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그림 - 우리는 모두 무너진 적 있다

우리는 무서운 그림을 왜 그릴까요.

그 원인으로 화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을 자주 거론하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매우 큰 요소이기도 할 겁니다.

저는 더 큰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성 본능(에로스)과 자기 파괴를 향한 죽음 본능(타나토스)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기질적으로 어두운 이미지를 더 좇는 사람도 있겠고, 상황이나 환경, 병으로 인해 타나토스 성질이 우성(優性)으로 표출될 수도 있겠죠.

아름다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만큼 어두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심리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이리언을 디자인한 Hans Rudolf Giger의 작품들에서 두 성질의 연결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Hans Rudolf Giger (Swiss. 1940-2014)

Alien Monster

 

 

 

무서운 그림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간의 예술 환경 요인도 따져 봐야 합니다. 감각보다 이성을 중시한 인류가 도덕적 잣대로 아름다움을 善으로 보려 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 안 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 같이 종교적 관념도 합세하죠. 공포를 이용한 회화와 전통이 꽤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는 서사가 아니었다면 기독교가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작동했을까요.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인 죽음을 거머쥔 힘이죠.

 

종교적 영향과 반대로 살펴볼 면도 있는데요. 예술은 늘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고 표현하려 했습니다. 현대 들어 더 강력해졌죠. 종교의 힘이 약화되고 인간과 개인의 지위와 표현의 자유가 커진 영향도 있을 겁니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죽음과 불멸은 인간이 관심을 거두지 못하는 영원한 주제입니다밝든 어둡든 아름답든 추하든 알 수 없는 이미지와 힘에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며 이 자체가 예술의 속성입니다. 

  

가치 판단의 문제도 있습니다. 실물 그대로를 추구하는 미메시스 사상이 우리 환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 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회화가 사실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좋다고 여겨왔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형태와 색이 뭉개진 인상파 그림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멸시를 당했나요. 존재하지 않는 무서운 재현을 시도하는 그림은 더욱 좋아할 수 없겠죠.

 

좋은 작품은 불쾌하거나 무서운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창작자도 수용하는 우리도 이 비밀스러운 그림들에 대해 극복하려 하고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수긍할 수 없더라도 무서운 그림의 존재 의미는 있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술가의 창조력을 극구 칭찬한 바 있다. 회화를 예찬하는 찬송가 『파라고네(Paragone)』가운데에서, 그는 화가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태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主)'라고 부른다. "만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할 만한 미인을 보고 싶다면, 그는 자기 힘으로 그들을 불러낼 수가 있으며, 만약 무섭거나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정말 동정할 만한 괴물들을 보고 싶다면, 그 자신이 그들의 주군이며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위 글에서 다 빈치는 화가의 창조력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미인을 그리는 것과 괴물을 그리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뭔가 얘기를 하다 마는 거 같은데, 이후 얘기는 공부를 더 해야 구체화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칠게요. :)

ㄱ님이 궁금해하는 회화와 심리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은 아마도  E. H.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아닐까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잊고 있던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Gheyn, Jacques (Jakob) de II (Dutch, approx. 1565-1629)

"Death and the Woman", 1600, pen

 

 

 

 

 

 

Artemisia Gentileschi(Italian, approx. 1593-1653)

"Judith Slaying Holofernes", 1612-21

 

 

 

 

 

Henry Fuseli (Swiss; practiced in England, 1741-1825)

"Nightmare (The Incubus)", 1781-82

 

 

 

 

 

 

Odilon Redon(French,1840-1916)

"Caliam" , 1881

 

 

 

 

 

 

Leon Spilliaert (Belgian, 1881-1946 )

"Autoportrait au miroir",1908

 

 

 

 

 

 

Zdzislaw Beksinski (Poland, 1929-2005)

 "Embrace"

 

 

 

 

David Lynch (네, 그 영화감독)

"Man Talking", 나무패널에 혼합재료, 68.58×78.74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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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5-30 07: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요즘같은 시대에 아름다움을 선으로 보는 관점과 선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관점 중, 어느 쪽이 더 많은(혹은 큰) 문제를 야기할까요??

AgalmA 2017-05-31 04:12   좋아요 5 | URL
˝예쁘면 다 돼˝라는 표현도 있듯이 일상에서는 아름다움과 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기준이 많이 붕괴되어서라고 볼 수도 있겠죠.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견이 나올 수 있고 상대적인 거다! 말하면 더 진척되기도 어렵죠.

