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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 멈출 수 없는 페이지터너, 믿고 읽는 이정명!
오래 잊었던 열여덟 살의 여름이 떠올랐다.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변에서 죽은 사람을 본 그해 여름. 얕은 갈수기 물살에 하천의 바닥 자갈이 쓸리는 요란한 소리. 젖은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뺨에 달라붙은 수초와 이마에 맺힌 물방울.... 그 일은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과 달랐고 그 모든 일을 합쳐놓은 것과도 달랐다.
그는 이제 안다. 부끄럽고 부도덕한 과거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음을. 지금까지 미루어왔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 _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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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의 뭐에 관해 쓸 거지?"
"당신이 모르는 당신, 당신이 모르는 나에 관한 이야기.... 자서전이기도 하고 논픽션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아닌 얘기...." _224p.
쐐기 화가로서 최고의 경매가를 기록한 화가 한조, 그의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맞이한 마흔네 살의 아침 그의 인생에서 아내가 사라졌다. 언젠가 소설을 쓰겠다고 했던 아내가 그의 앞으로 남긴 소설의 일부분은 인생의 절정에 위치한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게 될지도 모르는 내용인데...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하워드 주택의 지수, 맬컴 주택의 수인 그리고 지수를 짝사랑하는 한조. 어느 밤 사라진 지수는 며칠이 지나 시체가 되어 돌아오고, 자살이 아닌 타살로 결론지어지며 가까운 이웃인 맬컴 주택의 세 남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수인은 형의 제안으로 둘이 함께 있었음을 입증하지만 과거 범죄 경력이 있던 아버지가 용의선상에 오르고 범행을 인정하며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그 이후, 그들 가정은 나름의 이유로 무너져버린다.
사이좋은 이웃이며 한 가족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들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했고,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은 시간이 흘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지수는 왜 사라졌고,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가? 자살은 아니었을까? 제일 유력해 보이는 용의자, 지수를 짝사랑했던 이의 우발적인 범죄일까? 새로운 화자가 등장할때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리하게 되지만... 한조의 현재 삶을 조명하며 지수, 한조, 해리, 수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퍼즐을 맞춰가듯 그들의 삶과 사건을 재구성하며 그 시간, 그 사건 현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화려한 하워드 주택과 볼품없는 맬컴 주택은 더할 바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웃이었지만 두 가족을 구분 짓는 은밀한 경계는 존재했다. 더없이 친밀한 이웃이라는 관계를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에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냉혹한 구조가 도사리고 있었다. 부자와 빈자, 윤택한 자와 누추한 자, 기회를 가진 자와 소외된 자,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로 환원되는 비정한 계급 체계. 한 가족처럼 매일 함께 어울려도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하워드 주택은 맬컴 주택 사람들이 꿈꿀 수는 있어도 가질 수 없는 대상, 바라보긴 해도 다가가지 못할 영역이었다. _35p.
미란은 세제를 푼 빨래통에 다림질까지 마친 수인의 바지를, 지워지지 않은 물감 자국이 남은 한조의 셔츠를, 남편의 오버롤을 담그고 꾹꾹 눌러 밟았다. 세탁기는 믿을 수 없었다. 옷감들을 비비고 주무르느라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그 순간 미란은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남편이나 두 아들 중 누군가가, 아니면 그들 모두가 지수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가능성.
그런데도 그녀는 그들을 다그칠 수 없었다. 그녀가 믿지 못한 건 가족이 아니라 세상이었다. _90p.
거짓 자백과 잘못된 판결이 진실을 뒤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하워드 주택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실을 외면했고 현실에서 도망쳤다. 그들은 딸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슬픈 얼굴 뒤에 숨거나 술과 우울에 빠졌다가 죽었다. 법적 절차가 종결되었으니 재수사나 재심은 불가능하고 진범을 밝혀도 의미가 없었다.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단죄는 이제 해리의 몫이 되었다. _290p.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공포에 그는 망연자실해진다. 하나씩 무너지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몰락은 한순간에 오는 것이다. _3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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