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름다운 우리 문장 43
장하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무상(無常)

/이은상


   ‘아니디아!’ 어허 천지가 무상하구나. 과연 무상인고.

   아침 새 창 머리에 와서 노래하는가 하면 석양이 마당에 비껴 저녁 그늘을 누이니 이것이 무상인가.

   뜰 앞에 심은 복숭아 나뭇가지에 향기로운 꽃송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그 나무 아래 어지러이 날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무상인가.

   견우와 직녀 같이 웃으며 손목 잡고 사랑하다가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같이 등지고 헤어져선 원수가 되고, 어느 때는 한자리에 같이 앉지도 아니하다가 다시 보면 어깨 겯고 같이 웃는 시시변전(時時變轉)의 인정 그것이 무상인가.

   저 이릉(李陵)이 하량에서 소무(蘇武)와 이별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일러 아침 이슬이라 하였던 말이 오늘은 뉘게나 상식같이 되었지마는 보라 어찌 인생뿐이랴. “나고 죽는 온갖 것 속에 자연만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하고 소동파는 외쳤지마는 슬프다 그 사람 자연도 무상한 줄 몰랐었구나.

   산도 헐어지고 물길도 돋아나고 고목은 굽어 썩어지고 새솔 나 자라나고, 이라형 왕국도 변하고 역사도 바뀌고 천지도 옮기나니 이것이 무상인가.

   그렇다. 염염찰나(念念刹那)에 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우주가 통히 그대로 무상밖에 다시 또 무엇이랴.

   ‘아니디아!’ 자정이 넘어 깊은 밤. 소리도 없이 오시는 눈이 어깨랑 가슴 위에 내려 쌓이는 밤. 구트나 슬픈 기억을 한 아름 안고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찾아 돌아왔다.

   희미한 등불아래 앉았으나 멀고 멀다! 아득한 마음을 감아 거둘 길 없다.

(ref. 아니디아 : 범어로 Anity. 무상이라는 뜻.)


   .....................

 

 

 

 

   아우야. 이 밤이 지새도록 어디 가 놀며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새벽바람이 차구나. 네 병이 더치리니 어서 왜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빈방이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너라. 지금 이 아름다운 달빛이 너를 찾아왔구나. 돌아오너라.


   .....................


   달이 기운다. 산 넘어 달이 기우네. 너무도 적막하여 미칠 것만 같구나.

   저 지공(指空)이 입멸(入滅)했을 때 나옹선사 생사에 대한 자기의 소견을 말한 그 노래,


   나는 것이란 맑은 바람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맑은 못에 달이 잠기듯

   고요히 서산을 넘어 꺼져 가는 달빛


   이제 내 앞에 ‘만사가 다 그만이라’는 큰 교훈을 내리고 있다.

   한 자, 반 자, 한 치, 반 치, 낮추낮추 꺼져 가는 저 서산의 달은 참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광경이다. 가버린 내 아우는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것같이, 지금 깜박하고 꺼져버린 저 달도 영원히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


   슬프다. 이 영원한 고난을 헤어날 길이 어디메 있나. 내 가슴은 창검으로 찔리고 벤 것 같구나. 능엄경에 저 세존이 친히 아난(阿難)을 불러 이르되 “네 마음이 본시는 묘하고 밝고 깨끗했으나, 스스로 미혹하여 본시를 잃고 윤회를 받아, 생사 중으로 늘 뜨락 잠기락한다” 하였다.

   그러나 여기 무슨 방법으로 이 고난의 경지를 벗어나 밝고 맑은 본심을 도로 찾을지 나는 둔하여 알지 못한다.

   이 인생을 구원할 길이 어디 있는고. 캄캄한 내 눈 앞을 쓸어줄 사람이 없는가. 삼라만상이 고요할 뿐! 다만 적막이 천지에 찼을 뿐이다.

<이은상作, ‘無常’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장하늘著, 다산초당刊 中>



   “배재고보 5학년이던 노산의 아우(正相)가 졸업을 앞두고 20살의 젊음으로 꺾였다. 동경 가서 고학하는 친구와 ‘독립’을 논하던 편지가 발각되어 용산경찰서에 구속, 석 달이나 당한 고초 끝에 병을 얻어 입원했는데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다.

   운명하며 남긴 돈 7원 3전! 모교의 장학금으로 써달라는 유언대로 ‘정상장학회’를 세우고, 많은 기부금과 함께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수필집 ‘무상’의 인세 역시 모두 장학회에 바쳐졌다.”

