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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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협찬 #클락댄스

#앤타일러

콘크리트 바닥에 울리는 신발 굽 소리를 들으며 윌라는 이다음에 크면 보도가 깔린 곳에 살겠다고 다짐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면 진짜 도시 같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밤 창문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신발이 보도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는 상상을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이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도시의 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활발하고 매너 있고 품위 있고 피상적인 사람이라고 했지.

만약 윌라가 클락 댄스를 만든다면 세 소녀가 보여준 춤과는 다른 춤 일 거라고 생각했다. 윌라의 춤에는 한 여자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해 무대 오른쪽 끝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 눈에는 오로지 빠르게 도는 흐릿한 색깔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 '펑! 무대 끝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진다. _334p.

▶ 윌라 드레이크에게는 인생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던 학창 시절의 어느 날, 데릭의 청혼을 받고 고민하던 1977년, 젊은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1997년. 그리고 2017년 어느 날 낯선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꿀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감정 기복이 심해 자신의 감정대로 살아가는 엄마, 그로 인해 가정의 분위기는 엄마로 인해 좌지우지되었고 윌라와 동생 일라인은 불안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간은 흘러 대학에서 만난 첫사랑 데릭과 고향 집을 방문하는 길에 청혼을 받게 되지만 졸업을 하고 진로까지 정해진 데릭과 달리 자신은 3학년이고 이후 진학 일정까지 계획하고 있던 상태에서 받은 청혼에 멈칫하게 되지만, 공부는 결혼하고 계속해도 되지 않냐는 말에 자신이 계획한 미래를 데릭의 미래에 맞춰버린다. 그렇게 또 20년의 시간을 점프해 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사고로 데릭을 잃고 두 아들과 살아가게 된다. 데릭을 잃은 슬픔을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지만 아들들은 이미 커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듯했고, 시간이 흘러 피터와 재혼한 윌라는 안정적인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낯선 이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그녀의 생을 뒤흔들 결심을 하게 된다.

첫 째인 션과 잠깐 동거했던 드니즈가 총기 사고를 당했고, 그녀의 딸을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 도움을 부탁한다는 전화. 어찌 보면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미룰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가야 할 것 같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나선 피터까지 드니즈의 일상에서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 그녀의 딸 셰릴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션과 그녀의 여자친구 등... 그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심한 션과 이안에게 화가 났고, 자신만의 능력이 있었음에도 데릭, 피터에게 맞춰사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 같은 윌라가 안쓰럽고... 일라인은 왜 그리 서먹해진 건지 안타깝고..

윌라의 일대기는 큰 굴곡 없이 읽히지만, 페이지를 멈추기 쉽지 않은 가독성을 가진 소설이다. 보통의 일상을 매혹적인 문장으로 표현하며며, 소소한 현실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윌라의 생을 통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이다.

데릭은 브로건 박사님과의 연구를 포기하라는 제안이 윌라에게 얼마나 엄청난 요구인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언어의 발견은 그녀가 대학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중략) 그렇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데릭과 결혼하기 위해 모든 걸 다 던져버리는 모험을 감행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솔깃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의 자신의 의지로 익숙한 모든 걸 버리고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생판 남에게 자신을 얽매는 일은 매우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_73~74p.

"난 하루하루를 각각의 개별적인 순간들로 쪼개기 시작했단다. " 아빠가 말했다. "앞으로 더 이상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래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내가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했지.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첫 커피를 마실 때, 작업실에서 뭔가 근사한 걸 만들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야구 경기를 볼 때처럼 말이다."_108p.

때때로 윌라는 다른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며 반평생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반평생보다 더 많은 날을 그렇게 보낸 것 같았다. 처음엔 데릭이, 다음엔 피터가 앞만 보고 돌진하는 동안 윌라는 뒤에서 그들이 벌려 놓은 걸 치우고 사과하고 설명하며 세월을 보냈다. _225p.