아름다움보다 선이 좀더 골치아픈 개념 같은데요. 아름다움은 정적인 느낌이 강한데 선은 동적인 행위의 힘이 더 실린다고 생각합니다.

구제하려는 선한 행위가 의존성 낳는다 비난도 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에는 선을 아름답게 보지 않는 예라고 할 수 있겠죠.

요즘 팩트, 팩트 엄청 따지는데 같은 팩트로도 서로 다르게 보거나 서로 다른 팩트로 이게 진실이다 말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결국 케바케가 답이 되는 것 같다는...

흡족한 답은 못 드린 거 같지만 흥미로운 질문 주셔서 재밌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5-30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 덕분에 그림에 나타난 공포, 환영 또는 추(醜)의 이미지와 배경에 대해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네요. 저도 AgalmA님의 그림을 보다가 보니 어두운 이미지를 그리는 화가의 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화가는 어두운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을 외면으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이 외면으로 형상화시키면서 내적 안정을 느끼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제가 그림을 못그리는 관계로 추측만...ㅋ) 그렇다면, 화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느끼겠구나...(정말 그런가요?) 반면, 감상자는 결과만 보기에 어두움만 보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금 더 나가서, ‘음악/문학 감상‘은 작가와 감상자가 과정-결과를 공유하는 반면, ‘미술 감상‘은 결과만 보여지기에 감상이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ㅋ AgalmA님의 그림 덕분에 여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다만, 앞으로 무서운 그림은 납량 특집으로 부탁드립니다..ㅋㅋ 뉴스공장과 함께 즐거운 아침 보내세요.

AgalmA 2017-05-30 08:51   좋아요 3 | URL
이 글에는 안 올렸는데요. 괴기스러운 그림의 대가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 경우는 카타르시스적 창조보다 이념적 표출에 더 가깝기도 해요. ‘고통받는 인간은 고기다‘ 하면서 인간을 정육점 고기처럼 전시한 그림들이 상당히 많죠. 이 글 본문에서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인용한 내용에 더 가까울텐데, 일명 무서운 그림 제작자 상당수는 세계를 전복하는 창조자로서의 역할에 더 심취했던거 같아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경우만 해도 창조로 인한 갈등이 더 크죠. 카타르시스는 그린 뒤에 오는 것이지 선제 조건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니까요.
겨울호랑이님은 심성이 고우셔서 너무 좋은 쪽으로 보시는 거 아닌가요ㅎ 뭐, 제가 삐딱하게 보는 거랄 수도 있겠죠ㅎ;
그럼 전 이만 취침/
즐거운 하루 되세요^.^

cyrus 2017-05-30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빈치의 스케치북에 보면 여러 개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얼굴 그림이 있어요. 그렇다면 다빈치는 자신이 말한 대로 ‘신‘이 되었군요. ㅎㅎㅎ

기거의 그림을 보면서 달리가 창조한 이미지가 생각났어요. 달리는 인간의 신체 부위를 길게 늘어뜨려서 그렸거든요. 그 형체가 음경을 닮았어요. 달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대상을 에로스(달리의 연인 갈라)와 타나토스(형의 죽음)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요.

AgalmA 2017-05-31 03:53   좋아요 0 | URL
다빈치 스케치들 보면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 때 고심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죠ㅎ

달리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대상을 잘 잡아 내셨네요. 달리 그림은 거의 대부분이 성적이죠. 특히 그런 화가들이 있습니다.

2017-05-30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31 03:55   좋아요 1 | URL
댓글로 간단히 쓰기가 어려운 주제더라고요. 재밌기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프기도 했죠. 이렇게 한 번 정리해보고 다음에 고쳐나갈 기회가 또 오겠죠^^ 감사합니다.

2017-05-30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 글남깁니다. 만들어낸 작가들의 노력과 작품과는 별개로 보는이는 거기에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좋은게 아니지 싶기도 합니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도 있구요.

물론, 직업적으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라면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읽을 글이 정말 많군요!

AgalmA 2017-05-31 04: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산 너머 산이 되는 비평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생각을 풀어나가다 보면 구덩이 파기가 되더군요ㅎ;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어떻게든 풀지 않으면 답답해서요; 염려와 당부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 좀 많죠ㅎ; 즉흥적으로 쓸 때도 많은데 되도록 허투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2017-05-30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6-06 16:39   좋아요 1 | URL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했어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고 지금 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기회였습니다. 역시 부족한 게 많더군요.

