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시간
공간을 넘어왔지만 내 습관이 바뀐 건 아니었다. 나는 강화의 밤 속에서도 서성이며 귀 기울였다. 깊은 밤엔 잠귀 밝은 개들이, 이른 새벽엔 새벽잠 없는 닭들이, 제 언어로 뭐라 뭐라 말했다. 아니 뭐라 뭐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햇볕이 눈 밑까지 밀려오자 까마귀와 까치가 허공을 담은 목소리로 뭐라 뭐라 표현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부딪히지 않고 평화로이 흩어졌다. 이 소리들은 익히 알던 소리였다. 한동안 그 개성들을 잊고 살았다. 사람과 자동차 소리에만 둘러싸여 산 그간의 반복들. 단 하룻밤으로도 이런 차이를 알게 되다니 여행은 얼마나 멋진 선생님인가. 그러나 같이 살아가는 생물 외 무생물의 언어까지 헤아리기에 나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사람의 시간
벗은 ‘올해의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평가해준 상. 그에게 상은 하냥* 아이들이었다. 그게 과시적 자랑이 아니란 걸 안다. 나는 늘 그를 키팅 선생이라 생각해서 당연하다고 끄덕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소비의 사회, 논어를 가르칠 때 아이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들려주었다. 조를 짜서 토론을 하며 이런 사색을 하는 아이들의 공간에서는 따돌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일찍 눈뜨고 더 깊게 보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 한국의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이런 커리큘럼과 토론의 장이 열릴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하냥: ‘늘, 함께‘라는 뜻의 방언. 허수경 시인의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한다.



나무의 시간
벗은 텃밭을 가꾸는데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와 텃밭에 비료를 뿌렸다. 흙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표현 중 하나가 떠올랐다. 
˝팔을 잃어버리고도 안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흙은 인간의 팔이 해주는 포옹을 기억하는지
삽으로 흙을 파는 건지 땅에 상처를 주는 건지˝(「매캐함 자욱함」)
호모 사피엔스의 농부 기질보다 나는  네안데르탈인의 채집 기질이 더 많으니 전등사로 가자고 했다. 대웅전 지붕 모서리에 있는 ‘나녀상‘과 대웅전 부처상 위의 ‘닫집‘(부처님이 사는 작은 집을 표현한 것)을 보기 위해.
그러나 우린 다른 무엇보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했다. 고려에서 시작되고 조선이 망해도 살아있는 나무. 하지만 인간은 이런 나무를 간단히 잘라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이곳 오래된 소나무들은 상처가 많은데 일제시대 송진 수탈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 한다. 멋모르고 보면 못생겼거나 흉측하다 말할 테지만 그것은 소나무에게 살아낸 증거였다. 700년 된 은행나무에도 일제와 관련된 신기한 전승이 있는데, 은행을 두 배로 공출하려고 하자 노승이 은행나무에게 앞으로 천년 동안 열매를 맺지 말 것을 기도했다. 지금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을에 다시 와서 확인을 해야 하나.
700년 된 은행나무에 감탄하고 그래설까 화분 몇 개를 사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차, 했다. 고려궁 터 옆에는 688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눈앞의 것을 우린 항상 놓친다.



시의 시간
지금은 까치가 저녁의 목소리로 울고 날아가는 시간.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집을 나는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는˝(「발이 부은 가을 저녁」) '가을의 시간'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