#미래지향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추천 #추천소설 #book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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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 13일 동안 이어지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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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었어.

대부분의 책은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눈이 나빠져 더는 읽을 수가 없구나.

그럼에도 나는 책이 좋아, 책 얘기가 듣고 싶다.

자네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진귀한 책'에 대해 아는 자들을 찾아보게.

그들에게서 책 이야기를 듣고 와 나에게 들려주게."

<그 책은> 표지에 두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이다. 어느 왕국에서 만든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왕이 나이가 들어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두 남자를 성으로 불러들여 진귀한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와 자신에게 들려달라고 하며 여행경비를 지원해 준다. 1년 후, 여행에서 돌아온 두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그 책은'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13일 동안 이어지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요시타케 신스케와 마타요시 나오키가 함께 집필한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표지에 '유쾌하고 뭉뭉클한 52권의 특별한 책 여행'이라는 한 줄의 글을 보며 이 책에선 또 어떠한 책들을 만나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와우!! 진심 신선하고, 책에 대한 시야가 더욱 확장된 느낌이랄까? 이미 쓰여진 책일 수도, 세상엔 없는 책일 수도, 또는 잊히거나 쓰이지 못하고 있는 책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책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하는 시간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책의 결말까지지 피식!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정말 꾸러기 같은 작가님들의 유쾌한 책이야기! 책을 애정 하는 이들이라면 피해 갈 수 없을 책이라 감히 이야기하고 싶은 책! (아묻따 추천!)

그 책은

언젠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언젠가 나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 줄 것이며,

언젠가 나에게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언젠가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고,

언젠가 몸무게를 30킬로그램 빼게 해서

나를 근육질 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아직 안 읽었지만 언젠가 읽으려고 샀다.

그 책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언젠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_48~49p.

그 책은 너덜너덜했다.

(중략) 처음 읽었을 때 아이는 그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재미가 없다며 그냥 밀쳐 두었다. 하지만 사실 재미가 없었던 게 아니라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는 한참 후에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었고, 이런 내용이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책의 주인은 '언제 읽느냐'에 따라 책의 재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은 그 기쁨을 노리려고 몇 번이고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게 보였다. 모르는 사람들뿐인 낯선 장소에 갈 때면, 주인은 늘 그 책을 가져가 읽었다. 그러면 외롭지 않았다. 그 책이 자신을 지켜 주는 것 같았다. _60~61p.

#그책은 #요시타케신스케 #마타요시나오키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도서에세이 #에세이 #도서추천 #book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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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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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연수 #장류진

소설을 쓰게 된 후로 소설을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친구들은 "머릿속에 이런 게 다 있었던 거야?"간솔히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해 보려 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소설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장면이나 인물, 혹은 그들이 내뱉은 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떠오른다.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날까? 자꾸 생각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소 무모한 생각을 가지고 큰 틀을 잡고 쓰기 시작한다. 뭔가가 있긴 있겠지, 없지는 않겠지. 흐릿하고 두루뭉술한 마음으로 써나간다. 정말 신기하게도 다 쓰고 나면 매번,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가 모모여있고 덧대어져 있다. _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의 장류진의 신작 소설 <연수>는 2020년 젊은 작가 수상작인 '연수' 외에도 5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어려운 시험은 쉽게 잘도 붙지만, 운전면허는 어렵게 취득했고 자차를 운전하기까지의 마음가짐과 운전 연수를 마음먹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연수를 받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마음이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마냥 어찌나 두근거리고 실감 나던지.... 이때부터 다음 이야기를 넘기는 페이지는 멈추지 못하고 짧은 단편 드라마 한편씩을 보는 듯 생생하고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면서도, 때론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전작의 글들을 읽으며 장류진 작가의 다음 글도 기대하긴 했지만, 이 세 권의 책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론 '연수' '공모' '라이딩 크루' 재미있게 읽었다. 때론 혼자서 넘어서야 하는 지독한 홀로서기를, 혼자가 아닌 어딘가에 속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한 기분에 너무도 몰입했던 작품들. (재미는 덤!!)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빠른 전개와 생생한 문장에 빠져들어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될지도...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진심 딱! 권하고 싶은 책!