생활의 욕구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물질적으로 그걸 풀려고 하는 건 삶의 수순 같기도 합니다. 폭력물, 선정물로 효과적인 대리만족으로 끝낸다면 좋을 텐데 선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꼭 있죠. 초자아의 제어 미숙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볼 거리인데 이 생각으로 또 밤샐까 겁나서 다음으로^^
늘 좋은 말씀과 생각거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4월과 5월은 대선 정국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독서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다; 다른 분들도 많이 그러셨을 거라 생각한다.

 

 ◈ 완독 목록(순서는 내 맘대로)

이진우 의심의 철학

철학 하면 플라톤부터 시작해야 하나 대번에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인데 이 책은 가장 주목해 볼만 한 현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각자 생각을 어떻게 정초해 볼 것인가를 제시한다. 


 

 

 

 

 

리처드 니스벳 무엇이 지능을 깨우는가 사회 문화적으로 지능을 탐구해 보는 책이라면, 이대열 지능의 탄생은 유전자와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지능의 내부 구조와 원리를 더 심도 있게 파고드는 책이다. 지능에 대한 책으로 단연 추천할 만한 책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베스트셀러 피해서 읽는 내 취향 따위 던져 버리고 읽게 만드는 저자!

최근 책들의 주요 이슈는 ‘4차 산업 혁명과 인공 지능인 거 같은데, 후속 이슈거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거 같다. 하긴 예언자는 아무나 하나.

유발 하라리 씨 다음 책에서는 뭘 말할 생각이죠?

 

 

 

페이건 케네디 인벤톨로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은유를 갖기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토마스 쿤)의 말처럼 새로운 것이 다가와도 우리의 관점 전환이 없다면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겠지.

 

 

 

 

 

제임스 W. 페니베이커 단어의 사생활

문법이나 작법 기술을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 책은 내 문장에 대한 거울로 훌륭하다. 덤으로 다른 사람 문장 인생도 점쳐 보는 능력도 가질 수 있다. 은근히 판단하게 되더라도 당신이 이래서 이러쿵저러쿵하면 뒷일은 책임 못 짐ㅎ;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해괴해도 말이면 단 줄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문제는 개소리하는 사람들은 이런 책을 안 읽는다는 게 곤란한 점. 내가 읽고 당신 이럴지도 모릅니다넌지시 알려줘도 씨도 안 먹힌다.

 

  

 

 

 

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타인을 이해해보자는 책의 취지에 맞춘 듯 왼손으로 필사하는 필사 노트를 받았는데, 맨 마지막에 점자 페이지가 있었다. 눈을 감고 아무리 더듬어 봐도 우리는 삶이라는 낫지 않는 병을 긍정하는 존재다라는 문장도 뜻도 읽을 수 없었다. 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하면서 내가 무언가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 미술은 시대와 사람들이 규정하고 만든 양식이며 합의이다. 옮긴이 박이소 씨의 표현대로 "인간의 시각 경험은 무수히 복합된 다수의 현실일 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과 본 것을 해석하는 내용은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세워놓은 지식과 권력의 형태, 욕망의 통제체계 등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시각과 진실 사이에는 자연적 관계가 아닌 사회적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정철(), 장철영(사진) 노무현입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 내 비약이기도 하겠지만 시민들이 나서게 된 촛불집회에 이 분이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어준이 그토록 열심이었던 거 노무현 대통령때문이었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속으로 약속하고 그 유명한 나꼼수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부터 계속 검정 넥타이 매고 투쟁해왔으니. 문 대통령 당선 뒤 흰 줄무늬 살짝 들어간 넥타이 맨 것에 사람들이 박수까지 쳐주고정치를 가깝고 절실하게 생각한다면 어느 하나 가벼운 게 없다

노무현입니다영화 보고 퉁퉁 부어 나올까 봐 겁먹고 있는 중.

 

마고 모탱 파리 여자도 똑같아요

멋진 그림, 멋진 인용구 가득~

시간 전에는 아직 시간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다”(속담)

창의력이 뛰어난 성인은 살아남은 어린아이다”(U.K. 르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헤밍웨이)

 

 

강미옥 디카시집 기억의 그늘

보고 느끼고 표현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느껴지는 책은 새삼스러운 감격을 주며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루이스 캐럴 동화, 토베 얀손 그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누구도 똑같이 쓸 수도 그릴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이라는 형태. 그래서 모든 책은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물론 그렇지 않은 책에 대해 우리는 종이가 아깝다고 말하지.

      

 

 

 

 

김상혁 다만 이야기만 남았네

나는 한국시에 여전히 기대감이 있다. 눈여겨보고 읽어볼 만한 시를 쓰는 시인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읽어볼 만한 책이 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더 열심히 찾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장은진 날짜 없음

종말은 내가 늘 써보고 싶은 소재인데, 장르 소설이 아니면 잘 구현된 작품이 없다는 게 아쉽다. 주제 사라마구 소설이나 카뮈 페스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짐.