/장하늘 後記


얼마 전 김성우의 수필집 ‘돌아가는 배’ 中, ‘동백꽃 필 무렵’을 옮겼다.

이은상의 수필 ‘無常’의 일부를 옮긴다.

동생의 죽음에 극도의 슬픔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의 심정이다.

20세기 한국의 名文 중, 수필 부문에 속하는 글들이다.


閑士

                                                                                                                                 H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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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공부 - 청화스님 말씀
청화스님 지음 / 시공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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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청화스님은 이 길을 가장 행복한 공부라 했을까? 스님의 앞에 놓인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빛에 마음이 머문다. 그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보살님들이 스님에게 건네는 인사에 스님도 고개숙여 합장한다. 그들이 나누는 것은 무엇일까? 스님을 눈 앞에 두고 나도 합장하여 인사를 해본다. 내 안에 있는 부처님하는 그 마음에 대고 절한다. 그렇다. 산사에서 선승들과 주고받는 인사는 자신의 안에 내재한 불성을 향해 절하는 것이다. 그 공경심 그 환희심 그 자비심 그 지혜심에 대고 우리는 고개를 숙인다.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삶의 스승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이 가야 할 인간의 길을 안내해주시는 분들이다. 바른 법을 일러주고 그 바른 법에 닿기 위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엄하게 알려주시는 분이다. 마음은 무상대도의 반야의 지혜에 두고 몸도 마음도 일상도 한 점 한 점 그 마음을 세워가면 된다고 한다. 조급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게을러져서도 안되며 그저 이런 저런 마음없이 중용의 도에서 마음을 맞추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있나 없나를 점검해가며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공부를 강조한다.

  오온이 개공하다는데 이렇게 멀쩡히 느껴지는 오온이 왜 개공하다고 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는데 왜 색즉공이고 공즉색일까? 여기서는 사량분별을 세워서는 안된다. 말로써 설명을 붙여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즉'이 바로 그런 말이다. 색 그 자체로 공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까지는 모른다는 의문을 화두처럼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화두란 말 그대로 말의 머리이다. 즉 말이 떨어지기 전(온갖 설명과 언어의 해석이 이루어지기 전의)의 뜻이 떨어지는 곳을 단박에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아는 것이란 말이다.

  늦은 시각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읽어보았다. 아직까지 금강경이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 한권 보고서 여태 준비가 안되어서 들지 못했던 책이다. "약견 제상 비상 즉견여래" 마찬가지다. 제상 즉 비상이다. 하지만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대자비불성으로 가득하다고 하셨다. 부처님이 말하고 모든 조사가 다 말했으니 거짓말이 아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바른 의문은 바른 신심이 갖추어져야 하고 바른 신심이란 바른 행동가짐이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일상은 온갖 오온에 빠져 외부로 치닫는 감각에 허우적대다가 참선한답시고 저녁에 자리에 앉아 명상하는 척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해결하는 문제에 어찌 설렁 설렁 자기의 욕심을 채워가면서 이룰 수 있겠는가? 뭔가 삶에서 허전하고 무상한 것은 있는데 그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청화스님은 지면의 후반부를 할당하고 계신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부터 바로 알고 바로 보면 세상에서 진리를 향해 가는 이 길이 가장 행복한 공부이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세상을 위하고 향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문제삼는다. 사회운동도 종교개혁운동도....하지만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아가 오히려 해만 끼치는 경우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산문을 나가지 않고도 많은 정치지도자와 속세인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성철 스님, 청화 스님, 서암 스님 등 무수한 선지식들의 말씀도 한 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바른 의문과 화두는 들려고 해서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란 말을 알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알라딘 지인들의 마음도 큰 도움과 위로가 된다. 무엇이든 진실한 공부는 자신의 내면을 밝히는 공부라는 말씀을 지도삼아 외부에서 오는 조언도 글도 모두 마음으로 모으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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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2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작년인가 이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청화스님의 형형하신 눈빛만 기억에 남네요.
이 공부가,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빙긋이 웃는 공부가 가장 행복한 공부임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더 어둠을 깨쳐야할는지 어리석어 도저히 모르겠습니다.ㅠㅠ
가다 보면... 어느 산등성이 위에 오를 때쯤이면, 갈 길은 멀어도 지나온 길을 빙긋이 웃으며 되돌아볼 수 있겠지요. 운이 좋으면 즉각,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요...
길은 끝이 없습니다.