내가 비혼을 결심하게 된 건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혼의 삶을 들여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디테일을 하나도 모른 채로 누군가와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 생각만 하면 그지없이 아찔했다. _15p.

"주연씨 겁 많은 거 아니에요."

(중략) "겁 많은 사람이 어떻게 운전을 이렇게 해. 말이 안 돼."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겁이 많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액셀을 콱콱, 밟고 핸들을 그렇게 홱홱, 돌리느냔 말이야. 진짜 겁 많은 사람은 그렇게 못해요."

그녀가 틀렸다. 나는 겁나고 무서웠다. 그건 분명했다.

내가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있을까 봐 두려웠고, 꾸물거리다가 다른 차와 부딪힐까 봐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니 반사적인 동작이 빠르고 성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_26~27p.

절망적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처음 실물로 본 최도헌은 이렇게 생긴 애가 왜 모델이 아닌 목수를 하고 있나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명백하게 준수한 얼굴이었다. (중략) 무언가 크게 속았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고 인중과 입꼬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렸다. 오랜 시간 계획하고 공들여 쌓아온 나만의 견고한 성이 눈앞에서 흉하고 사납게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_187~188p.

#창비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추천 #한국소설 #단편소설 #소설추천 #추천도서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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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층의 하이쎈스
김멜라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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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없는층의하이쎈스

#김멜라

이 소설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누군가의 기억이자 이제는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 외갓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추석이면 옥상에 올라 남산에 뜬 보름달을 보고, 성탄절 밤이면 타워 옆으로 불꽃놀이와 폭죽이 터져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산 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소설에 이런 군말을 덧붙이는 것은 이 글이 제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많은 분의 삶에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_328p.

상가 건물에 숨어사는 할머니와 손녀. 손녀는 할머니 사귀자를 간첩으로 여기고 있고, 학교도 다니지 않으며 할머니를 동거인이라 부르며 도끼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할머니와 주변을 관찰하며 살아간다. 남산 아래 하숙집을 운영하던 할머니의 하숙집에서 반국가적인 활동을 하던 무리가 잡혔다며, 글씨는 잘 썼지만 글은 몰랐던 사귀자가 써주었던 대자보가 문제가 된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었던가? 정말 착하고 순했던 그 학생이 정말 간첩이었을까? 군사독재 시절, 그 잠깐의 스침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린 사귀자 할머니의 삶은 군사독재 시절의 시대상과 당시의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간다. 희귀병을 앓던 동생을 먼저 보낸 아세로라는 조금은 엉뚱하고 뜬금없다 생각했던 캐릭터였는데 두 사람 모두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때론 배짱 있게 나아가는 강단과 밝은 에너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는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대한 감동은 책장을 덮고도 한참을 지나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짧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은 글의 호흡이 짧다는 생각이 들 새도 없이 속도감 있고 그 상황들이 그려질 것만 같이 상상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소설로, 할머니와 손녀의 기묘하고 따스한 동거가 궁금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글이다.

동거인, 경비원, 가물치.... 노인은 어떻게 노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많은 질병과 사고와 위험들 속에서 가슴이 자몽색으로 물드는 나날을 지나 어떻게, 늙을 수 있었을까. _29p.

사귀자는 애 아빠가 하는 순영 학생 얘기를 듣고 나니 문간방에게 했던 욕이 다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엎드려 어금니의 위아래를 맞부딪쳤다. 마당에 둔 너럭바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남편이 그 돌을 누구의 넋자리 삼아 문질렀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 속이 다 헤아려졌다. 이 무섬증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나. 사귀자는 몸을 점점 더 옹송그렸다. 샛별이가 방에 들어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이불을 잡아당기는데도 속을 쥐어뜯는 통증에 끅끅 신음만 내뱉었다. _182~183p.