 

 

 

 

 

아서 C. 클라크 라마와의 랑데부

가장 놀라웠던 건 아서 C. 클라크가 구축한 라마 우주선 내부 묘사와 시스템이었다. 상상력을 이렇게 구체화하는 건 모든 창작자가 배워야 할 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악령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 읽기에 도전하며 무엇이 가장 으뜸일까 기대 중이다. 아무래도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일까.

   

 

 

 

 

 

 

 

진행 중인 책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어렵게 읽히는 책은 아닌데 이 책 저 책 읽다가 자꾸 밀리고 있다ㅜ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건 인정!

다른 책 내용이나 이론에 대입해 볼 게 많다.

 

 

 

 

《우든북스 세트》

4월에 미란다 룬디 신성한 기하학만 완결해 읽었는데 얇은 책 묶음이라 언제든 읽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등한시해 읽는 경향이 있다. 반성...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제목은 중요하다. 게으름을 피우며 읽고 있는 변명;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역시나 제목이 중요. 한 챕터씩 산책하듯 읽자니 게으르게 진행 중;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주요 소재로 가져온 것은 루소, 프로이트, 구글이다. 이 셋을 정치 맥락에서 엮는다는 게 흥미로워 읽기 시작했는데 루소에서 벌써 발목이 잡혔다. 절대적인 개인주의, 주체의 자유를 주창한 낭만주의자인 루소가 어떻게 개인 의지의 집합체인 공동체 의지(일반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이상주의로까지 발전하고 만 걸까. 루소는 개인의 우위를 주장하는 문학자로서의 면모와 사회의 우위를 주장하는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라는 두 가지 얼굴이 있었다. 인간의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지면 그 합은 옳은 것을 낳게 되고 일반의지의 질서 체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붕괴할 거라고 장담한 마르크스의 도출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데...사회계약론읽고 다시 읽을까 갈팡질팡 중에 시간은 흐르고 이 책도 주춤 상태.

 

 존 폴 레더락  《도덕적 상상력

 이 책은 위 루소의 견해와 비교해 볼 맥락이 있다. 칼 로저스는 "가장 개인적인 것에 보편성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객관성을 위해 개인적인 측면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하는데, 저자는 그럴수록 "스스로에 대한 시야와 심도 있는 직관 그리고 세계에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모습인지 이해할 수 있는 자원을 잃는 셈"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상상력》 은 '개인적인 이해의 진화 과정'을 탐구하며 평화와 사회변화를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는 작업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루소가 말한 '특수의지'와 '일반의지'의 합이라 말할 수 있겠다. 여하튼 아직 끝은 안 보이고;;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이 책을 잘 요약한 옮긴이 이정하 씨의 말이다. "인물의 행위를 사전에 무력화하는 분열증적인 신체 징후들의 다발성, 행위의 무위와 노력의 무용함, 이를 대체하는 감각적 대상/기호들의 무차별한 연쇄와 조합, 문법의 법 밖으로 혹은 이전으로 탈주하는 말들과, 시간의 고리가 뒤엉킨 어두운 심연에서 분출되는 주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 베케트의 인물들은,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가능한 것을 실현하거나 실재화하는 능동적 주체들이 아니다. 실현하고자 하지 않으므로 이들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조차 없다. 이들은 오로지 주어진 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무화시키는 혹은 소진시키는 집요한 유희에 몰두하면서, 가능한 것의 가능성 자체를 소진시키는 자들이다. 고치 속에 웅크린 번데기 유충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가능성을 소진하는 것과 스스로 소진되는 것만이 이들의 주요한 소일거리이자 습관, 그리고 능력이다.˝

이런 문장에 거부감 있는 분이 책 제목에 혹해서 선택했다가 소진되지 않길 바라며 옮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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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5-29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밌게,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읽다 만 책이 열 권 이상 되는 것 같은데 그것들을 나열해 놓고 몇 페이지까지 읽었는데 요런 내용이 있더라, 하는
페이퍼를 올리고 싶단 생각을 지금 합니다.

12월에 한 해 동안 인상 깊게 읽은 책 열 권쯤 뽑아서 페이퍼를 작성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알라딘이여! 맘에 드는 페이퍼를 봤을 때는 좋아요를 열 번 누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외치며 그러나 세상에는 규칙이라는 게 있어서 할 수 없이 좋아요를 한 번만 누르고 가겠습니다.