ㅡ 「이 가을의 무늬」 중

이광호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의 무늬‘는 여름의 시간 뒤에 나타나는 오래된 시간의 지도를 나타나게 한다. 시간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계절은, 세월 속에서 엇갈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하˝는 시간˝이라고. 동감이다. 이 시집 2부의 주요 소재와 제목이 열매로 채워진 것은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도를 품은 성물이었다.
‘가을‘은 저마다 영근 낮의 기운들이 밤으로 가는 ‘저녁‘ 같기도 해서 이 시집에서 ‘가을‘과 ‘저녁‘은 동의어이다
허수경 시인에게 기억은 완벽히 복원할 수 없는 불가능-시간과 동의어일 것이다. 죽음의 시간으로 가는 동안 우리들의 기억들은 모여 살며 언제든 불쑥 나타난다. 누구에게든.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한국 최초의 문묘와 교육 기능을 행한 교동향교, 한국 최초의 방직공장과 노동운동,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한옥 성당, 평화 전망대까지 품고 있는 강화에서 이런 생각은 퍽 어울린다.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는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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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20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알고싶다 1068회 죽음을 부른 실습 - 열아홉 연쇄사망 미스터리]를 보고...
이 방송 보고 특성화고, 마이스터교 가려던 학생은 생각이 많을 거 같다.
가축을 길러 팔아 치우듯 학생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사육장 시스템.
실습을 그만 두고 싶어도 체벌에, 벌점에, 모욕에... 갈 곳 없는 사회의 단면을 절감하고 결국 자살하는 아이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썩은 이 사회... 곳곳에서 무수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어느 기차역, 노숙자는 낡은 시집을 읽으며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면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시집 제목을 훔쳐보았다.

<불가능에게로>

시인의 이름은 너무 희미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기차는 철로에 앉은 비둘기들을 몰아내며 들어왔고 비둘기들은 도시의 눅눅한 하늘로 흩어졌으며 나는 기차를 탔다.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

허수경 시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뒤표지에 있는 글이다. 이 시집도 보랏빛이다.

강화로 가는 막차를 타기 1시간 전에 나는 이 시집을 빼 들었다.

이 시집을 다시 읽을 시간이 지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간다고 말은 했지만 강화로 가고 있다는 걸 지금 실감하듯이.
˝안 하고 싶습니다˝ 란 말을 뱉어놓고 나는 목적지를 정한 건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고자 한 목적지가 정확하게 이것이었을까. 깜깜한 바깥을 내 속처럼 바라보고 있다.

밤이고, 길 위이며, 매 순간 낯선 사람 낯선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이 이동은 누구도 기억할 필요 없는 나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길이다.

오늘은 「포도나무를 태우며」시가 유독 밟힌다. 이 시의 표현을 빌자면, 나라는 존재는 미래에 죽은 나를 위한 음복 같다.

김포를 지난다. 자정 전엔 도착할 것이다.
내리기 전에 더 더 시를 읽자.
시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지만 지금을 구할 수는 있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날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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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15 20:16   좋아요 1 | URL
비둘기가 있다면 적어도 운치있는 공간이지 않을런지? 기계장치들로만 가득한 역은 더 을씨년스러울 거 같은데요.

폭주하는 자본의 기차를 우린 타고 있는 걸까요, 쫓기고 있는 걸까요.

2017-03-16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3-14 2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읽는중으로 등록만 해놓고 아직 다 넘기질 못했어요..아이고..사는게 참 역겨울 때 시로 진정시키고 싶은데 쉽게 또 이게 잘 안되더군요...

AgalmA 2017-03-15 20:19   좋아요 2 | URL
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단순히 시간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죠~_~ 마음의 여유, 제반 지식, 이해의 폭...따지자면 끝도 없을 듯^^;

[그장소] 2017-03-15 0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나를 위한 음.복. 같.다. 라니...
너덜 너덜 목없는 빨래 ㅡ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있습니까 ㅡ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ㅡ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ㅡ

아 , 아 정말 기막히게 좋다!! 이 시 ㅡ 포스팅 ~^^

AgalmA 2017-03-15 20:21   좋아요 1 | URL
이광호 평론가가 저 시를 분석하며 「빙하기의 역」 시로 넘어가는 글도 참 좋죠^^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계셔서 맞아 맞아 하며 또 읽음^^

[그장소] 2017-03-15 23:34   좋아요 1 | URL
오오 ㅡ 빙하기의 역 ㅡ 그 말은 같은 시인 ㅡ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ㅡ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이런 연계되는 시들 ..크흣 넘 좋아!!^^♡♡♡

서니데이 2017-03-15 0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화에 다녀오시나요??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요?? 주말부터 따뜻해졌어요. a님도 좋은하루되세요.^^

AgalmA 2017-03-15 20:23   좋아요 2 | URL
짧은 마실 왔어요^^ 볕이 좋더군요. 집이 아니라 더 많이 움직이게 되는 것도 재밌고요.

cyrus 2017-03-15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어려웠던 시집이었습니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낯선 느낌. 이러면 리뷰로 정리하기가 힘들어요. ^^;;

AgalmA 2017-03-15 20:25   좋아요 2 | URL
허수경 시인 특유의 에두르는 정서에 에두르는 표현 때문에 시적 안개가 많죠^^ 독자 각자가 자유롭게 걷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굳이 리뷰로 정리하고 싶진 않더라는.
 

