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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같이 비개이고 만물이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하여 허공은 천성산의 가을 날 계곡물과 같고, 초록은 쪽빛보다 푸르르고, 바람은 농악한마당의 장구소리처럼 경쾌해지는 날, 격물하는 내 마음 속에도 그 온생명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 이 느낌, 이 마음을 글로 담아낼 순 없을까? 아니 글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것은 글이 되어버렸다. 글 아닌 글...연암 선생의 글도 이러하다. 300여년이 훌쩍 지나버린 세월 속에서도 글에 살아 있는 숨결은 마치 박지원 선생을 옆에 두고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글은 문심(文心)이어야 하고 심사(心似)여야 한다. 쓰여진 글 속에서 글쓴이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의 광경을 떨리는 가슴으로 맞이하는 것처럼 한 편의 글 속에서도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 떨리는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박제화되어버린 죽은 글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흔히 글의 고전을 이야기하고 글의 형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참된 글은 지금 이 순간 글쓴이의 마음이 열리는 체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다면 글이 아니다.
그래서 비슷한 것은 가짜다. 그것은 고전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글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정한 글은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다. 글의 형식이 잘 갖추어진 경우라도 읽어 아무런 감흥이 없는 글이 있는가 하면 형식없이 마구 쓰여진 무지랭이의 글이 마음을 온통 뒤흔드는 것이 있다. 우리는 후자를 참된 글이라 여기는데 주저함이 없다. 따라서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의 떨림을 가져오지 못하는 글은 참된 글이 아니다.
비단 글 뿐만이 아니다. 그림도 생활도 인생도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천둥과 번개가 없다면 그것은 그림도 아니고 생활도 아니며 인생도 될 수 없다. 몇 일 전 내가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그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했다면 나는 좋은 글을 읽은 것이다. 몇 일 전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면 나는 좋은 그림을 본 것이다. 오늘 비 개인 산빛과 풍경을 보고 마음 속의 떨림을 느꼈다면 나는 삶에 침투되는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늘 보는 하늘, 늘 지나는 길, 늘 대하는 사람, 늘 대하는 일상들....그래서 내가 똑같이 반복되는 또 하루의 오늘을 보내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오늘 살았는가 죽었는가. 오늘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에 나의 가슴이 떨리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에 내 마음도 흔들리는가? 저 푸른 하늘빛 물빛에 내 마음 투영되는가? 창을 넘어 들어오는 뒷산을 가득메운 초록빛 영혼들의 속삭임에 나는 간지럼타고 있는가? 내 앞에 놓여진 이 책 한 권 오늘 나를 새롭게 하는가? 이 모든 것 언제나 새로운가?
내 마음 속에서 뒤바뀌는 세상, 내 마음으로 모아지는 세상, 내 마음 한 점에 다 담아지는 세상이...나에게 묻게 한다. 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