AgalmA 2017-05-29 22:09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중인 책을 정확히 따지면 수십 권이 되는데 다 올리자니 귀찮기도 하고 오래된 책은 내용도 생각 안 나고ㅋ 현재 집중하는 책만 올렸어요ㅎ;; 속도가 문제일까요, 너무 방만한 호기심이 문제일까요-,-;;;

소중하게 행사하는 한 표처럼 좋아요도 한 번이 더 좋은 듯ㅎ
공감 주셔서 캄사/

2017-05-29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29 22:12   좋아요 0 | URL
4월에 너무 책 진도가 안 나가서 5월에 열심히 읽고 권수를 좀 늘린 꼼수가 있긴 합니다ㅎ;;
이젠 더워지기 시작하니 날 핑계대지 않게 페이스 유지하자 생각합니다.
다들 열심히 읽고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9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많이 읽으셨는데요? 저야 말로 전멸이네요 ㅋ 선거 나간것도 아닌데 어찌나 긴장되던지...

AgalmA 2017-05-29 22:14   좋아요 1 | URL
읽고 있는 중 책이 많으신 거 아닙니까ㅎ 제 기억엔 겨울호랑이님 리뷰 꽤 읽었던 거 같은데a....
나라가 편해야 정말 책읽기도 편한 듯. 대선 끝나고 책읽기 한결 편해졌어요. 칼날 같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져서 좀 살 거 같아요.

북다이제스터 2017-05-29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독이세요. ^^
전 요즘 3권 동시 읽기에도 내용이 서로 헷갈랍니다.
책 읽기 즐감하시라는 말씀드리며 제가 그 느낌에 공감합니다. 그 즐거움에...^^

AgalmA 2017-05-29 23:2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은 굵직한 책을 많이 읽으셔서 읽기가 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독서목록 권수가 많아 보여도 두달 치라는 함정이 있으며 분량이 적거나 가볍게 읽을 만한 책도 꽤 있죠ㅎ; 윤활유가 필요하니깐요.
2000페이지 넘는 도선생 책읽기가 그걸 좀 무마해 주는 듯ㅎ 도선생 책읽기가 가장 뿌듯했습니다^^
다음달이면 올해 반이 지나가는 거네요. 요즘은 어째 책 따라 세월 가는 거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5-29 22:4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도선생님은 난공불락입니다. 그 분 책 잘 모르지만 큰 거대한 산이라 느껴집니다. ^^
경험 상 한해 절반은 한해의 끝이더라구요. 하지만 정신 바짝 차리면 올해 나머지도 좋은 책 많이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ㅎㅎ
 

 

 

그리기 싫었던 거야?
그냥. 아름답게 그리기 싫었어.
색까지 포기하지는 못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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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ㄱ님과 한밤의 대화
    from 공음미문 2017-05-30 02:32 
    무서운 그림을 왜 그릴까요.그 원인으로 화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을 자주 거론하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매우 큰 요소이기도 할 겁니다.저는 더 큰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프로이트의 견해가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성 본능(에로스)과 자기 파괴를 향한 죽음 본능(타나토스)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죠.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만큼 어두움을 즐기고 추구하는 심리도 있습니다.기질적으로
 
 
초딩 2017-05-29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리기 싫으셨지만
표현 하셨네요 :-)
제5도살장의 표지가 떠 올랐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소진된 인간은 마구 소진할 때 꼭 읽어 보고 싶네요~

AgalmA 2017-05-29 14:52   좋아요 1 | URL
베케트-소진된 인간 매칭은 너무 정합적이라 새롭게 말하기 쉽지 않을텐데 싶었는데 역시 들뢰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글 잘 쓴다니까요.

저도 소진되었다 싶을 때 읽으려고 사두었는데 사두길 잘했다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9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그림이 무섭게 느껴지네요.. 저는 밤에 무서운 그림 그리지 못할 것 같아요 ㅋㅋ

AgalmA 2017-05-29 14:55   좋아요 2 | URL
뭔가 무서운 걸 보거나 느끼면 그림이 저렇게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어제는 딱히 돌출적인 뭔가 없었는데 제 무의식적 심리가 담긴 듯. 제가 제일 당황요-,-; 내가 그려 놓고도 내가 모르니 이거야 원;

겨울호랑이 2017-05-29 14:58   좋아요 2 | URL
AgalmA님 말씀 듣고 보니, 그림 역시 자기 굽는 것처럼 의도대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되었습니다.. 역시 어렵네요 ^^:

yureka01 2017-05-29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색을 프레임의 경계가 되었네요~~~...