달팽이 2007-01-21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글샘님.
하지만 이 길이 늦다 조급할 것 없지요.
이미 우리 삶의 목표가 선 것만으로도 더이상 흔들리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가는 여정 여정 그 자체가 삶의 의미이고 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데서 오는 기쁨도 없지 않잖아요.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이 몸이 걸어가야 하는 길에 핀 들꽃, 산꽃 모두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짱꿀라 2007-01-2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삶 자체가 욕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느가 싶습니다. 욕심의 마음을 비우면 그 자체가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는데......가장 행복한 공부도 또한 마음에 가득한 욕심들을 하나씩 버리므로 얻어지는 기쁨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비로그인 2007-01-2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삶의 무상함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답니다.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있다가 없는 것.."
슬프고 짠하고.. 마음이 어린 모양입니다.


달팽이 2007-01-22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동감입니다.
마음을 비워내는 것..
한사님, 그렇습니다. 삶이 무상하다고 하여서 슬픈 것에 슬픈 것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 테지요. 글을 읽어도 글쓴이의 마음이 담고있는 희노애락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삶의 무상함을 제대로 안다면
자아의 집착에 오염되지 않는 그 마음을 오히려 더욱 짠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사님께선 이미 알고 계실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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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소리
서암스님 시자 지음 / 시월(十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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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랫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책 한 권을 만났다. 그것도 서재지인의 리뷰를 훑어보다가..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우선 내 주변을 먼저 정돈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느슨했던 마음에 긴장감이 좀 생긴 탓일까? 아침부터 빨래에 청소에 설겆이에 일반쓰레기 재활용 음식물쓰레기 분리해서 비우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진다. 자리에 앉으니 마음 속에 잡다했던 티끌이 좀 쓸려내려간 기분이다. 마지막부분인 소참법문을 읽고서 자리에 앉았다.

  서암스님의 삶 역시 이 세상에 왔다가 우리에게 부처님의 빛을 보여주고 간 선지식들과 같이 온통 빛의 사람이다. 그 흔적 하나 하나에서도 자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함께 불교 정화운동에 참여했던 성철 스님이나 청화 스님은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지만 서암스님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서암 스님은 일체의 형식과 드러냄조차 거부하며 말없이 소리없이 부처님의 세계에 머물다 간 선지식이셨다. 이누아님의 말대로 서암스님을 모시고 이 책을 집필한 스님도 역시 그를 닮았는지 아무런 자기 소개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큰스님의 흔적 없는 그 흔적을 그대로 일반대중에게 보이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암 스님의 제자인 그 분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스님의 검소하고도 철저한 수행생활을 보면서 그리고 생활하시는 모든 것 하나도 버릴 것 없이 공부의 기회로 삼는 것을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헤진 옷을 기워입고 또 기워 입고, 나이 드셔서 몸이 불편해도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그 마음을 다 물리치시고 엄격하게 자신을 바로 세우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몇 일째 잠과 싸우면서 용맹정진하는 제자의 방에 들러 이불을 직접 펴주시며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저 그의 마음을 경외감으로 쫓을 수 있을 뿐이다.

일하는 자세에 대한 스님의 일화가 있다.

한여름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났다.

시자가 땡볕에서 몇 시간 동안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았다.

스님께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다가 말씀하셨다.

"중은 일을 수행삼아 조금씩 하는 거다.

한꺼번에 일처럼 해서야 되겠느냐?"

침류교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봉암사에는 '침류교( 枕流僑 )라는 다리가 있다.

하루는 시자가 스님을 모시고 이 다리를 건너다가 여쭈었다.

"스님, 침류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흐르는 물을 베고 있다는 뜻이다.

그 뜻을 알아야 한다. 너는 알겠느냐?"

"........."