1. 뉴턴 제2법칙 F=ma(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과 같다)를 들여다보다가, 물체가 현재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인 ‘관성(inertia)‘에서 물체 자리에 인간을 대입해 보면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보존 능력-코나투스(conatus)‘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중력질량 M과 관성질량 m이 1퍼센트 오차 이내로 같다는 것은 나와 타인/외부가 개별성에서 같음을 시사한다.
˝M은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행사하는 중력의 세기를 좌우하는 양˝이고, ˝m은 물체에 힘이 가해졌을 때 힘에 저항하는 정도인 ‘관성‘을 가늠하는 양˝이다.


2.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중력인 경우는 또 어떤가? 물체의 운동은 수평방향으로는 똑같은 중력을 받기 때문에 등속운동을 한다. 그러나 수직방향으로는 힘이 달라지면서 공은 기하학적인 포물선을 그린다. 이것은 통시적인 방향성을 지닌 인간의 삶과 역사가 굴곡이 많을 수밖에 없는 논리적 설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량이 큰 이를테면 권력이 컸던 박근혜 씨의 추락은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성립된다.
˝공의 궤적은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의 빠르기와 진행방향, 즉 초기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에 따르면, 최순실 씨는 박근혜 씨가 대통령에서 출발하는 중요한 초기 조건이었다. 뉴턴은 초기 조건을 모두 알고 있고 작용하는 힘도 알고 있다면, 이 운동 즉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탄핵까지 성사될 수 있었던 건 그 초기 조건과 힘들이 드러났을 때 가능했다. 박근혜 씨는 그렇고, 우리에게는 다른 초기조건이 있었다. 이화여대 정유라 특혜 의혹 진상 규명 운동, 최순실 씨의 태블릿 pc 발견 그것은 아주 우연적 사건이었다. 다시 한 번 토마스 쿤의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은유를 갖기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3. 뉴턴의 세 번째 법칙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은 방향이 반대면서 크기가 같다.˝는 박근혜 씨 일파 권력과 국민과의 탄핵 힘겨루기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질량을 가지고 존재하는 한 F(힘)은 작용할 것이고, 우리는 작용과 반작용 씨름을 계속할 것이다. 박근혜 씨의 ‘잘못 중력‘(작용)이 우리를 이토록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박근혜 씨도 우리의 ‘탄핵 중력‘(반작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 관계를 인력과 척력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기력 설명에 해당하고, 여기서는 뉴턴의 중력 법칙에 따라 ‘잘못 중력‘으로 표현하는 게 더 재밌어서 저렇게 말했다.