AgalmA 2017-05-29 14:55   좋아요 2 | URL
색을 얼마나 지울까가 저 그림의 최대 고민이었습니다ㅎ;

서니데이 2017-05-29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아웃인가요?? a님??

AgalmA 2017-05-29 22:50   좋아요 1 | URL
커피번 맛있죠(딴소리)

2017-05-30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안무가 인 맥그리거의 아토모스를 봤다.

Atomos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 Atom에서 나온 단어다. 그는 1980년대 SF 걸작 리들리 스콧블레이드 러너에서 영감을 얻어 Atomos 제목처럼 영화 데이터를 1200개의 프레임으로 나눈 뒤 컬러나 추상적인 움직임의 형태를 얻어 AI를 동원해 안무를 짰다.

공연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1. http://www.lgart.com/UIPage/Azine/Azine_detail.aspx?Id=55809&SearSt=&page=1

2.  http://www.lgart.com/UIPage/Azine/Azine_detail.aspx?Id=55840&SearSt=&page=1

3. http://www.lgart.com/UIPage/Azine/Azine_detail.aspx?Id=55874&SearSt=&page=1

 

3D 안경까지 착용하며 그의 연출을 본 내 소감은 ... 글쎄였다. 그가 최신 기술을 도입해 창작한 의도는 알겠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느끼고 봐온 정형성을 탈피한 움직임과 효과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내겐 특별히 차별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았다. 안무도, 무대도, 의상도, 음악도.

  

 1일 1사진

 

공연을 다 보고 심드렁해져 술이나 마시러 갔는데 후미진 술집과 일상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이 더 놀라웠다.
맥주 브랜드가 타 기업으로 넘어가 존재하지도 않는 상호를 유지한 채 10년이 지나도록 그들만의 장사 철학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호프집(이곳의 단촐한 메뉴판을 찍어 뒀는데 내가 살아 있다면 5년 뒤에 확인해 볼 것이다). 다녀간 사람들의 기억 없이 차곡차곡 쌓인 의자들. 내일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남루한 일체의 것들. 내일 만나도 안 만나도 그만인 인연들. 한국인보다 더 소주를 챙겨 먹던 외국인들. 붉은 장미 두 송이를 가방에 소중히 담은 채 집으로 가고 있는 할머니.
새로움은 이 익숙함 속에서 내게 더 많이 발견되었다.

 

문득 들리 스콧《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심각한 부조화를 깨달았다. 그토록 뛰어난 능력의 AI 로봇을 만들 줄 아는 인간이 19세기와 마찬가지로 허술했다는 게 지금에서야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영화 속 인간은 기계와 더 많이 합체되었어야 했다. 리들리 스콧은 지금 인간의 상상력을 전혀 뛰어넘지 못한 채 영화를 완성했다.

 


 

 

 

A winged victor for the su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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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30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0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밀 뒤르켐 《자살론》에 따르면 19세기(1854~ 1880) 자살 동기로 압도적인 원인은 ‘정신 질환과 종교적 맹신‘이다. 남녀, 직업적 차이도 없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관습이 그 기원을 상실하고 모호해져 새로운 필요에 상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빛을 찾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호소력을 잃자마자 지식의 최고 종합적 형태인 철학이 가장 먼저 등장이유다. ˝ 뒤르켐은 자연조건이 자살에 영향력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왜 여름에 가장 자살률이 높은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낮이 긴 만큼 사회 활동이 더 많기 때문일 거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시했을 뿐이다. 여전히 살인율도 여름에 가장 높은데 이 잣대로 보면 일견 타당할 것이다. 

 

요즘은 범죄자와 범죄에 있어 환경 문제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학대받았던 불우한 어린 시절, 좋지 못한 주거 환경이나 주변 인물들,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 사회 냉대와 무관심 등등. 범죄 예방에 있어서도 cctv, 체계적 시스템 등 환경 조성으로 실질적으로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는 용어의 탄생처럼 사람의 본성적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스토예프스키 인간의 파괴력을 인간의 본성에서 더 찾는 듯하다. 
내가 에밀 뒤르켐을 통해 가져온 내용들은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에 대한 설명에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살인 전에도 후에도 정신 질환자의 모습이다. 그 범죄에 관한 논문에서 ˝범죄의 실행은 언제나 병을 동반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종교적 맹신을 비웃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개혁을 위해 나폴레옹처럼 비범인(非凡人)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계몽적 사상 실천으로 사회의 해충 ˝이˝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 이는 ‘모방‘ 자살과 비슷한 ‘모방‘ 살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7월의 무더위와 궁핍과 더러운 뻬쩨르부르크의 환경도 그의 살인을 부추겼다. 이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살인은 충동과 우연적인 불협들로 가득하며 스스로 그 살인은 악마가 시켜서 한 짓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유 의지에 회의적이다.