평생 잊지 않고 교훈으로 삼을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에

"중은 걸사다. 무소유로 살아라. 어디 가서 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기라도

달갑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송장이다. 화두가 생명이니 이를 놓치지 말라"

 

  북방불교에서도 우리 나라의 불교는 주로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화두는 그저 들려고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스님의 말씀을 실감한다. 그럴 때는 조급해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좋은 일을 하면서 대신심과 대분심 그리고 대의심을 키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어리석고 어리석은 중생 아닌가? 뭐 이 생에서 부처님법 만난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뭐 욕심만 앞세워서 될 일 있겠나 싶다. 하루 하루 나태한 일들을 줄이고 몸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매 인연 인연 좋은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가 시작해야 할 공부길이다. 이렇게 또 인연이 되어 책 한 권으로 마음을 세우니 이 세운 마음 좀 더 길게 공부이어가서 부처님 법에 닿기를 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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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은 걸사다..
대흥사 스님들께도 들려주고 싶은 말씀입니다.
큰절은 큰부자입니다.

흐르는 물을 베고 눕다. 이쁜 표현입니다. 달팽이님


달팽이 2007-01-1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절도 너무 상업성을 띄는 것에 대해 저도 동감합니다.
흐르는 물을 베고 눕다는 표현 속에 담긴 뜻에 인생을 겁니다.

이누아 2007-01-1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아닌 것도 일로 만들어 몸살이 나 선방에 못 가고 집에 있는 제게, 일하는 자세에 대한 글이 큰 도움이 됩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만 하고나면 일이 되어 분주해지는 좋지 않은 습관을 좀 놓아버려야 겠습니다. 잘해야지 하는 욕심이 모든 것을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화두는 들려고 해서 들리는 게 아닙니다. 화두는 욕심으로, 일로 들려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욕심으로 들면 상기병이 생기고, 일로 들면 수마와 망상이 생깁니다. 그런데도 무슨 책을 읽어도, 무엇을 배워도 화두를 놓치 말라는 가르침으로 들립니다. 들려고 해서 들려지지 않지만 놓치지는 마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달팽이님, 평온.

달팽이 2007-01-1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덕분에 좋은 책 보았습니다.
화두에 대한 조언도 달갑게 받습니다. _()_

글샘 2007-01-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청소하고 설거지 해야 됩니다. ㅠ.,ㅠ
근데, 왜 이렇게 하지 싫죠? 음냐음냐... 좀 누워 자고 싶어라...

달팽이 2007-01-1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는 하도 게을러서 보다 못해 하루 한 것을 가지고 요란을 떱니다.
아마 글샘님은 저보다 훨씬 많이 하실 것으로 압니다.

짱꿀라 2007-01-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암스님의 수행생활이 내 마음에 평온을 찾아주는 듯 하네요.

달팽이 2007-01-19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책으로 맺은 인연이..
서재를 둘러보았습니다.
한시감상이 재밌더군요..
즐찾 추가합니다.
앞으로 좋은 만남 기대합니다.

짱꿀라 2007-01-1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미 여우님을 통해서 자주 들리곤 했답니다. 댓글을 안남겨서 그동안 너무 죄송했는데..... 계속 좋은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하네요.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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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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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밭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모래밭 속에서 특별한 모래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바로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미래의 어느 시점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행복하기를 꿈꾼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많은 부분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투자한다. 그리고 마음쓴다. 하지만 부모의 속을 가장 썩이는 것은 바로 그 자식이듯이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가차없이 배신해버린다. 우리의 자아는 분열한다. 왜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세상엔 신기한 일이 참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태국의 앙코르와트, 만리장성, 우리 나라의 석굴암 등 과학기술수준이 그 정점에 와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제작기술이 이해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하지만 더욱 신비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두 귀 사이에 놓인 3.5파운드 나가는 작은 물건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감각을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는 것을 알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경이로워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먼 미래를 상상하고 행복을 꿈꾸고 온갖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고 또 거기에 몸이 적응하기 전에 우선 마음을 맞추어가는 미해명신비상자를 누구나가 가지고 있고 그것도 자신의 일부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7월, 이탈리아 몬자 시의회에서는 '둥그런' 금붕어 어항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이례적인 조항을 발표하였다. 금붕어는 직사각형 모양의 어항에서 길러야지 둥근 어항에서 기르면 안 된다는 것이 의원들의 논리였다. 그 이유는 "둥근 어항에서는 시야가 왜곡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금붕어에게 맛없는 먹이를 준다거나 시끄러운 펌프 소리를 듣게 한다거나 시시한 플라스틱 성을 어항에 장식으로 넣어주는 것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들의 핵심은 둥근 어항은 그 속에 사는 금붕어들의 시각 경험을 변형시켜 금붕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처지도 다를 바 없다. 인간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에 자신의 처지에 자신의 왜곡된 생각에 의해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던가? 그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과학적으로 해명해주는 공간이 앞서 얘기한 두 귀 사이의 조그만 뭉텅이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 녀석이 만물의 영장류인 인간을 한낱 금붕어의 위치로 전락시키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두 이마가 붙어서 난 로리 셰플과 레바 셰플은 태어날 때부터 매순간을 서로 붙은 채로 마주보며 살아왔다. 그들은 혈액과 두개골과 뇌의 일부조직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느끼는 어떤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채며 한 사람의 몸의 이상기운을 서로가 공유한다. 이 두 사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빨리 분리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분리되지 않고서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로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로리 셰플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나아가 이 둘은 각자의 삶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둘은 둘을 분리시키는 수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요. 온 세상의 돈을 다 준다고 해도 싫어요! 그런 수술을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망쳐 놓을 거예요."