사귀자는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다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으면서 살아서 맛봐야 할 쓴맛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아득해 목이 멨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데도 그 목숨을 이어가는 게 왜 이리 힘에 부치나, 밖에서는 비보라가 몰아치는지 바람살에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왈당달강 시끄러웠다 넋 나간 얼굴로 그 빗소리를 듣고 있는데 남산 하숙이 이불을 내리며 빼꼼히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살어. 아등바등 살어. 그래야 내가 큰별이네한테 지은 죄도 것도 갚지. 같이 살아서 그 짓거리했던 짐승들이 어찌 망해가나 보자고."_212~213p.

"우린 없는 사람이고, 여긴 없는 층이야."

없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세로라는 그 없는 층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지낸 하이쎈스, 아세로라는 동거인 하이쎈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할머니가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할지 알 수 없지만, 하이쎈스와 자신 사이에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궁금하고 계속 아파한다는 것이 아세로라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만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고, 없다고 숨길 수도 없었다. _324~325p.

#창비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추천 #한국소설 #단편소설 #소설추천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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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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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연수 #장류진

소설을 쓰게 된 후로 소설을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친구들은 "머릿속에 이런 게 다 있었던 거야?"간솔히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해 보려 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소설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장면이나 인물, 혹은 그들이 내뱉은 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떠오른다.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날까? 자꾸 생각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소 무모한 생각을 가지고 큰 틀을 잡고 쓰기 시작한다. 뭔가가 있긴 있겠지, 없지는 않겠지. 흐릿하고 두루뭉술한 마음으로 써나간다. 정말 신기하게도 다 쓰고 나면 매번,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가 모모여있고 덧대어져 있다. _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의 장류진의 신작 소설 <연수>는 2020년 젊은 작가 수상작인 '연수' 외에도 5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어려운 시험은 쉽게 잘도 붙지만, 운전면허는 어렵게 취득했고 자차를 운전하기까지의 마음가짐과 운전 연수를 마음먹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연수를 받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마음이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마냥 어찌나 두근거리고 실감 나던지.... 이때부터 다음 이야기를 넘기는 페이지는 멈추지 못하고 짧은 단편 드라마 한편씩을 보는 듯 생생하고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면서도, 때론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전작의 글들을 읽으며 장류진 작가의 다음 글도 기대하긴 했지만, 이 세 권의 책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론 '연수' '공모' '라이딩 크루' 재미있게 읽었다. 때론 혼자서 넘어서야 하는 지독한 홀로서기를, 혼자가 아닌 어딘가에 속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한 기분에 너무도 몰입했던 작품들. (재미는 덤!!)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빠른 전개와 생생한 문장에 빠져들어 책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될지도...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진심 딱! 권하고 싶은 책!

내가 비혼을 결심하게 된 건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혼의 삶을 들여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디테일을 하나도 모른 채로 누군가와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 생각만 하면 그지없이 아찔했다. _15p.

"주연씨 겁 많은 거 아니에요."

(중략) "겁 많은 사람이 어떻게 운전을 이렇게 해. 말이 안 돼."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겁이 많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액셀을 콱콱, 밟고 핸들을 그렇게 홱홱, 돌리느냔 말이야. 진짜 겁 많은 사람은 그렇게 못해요."

그녀가 틀렸다. 나는 겁나고 무서웠다. 그건 분명했다.

내가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있을까 봐 두려웠고, 꾸물거리다가 다른 차와 부딪힐까 봐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니 반사적인 동작이 빠르고 성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_26~27p.

절망적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처음 실물로 본 최도헌은 이렇게 생긴 애가 왜 모델이 아닌 목수를 하고 있나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명백하게 준수한 얼굴이었다. (중략) 무언가 크게 속았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고 인중과 입꼬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렸다. 오랜 시간 계획하고 공들여 쌓아온 나만의 견고한 성이 눈앞에서 흉하고 사납게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_187~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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