라스꼴리니꼬프 이름의 어근 ‘라스꼴raskol‘은 ˝17세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에 반발하여 옛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자 기존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구교도 혹은 분리파 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분열성‘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셈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렸을 때부터 몽상가였고 꿈과 미신에 열중하는 인물이다. 그와 전당포 노파의 방이 노란 방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관 같은 노란 방은 고흐의 분열적인 노란 방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전당포 노파를 해충 이로 생각한 그도 시기심 많고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고독한 삶을 사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의 문제적 인물들도 대개 그렇다. 가족 부양을 저버리고 장녀 소냐가 매춘부가 되어 생활을 책임지게 만들고 알코올 중독자로 인생을 망치다 끝내 술 때문에 숨지게 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 자신의 비참을 시종일관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모두에게 폐만 끼친 그의 아내 까쩨리나, 자신의 재력으로 타인을 누르고 존경을 받으려 한 속물 루쥔, 타인을 이용하며 죽이며 욕망만을 좇는 스비드리가일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문제적 인물들 양편에 상반된 인물을 배치한다.
이성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물 유형
라주미힌(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앎을 전파하는 번역 일, 인간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뽀르피리(예심판사, 라스꼴리니꼬프의 허점을 끊임없이 폭로하며 자수할 것을 설득),
두냐(라스꼴리니꼬프의 여동생, 가난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주체적인 삶을 사려는 인물,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살인의 권리가 없다고 반박, 그녀를 순종적 아내로 만들려고 한 루쥔에겐 망신을, 그녀에게 안락을 줄 수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그토록 두려워 한 자살할 의지 제공) 있다면,
유로비지 인물 유형
니콜라이(살인 사건 당시 주변 현장에 있었던 우연으로 말미암아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를 덮어쓰게 되는데, 종교적 반성으로 자신의 죄로 받아들임)
소냐(타인에게 절대적 이해와 사랑을 줌으로써 깨닫게 하는 성녀와 같은 존재)가 있다.

유로비지는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생활태도를 취하거나 미치광이 짓을 하며 완전한 고독을 얻는 동방 정교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시궁창 인생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유로비지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신론에 경도되어 있으면서 기이한 행동과 독단적 이성의 맹신에 빠져있는 그의 모습과 반대되면서도 유사하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고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명확히 느껴진다. 공산주의식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여성 해방,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레베쟈뜨니꼬프가 이런저런 사상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인 인물로 묘사된 것에서도 그런 의도가 느껴진다. 유형지에 도착하고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이성의 허약함만을 탓하며 자신의 죄를 내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가 깨닫는 상황은 이성적 판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날 밤 무엇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생각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든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성의 상징이라고 할 ˝변증법˝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고 그는 소냐에게 달라고 했지만 펴보지는 않았던 복음서를 꺼낸다. 그는 종교가 아니라 소냐의 신념에 더 주목한다. 세계를 온통 분열적으로 보고만 자신을 돌아보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꿈꾼다. 이렇게 라스꼴리니꼬프가 삶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 결말을 종교적 귀의로 해석하지 않는다. 《죄와 벌》은 이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와 유사한 여러 인물들(미쉬낀 공작, 스따브로긴, 베르실로프, 이반 까라마조프)을 통해 끝없이 탐색하는 존재론, 자의식의 투쟁, 人神 사상의 포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끝이 비극이라는 결말을 알고 우린 출발한다.


 


덧)
《악령》에서 보았던 것들을 《죄와 벌》에서도 발견하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 편집광 면모를 재검토해보다.
1. 밀도가 떨어지는 부주의 - 사고로 다친 마르멜라도프를 옮기느라 피투성이가 된 라스콜리니꼬프를 보고 경찰 서장 니꼬짐 포미치가 놀라며 지적했는데도 이후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해서 개연성이 너무 떨어졌다.
2. 죽음, 인간의 숙명 등을 말할 때 늘 거미 등장한다. 드니 빌뇌브 영화 《에너미》에 나왔던 거미도 떠올리며 이것은 서양인의 무슨 심리적 원형인가 생각했다.
3. 주인공이 흥미를 가지는 여성은 대개 콤플렉스 가지고 있다. 매춘부, 절름발이, 못생김, 가난한 아이.
4. 《악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롤리타 증후군 서술을 여럿 발견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행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쯤 되면 당시 풍속 반영으로 봐야 하나. 이후 소설에도 계속 이 소재가 나온다면 작가가 인간 본성의 변태성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을 생각이다.
5. 꿈, 심령, 초현실성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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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5-28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전 <죄와 벌> 몇 번 시도했는데 전부 실패했습니다. ㅠㅠ
역시 종교적 의미의 소설은 저와 맞지 않는 것이라는 나름 결론입니다. ㅠ