  아마 우리들의 상당수는 그들이 분리수술을 해야 진정한 개체로서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갖고 있다. 우선 행복은 서로 비교 가능하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그들의 행복수준은 우리들의 행복 수준보다 낮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경험과 마음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마치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말미잘의 행복과 느티나무의 행복을 서로 단순비교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우리의 기억행위는  두가지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제로 저장되지 않았던 부분을 스스로 채워넣거나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채우고 빠뜨리는 과정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 기억은 항상 완전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되는데 이것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뇌는 한번도 과거에 있었던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못하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갈무리해내고 다음 시점에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당시의 감정과 지식과 환경을 다시 재조합해서 새로운 기억을 창조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를 사기꾼 마법사라고 부른다.

  이러한 '현재주의'(과거를 기억할 때 그것은 현재적 요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는 미래를 상상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는데 우리는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의 마트 쇼핑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배부를 때에는 쇼핑카트에 꼭 필요한 것 몇가지만 담아서 오게 되는 데 반해 배고플 때의 쇼핑은 의도하지 않았던 많은 음식들을 사게 되어서 냉장고 구석에 쳐박혀 썩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을 때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과 상상이 불완전한 것은 경험 그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공백을 무의식 중에 뇌의 활동이 채우기도 하고 우리의 미세한 마음이 채우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함은 우리가 이름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지는 마음의 상이요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건을 대하고 그 사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것이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양 받아들이게 된다. "너 오늘 그 여자 이유도 없이 화를 많이 내는 것 봤지, 아마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두 당사자에게는 그녀의 이유없는 투정이 주어진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투영된 상일 뿐이고 그 사실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몇일째 자신을 괴롭히는 변비때문에 고통스러울런지도 모른다.)그러니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한 사건을 놓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의 사람들이 모두 달리 해석하고 그래서 백의 천의 사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친철하게도 이러한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와의 불일치를 해결하고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마지막장에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 내가 미래의 나의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답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간단하고도 손쉬운 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것은 다음의 세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스스로를 아는 방법이 특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적인 생각과 감정을 직접 보지만 타인에게서는 오직 그들이 겉으로 하는 말과 행동만 볼 뿐이며, 이것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만 관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자신을 아는 방식이 타인을 아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타인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둘째는 우리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보려는 동기를 지닌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같은 존재이고 싶어하지 않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는 꼭 우리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개개인의 독특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 지니는 다양성과 독특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우리가 타인을 우리 경험의 대리인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눈과 뇌는 서로 합작하여 우리들의 인식을 방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가슴의 느낌으로 우리들이 가진 생각과 자아를 털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행복은 상대적으로 불행을 만들어낸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 행,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지만 인류의 스승들은 그런 행, 불행을 만들지 말라고 하나같이 충고했다. 세상은 선, 악도 없고 시비도 없다고 했다. 그저 하루 하루 지금 이 순간은 최고의 시간이요 모두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기 까지는 우리 두 귀 사이에 놓인 신비상자와 그것을 푸는 마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마음의 공간을 탐험하고서야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눈과 뇌의 음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제서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의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P.S : 대니얼 길버트의 글쓰기가 부럽다. 어찌 이렇게 재미있게 그리고 적절한 사례와 이야기 구성을 전개할 수 있을까?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수작을 놓치지 않고 한번 읽어보았으면 한다. 비록 내 능력으로 따라가지 못해도 읽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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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1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책을 꼭 읽고 싶네요.

