 큰 손해를 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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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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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를 거부해왔던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음을 인정하자. 자신을 진정으로 좋아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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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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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를 거부해왔던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


작가들은 이기적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김보라도 그랬다. 자신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영화를 만들어 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의 단편 <리코더 시험>을 보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폭파와 살해 장면이 있다고 해서 무서운 영화는 아니다. 다른 사람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 먼 기억 속에 각인된 부끄러운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게 된다. 


1994년. 누군가는 그 시대를 살았고 또 어떤 이는 이전에 사망했고 아니면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던 생명들이 있다. 분명한 건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나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건 내게는 지워진 시절이었다. 도무지 어떤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는데. 그리고 김일성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사정이 있었다. 나는 김보라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밝히기 어렵다. 


은희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용광로가 들끓고 있다. 오빠만 예뻐하는 부모. 살갑지만 늘 떠날까 두려운 남친. 희희덕거리면서 친하게 지내지만 절교를 경험하게 되는 친구. 느닷없는 동네 여자아이의 고백. 남모르게 흠모하는 학원 여선생. 그리고 귀에 난 혹과 수술 상처. 너무나도 사실적이기에 이건 본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든다. 굳이 이렇게까지 후벼 파는 이유는 뭘까? 가족과 화해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이 모든 의문은 인터뷰에서 풀린다. 그는 알았다. 부모는 자신을 바다로 던져버렸지만 구명조끼는 입혀줬다고.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보기를 거부해왔던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음을. 자신을 진정으로 좋아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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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지 말고 보여줘라 


봉준호는 자본주의 사회가 불편한 사람이다. 그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옥자도 예외가 아니다. 축산이 거대산업이 되자 더 많이 더 싸게 공급(?)하기 위해 갖은 방법이 동원된다. 유전자 조작도 서슴치 않는다.


옥자는 슈퍼돼지다. 미란도 회사의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미자는 옥자와 함께 자란 산골소녀다. 이 둘은 강제로 미국으로 건너가 슈퍼돼지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동물보호단체의 등장으로 이 계획은 엉망이 되고 결국 옥자는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심각한 주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잊지 않는 우리의 봉준호 아니겠는가? 게다가 액션신도 추가되어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한 가지 아쉽다면 큰 화면이 아닌 넷플릭스에서만 시청 가능하다는 사실. 아쉽다.


옥자의 씨지도 자연스럽지만 가장 칭찬하고 싶은 건 미자 역을 맡은 안서현이다. 어디서 이런 연기자가 튀어나왔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탄을 하게 된다. 마치 진짜 미자인 것처럼 종횡무진 활약을 한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든 고정된 이미지가 따라붙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들지만. 그 몫 또한 본인이 해결해야지.


덧붙이는 말


소 도축을 다룬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소 한 마리를 어떻게 정교하게 발라내지를 보여주었다. 그들 특유의 장인문화를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보는 내내 매우 불편했다. 물론 결국에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엄정하게 말하면 살해 아닌가? 문제는 적적성이다. 생태계란 어차피 먹고 먹히는 사슬이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봉준호는 이 지점에 침을 놓고 있다.


이 영화의 장점은 판단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림으로써 각자 알아서 생각하게 한다. 도축장 정경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가장 근사했던 장면은 쿠킹씬이다. 무슨 어벤져스 영화도 아니고 여하튼 의미심장했다. 출소한 제이를 마중 나온 케이. 케이는 제이에게 피우던 담배를 건네는데 제이는 그 담배를 구두에 비벼 끄고 다시 케이에게 권한다. 별 것 아닌 듯싶지만 동물애호가이자 환경주의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지구에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출소하자마자 버스에 올라 시위현장으로 가는 씬도 멋있었다. 도착을 앞두고 다들 복면을 쓴다. 이를 보고 놀란 할머니. 옆자리의 민머리는 슬그머니 검은 복면을 권한다. 그리곤 바로 영화가 끝난다. 이 두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전달한한다. 어떤 일이든 의식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아마 지금까지 본 영화중 가장 빼어난 쿠킹씬이 아닌가 싶다. 


일러스트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98850110740920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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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술 


전화를 걸고 받기를 두려워하는 현상을 폰포비아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른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병(?)을 앓고 있다. 특히 영업사원들이 심하게 어려움을 겪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서다. 그럴 만도 하다. 나도 그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있지만 끝까지 들어본 기억이 없다. 되도록 기분 상하지 않게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바빠서요 하고 끊지만.


스마트폰 등장은 폰포비아들에게는 축복이었다. 문자로 주고받기가 일상화되다보니 굳이 전화를 할 필요가 없어져서다. 그 결과 어느새 폰으로 통화하는 건 어색한 일이 되고 말았다. 오죽하면 전화통화료는 제로이겠는가? 일부에서는 우려한다. 인간미가 없다는 이유로.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매우 낯설다. 더우기 모르는 사람인 경우는. 게다가 새벽에 전화벨이 울린다면? 좋은 소식일리가 없다. 이처럼 전화는 알게 모르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좋은 소재로 활용되었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해야 하는 경우다. 오늘 내가 그랬다. 현관문 도어 클로저가 계속 말썽이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일단 관리실에 문의를 하기로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수리 혹은 교체가 가능한지 물어보면 된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당연한 권리임에도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혹시 몰라 단지 내 인테리어 가게도 2순위로 마련해두었다.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면 얼마의 돈이 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졌다. 게시판이 있어 문제를 설명하고 언제쯤 오실 수 있는지 확인만 해두면 얼마나 편할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분야가 많은데. 


조만간 폰포비아는 사어가 될지도 모른다. 전화 자체를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서 빨리 그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물론 그에 따른 문제가 또 발생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화걸기는 낯설고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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