AgalmA 2017-05-28 19:40   좋아요 1 | URL
종교적인 문제는 고전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논쟁점이라^^;
철학이나 역사에서도 종교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왜 그렇게 적응이 어려우신지 모르겠네요ㅎ;

북다이제스터 2017-05-28 19:55   좋아요 0 | URL
종교 얘기긴 하지만, 아마도 종교 비판이 아닌 찬향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ㅎ

AgalmA 2017-05-28 19:48   좋아요 1 | URL
문제적으로 접근하면서 결국엔 종교성에 동화되어 간다고 볼 수도 있겠죠. 객관적인 사실로 따지고 들면서 신비주의로 빠지는 많은 과학자들의 예처럼.

2017-05-28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28 22:27   좋아요 1 | URL
최근 자료는 제가 못 찾아서요. 아마 10년 단위로 조사한다면 2006년부터 해서 지금까지 측정한 자료도 나왔을 만도 한데 말이죠^^

2017-05-2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8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lamA님께서 말씀하신 통계 자료가 눈에 들어와 몇 자 적어 보게 되었습니다. 자료 중 여름의 비중이 다소 높은 편은 사실입니다. 다만, 평균 수준이 25%임을 감안해 본다면, 계절적 차이가 있는지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래프가 ‘살인 범죄‘를 의미하기에 ‘자살+타살‘을 모두 포함한 경우여서, 자살을 설명하는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인 생각이니 혹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죄와 벌>을 어렸을 때 청소년용으로 편집된 책을 읽었는데 많이 어려웠습니다. 벌받는 기분으로 읽었던 생각이 나네요. ㅋ

AgalmA 2017-05-29 02:37   좋아요 2 | URL
말씀하실 만한 걸 하시는 터라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댓글 오픈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뒤르켐도 겨울호랑이님과 비슷한 논지였죠. 자살률이 여름에 가장 많긴 하지만 봄도 오차 범위 내에 있거든요.
자살률과 살인율을 동률로 해서 여름 발생에 주목한 건 제 주관적 견해라는 거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나름의 해석을 하는 것일 뿐^^;

저도 죄와 벌 벌 받는 기분으로 읽었어요ㅎ 하권은 속도감 있고 재밌는데 상권은 배경 설명을 너무 많이 해서 많은 독자들을 초반에 나가 떨어지게ㅋ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5-28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galmA님. 저는 문학적 소양이 낮기 때문에 좀 더 쉬운 문학부터 접근해야할 것 같네요. <죄와 벌>을 비롯한 도선생 도전에 서평 대회와 더불어 응원 보냅니다. AgalmA의 위대한 도전 or 무한도전? ㅋ

AgalmA 2017-05-28 22:15   좋아요 2 | URL
AgalmA의 무모한 도전요ㅋㅋㅋ
이상 시와 상대성 이론 비교하시믄서 무슨 겸손을^^

cyrus 2017-05-29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셰익스피어의 희극, 카프카의 소설처럼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입니다.

요즘 홈즈 주석판을 읽으면서 ‘주석 달린 도스토예프스키‘, ‘주석 달린 카프카‘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석판으로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AgalmA 2017-05-29 14:58   좋아요 0 | URL
예.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외국엔 그런 시도가 이미 있었을 거 같은데 국내엔 안 알려진 건가 싶기도 하네요.

2017-05-30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5-30 02:25   좋아요 0 | URL
살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곳이 대개 더운 나라입니다. 더위 자체보다 사회 환경적 영향이 더 크다는 걸 감안해야 겠죠.
(top 10 소말리아, 시리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아이티,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콩고, 콜롬비아)
더운 날씨라 작물이 잘 자랄 수도 없고 척박한 환경에 자원도 없다보니 더 그런 것일테고(자원이 있으면 그로 인해 더 각축), 제국주의 시절부터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더 혼란한 상황을 겪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도 오늘 첫 모기에게 물렸습니다. 여름 생각하니 좀 끔찍하긴 하네요ㅎ;

종이달 2021-10-1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