비로그인 2007-01-1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뇌의 직관적 통찰력과 논리적 분석능력은 서로 상보적입니다.
정확한 기억과 합리적 사고를 제약하는 본능적 차원의 심리적 장애물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요.
과학을 공부하다보면 그런 심리적 장애물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고
체득화된 과학적이며 합리적 사고의 습관이 실제와 인식의 불일치를
어느 한도까지는 보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파란여우 2007-01-1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의 '마음탐험'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어요.
근데 어항 속에서 달팽이가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우는 밤이 좋을까요? 낮이 좋을까요?
한가한 선비님은 왜 글을 더 많이 쓰지 않으시는 걸까요?
-가끔은 씰데없는 궁금증때문에 털이 가려운 파란여우-

쳇, 리뷰 너무 잘 썼잖아요

달팽이 2007-01-1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부산모임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제가 형님 대접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ㅎㅎ
한사님,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과학과 합리적 사고가 해야 할 몫이 존재한다는 말씀...
여우님, 요즘 한 편씩 읽는 도덕경 맛을 음미하는 중이에요...
물론 잘 하진 못하지만,,,
그러는 여우님이야말로 리뷰를 많이 쓰시지는 않잖아요..
한가함이라고 하면 한 한가 하시는 여우님이...ㅎㅎ

2007-01-18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1-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아쉽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님과 이누아님의 리뷰를 보고 어렵게 구한 책입니다.
서암스님과 같이 이 땅에 살다간 많은 그리고 겸손하기가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선지식들이 있어 우리 어둔이의 밤길에 등불이 되어주어서...
너무 고맙습니다.
더불어 님께도...
늘 고맙습니다. _()_

yeshot21 2009-09-1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러 번 이 책을 읽었지만 서평을 참 잘 쓰셨네요. 내가 읽은 책이 그렇게 좋은 책이었던가,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라는 사람이 생각나는군요. 님의 서평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고 싶네요.

달팽이 2009-09-1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러번 읽으셨군요. 할 말이 많을 터인데 짧은 글 속에 마음을 담아내었군요. 좋게 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그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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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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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남기는 것이 있다. 하나는 뒤에 남기는 것으로서 인과관계에 의한 역사의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속에 남기는 것으로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기는 정신과 뜻이요. 그 사회와 세상에 남기는 인류 존재의 고갱이다. 아무리 과거의 사실을 해명하는 보존이 잘 된 사료와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뒤에 남긴 것으로 추측하는 인과관계의 찌꺼기일 뿐이다. 진정한 역사는 인간 존재의 깊은 의미를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묻게 될 때 역사란 주어진 사료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정신적 속알을 헤아리는 것이 되고 우리 사회와 세계에 주어진 절대자의 뜻을 읽는 것이 된다.

  함석헌 선생님의 전기에서 다석 선생님의 역사 강의는 무척이나 인상 깊고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바로 역사를 듣는 이의 가슴 속에 민족적인 기상과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이며 우리 고난의 역사에서 수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아프고 한스러운 우리 역사에서 가슴에 사무치도록 가야할 방향을 일러주는 역사 수업이야말로 참된 역사 수업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바로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세우는 역사이자 우리 마음과 정신을 더 높게 하고 더 넓게 펼치는 역사를 말한다. 여기 선생님의 말을 조금 인용해보기로 한다.

  빈 소리 하지 말고 공상하지 마라. 우리가 받은 유일한 역사적 유산은 이것뿐이다. 못생겼지만 이것뿐인 우리 마음, 우리 정신, 닦으면 얼마든지 닦이고, 키우기만 하면 곧 크는 마음, 그 대신 없다 하면 아무것도 없다. 5천 년인지 6천 년인지 모르고, 세계 몇 나라, 몇 문명인지 모르나, 그것이 흐르다 흐르다 그 결과 이 가엾은 늙은 갈보같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이것이다. 사실 어느 나라 무슨 문화도 복잡한 듯하지만 들추고 보면 수북한 껍질뿐이요, 마지막에 정말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유하는 정신, 이렇게 하느라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 예측에 벗어나게 하셨다.

  5천년의 역사동안 한 번도 우리의 기상을 한껏 펼쳐보지 못하고 수많은 침입과 억압 속에 무수한 좌절과 고통만이 수많은 지층으로 쌓이고 쌓여서 하늘까지 닿은 민족, 바로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그는 승화시켜낸다. 세계사의 하수구인 우리 역사가 있기에 침입자들이 즐거움의 궁전에서 놀 수 있게 되고, 이 하수구가 있기에 그들의 편한 생활 가운데 나오는 보기 싫은 것들을 모두 받아주고 처리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드르의 살찐 육체와 어긋난 욕망의 문명을 뒷받침해주고 양분을 제공해주는 것도 또한 이 하수구가 아닌가 하고 선생님은 말한다.

  '뜻'은 곧 씨알인 민중을 뜻한다.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억압 속에서도 면면히 그 생존을 지켜나가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그들이야말로 우리 고난의 십자가를 두 어깨에 묵묵히 지고 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제 36년의 통치기간에도 우리 조국의 국권이 사라졌음에도 다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정신을 가지고 조국의 언어를 사용하며 조국의 뜻을 이어갔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일제에 빌붙어 자신의 영달을 꿈꾸었던, 조국의 정신을 버렸던 자들이 아니다.

  '뜻'은 곧 민족 정신의 바탕을 뜻한다.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위험과 격랑의 파도에 휩쓸릴 때에도 그 마음 속에는 항상 외부자를 수용하는 마음을 품었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품으려 했던 우리들의 인과 겸손함을 뜻한다. 한번도 먼저 타국을 침입하여 그들을 노예상태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던 순박했던 하지만 마음만은 웅혼했던 민족정신의 고갱이를 말한다. 비록 역사적으로 한번도 변변히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지만 그렇기에 우리들의 마음의 이상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민족 정신의 노스탤지어다.

  '뜻'은 곧 인간 존재의 바탈이자 인간 의식의 궁극적 존재인 절대자의 의지이다. 따라서 우주 본체이며 그것의 움직임의 정해진 방향이다. 모든 고난의 역사는 그것이 주는 교훈이 있다. "간디의 말과 같이 수난은 결코 약한 자의 일이 아니요, 강한 자의 일이다. 자기 안에 보다 더 위대한 힘을 믿는 것이 수난의 도다. 우리 싸움은 불행을 남에게 떠밀자는 싸움이 아니라, 죄악의 결과인 고난을 내 몸에 달게 받음으로써 세계의 생명을 살리자는 일이다. 우리 양심에 준비가 부족할 때까지는 우리는 스스로 약함을 염려하여 겁낼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치고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불붙을 때 현대의 무력 국가들은 결국 한낱 골리앗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생님이 말한 바와 같이 고난의 역사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속에서 절대자를 찾게 만든다. 그것이 고난이 가진 의미자 교훈이다.

  역사 서술을 이런 뜻으로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각성의 눈으로 들여다 본 세상은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비록 근 현대사 부분에 와서 동학의 의미라든지(무위당 선생님이 다시 재조명하셨다.) 해방과 남북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해석이 나름대로 수긍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역사를 이렇듯 큰 맥락에서 한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왜 모 신문사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도서 100선에 선정되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곤붕의 이야기 중에 큰 새가 되어 한반도의 역사의 상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역사의 시작과 끝을 한 눈에 쳐다보고 있는 시원하고 웅혼한 느낌을 주었다. 더불어 분노해야 할 곳에서는 가슴을 치게 하고 슬픈 곳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그 분노와 슬픔 속에 담겨진 깊은 뜻에는 말없이 수긍하게 하는 정신적 깊이를 가진 서술에 우리 나라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책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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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6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화두를 던져두고 가시다니요. 놀랍습니다.^^
이 책, 제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뜻, 민중이자 민족정신, 우주본체의 자유하는 정신 쯤으로 정리되군요.

달팽이 2007-01-2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나누다보면
주변분들의 마음의 파장이 글을 통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 마음만으로도
나를 둘러보고 긴장하게 합니다.
그 마음의 파장에 맞추어 나도 함께 고양됩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이제 산으로 가려 합니다.

윤은혜 2007-10-1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한길사에 근무하고 있는 윤은혜라고 합니다. 한길사에서는 계간 북 매거진 in BOOKHOUSE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11월에 나올 가을 호에 '한길사의 책과 나'라는 주제가 특집기사가 들어가는데, 이 리뷰를 정리해서 게재해도 괜찮을까요? 달팽이님의 글이 실리게 되면 글이 실리 잡지와 소정의 기념품을 드립니다. 독자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기획이니 소중한 글을 실을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loorien@hangilsa.co.kr)로 연락 주시거나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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