4. 힘에는 방향이 있고, 지구의 중력은 항상 아래쪽을 향한다. 권력은 사람을 잡아당기고 누르는 중력 속성과 닮았다. 그러나 더 강한 힘이 있다. 뉴턴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힘 중 ‘전기력‘이 있다. 물체뿐 아니라 바람, 물 등 많은 것들의 밀고 당기는 힘이 모두 전자기력이라는 걸 뉴턴은 몰랐다. 전기력은 ‘위‘로 향하는 모든 힘의 원천이다. ˝원자를 단단하게 결합시키고 물체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것은 관성처럼 ‘나‘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부는 대부분 텅빈 물질˝이 전기력으로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은 나이면서 나를 모르는 ‘자아‘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
인간이 형성하는 앎과 관습과 시스템과 체계들이 우리를 이 땅에 끌어매는 중력인 것처럼.
즉 우리의 상부는 자아라는 전기력이 잡아당기고 우리의 하부는 인간의 생활기반이라는 중력이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
전기력이 중력보다 10의 41배쯤 강하다고 하니 우리가 자아에 강력하게 이끌리는 것도 설명됨직하다. 그러나 지구에 사는 한 우리는 인간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일전에 겨울호랑이님이 재미난 질문을 하셨다. ‘빛의 속도가 더 빠를까, 생각의 속도가 더 빠를까‘였다. 그때 나는 처음에는 빛의 속도가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갈릴레오의 증명에 따라 같은 조건에서는 모든 물질의 속도는 같을 것이기에 생각과 빛이 같은 조건이라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늘 또 <신의 입자>를 읽다가 전자기파의 속도를 알아낸 맥스웰의 파동방정식 설명을 읽으며 그 문제에 해답을 발견했다.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정확하게 같다는 것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뜻˝이란 대목에서 우리 신경세포가 전기적인 방법으로 신호를 전달한다는 걸 생각할 때 ‘빛과 생각‘은 성질상 속도가 같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의 속도는 엄청나다는-ㄷ-)˝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속도를 지닌 생각을 지니고도 나는 왜 재치 발랄 유머가 안 나오는가ㅜㅜ무슨 회로가 잘못된 거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도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양자이론으로 넘어가면 에너지가 파장에 따라 달라진다. 즉 빛과 생각이 어떤 파장을 지니는가에 따라 에너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난 이것을 실험하거나 증명할 능력이 없다; 무한한 공부 굴레만...


* 이렇게 중간중간에 생각이 많아서야 이 책 언제 다 읽지ㅜㅜ하지만 재밌다!

** 저 웬만하면 지적 안 하는데, 이렇게 좋은 책에 오타들 너무 많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급했단 말인가...
˝나무(☞너무) 많다˝는 애교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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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14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의 리뷰를 읽으니,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 Natura Naturans, Natura Naturanta를 도출한 스피노자가 생각나네요.(처음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셔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자연관계임을 다시 생각나게 하네요. Agalma님 덕분에<신의 입자>가 정치물리학 책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ㅋ 좋은 리뷰에 제 이름을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뒤에 저도 생각을 했는데, ‘생각의 속도‘는 뉴런(neuron)간 연결 속도 뿐 아니라 생각의 깊이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그냥 근거없는공상이라 생각되지만요.

AgalmA 2017-03-14 18:03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원리와 법칙을 찾는 게 괜한 일은 아닌 거겠죠. 연결해 보면 꽤 신빙성이 있으니 다들 또 주장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조율이 혜안이 되는지 독단이 되는지가 문제겠죠^^
말씀하신 ‘생각의 깊이‘ 부분이 제가 저기서 말한 파장에 따라 에너지가 달라진다는 것과 관련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현, 지속 등등에 관련될 테니까요. 양자 이론 더 깊이 보면 생각할 거리가 또 나올 거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3-14 18:30   좋아요 1 | URL
저와 아인슈타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하나씩 있더군요. 공통점은 둘 다 ‘사고실험‘을 한다는 것, 차이점은(사실 이것이 결정적이겠지만) ‘사고의 깊이‘라는.. ㅋ Agalma님 견해에 동의합니다.. 가설은 세웠으니 이제부터 증거를 찾아야겠군요^^:

AgalmA 2017-03-14 18:42   좋아요 1 | URL
저도 사고실험형 인간ㅎ 그런 사람들 보면 친밀감이 빨리 생기는데 그래서 겨울호랑이 님과 빨리 친구가 됐나봄^^
그런데 제 문제는 증명하는 과정에 봉착하면 눈물이ㅜㅜ...내게 이과적 재능이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수학을 전혀 몰랐지만 아인슈타인이나 마릴린 먼로보다 전기가 많다는 인기만점 마이클 패러데이가 제 희망일 수는 없으니...

겨울호랑이 2017-03-14 18:43   좋아요 1 | URL
^^: 풀기 어려운 과제는 후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방법도 있지요 ㅋ 우리 모두 자신의 강점에 주목하자구요^^: 저도 Agalma님 덕분에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단발머리 2017-03-14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근혜씨의 ‘잘못 중력‘(작용)이 우리를 이토록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박근혜씨도 우리의 ‘탄핵 중력‘(반작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에 무릎을 탁!! 칩니다. ㅎㅎㅎㅎㅎ
그러니까 대충 대충 나쁜짓도 대충했어야 걸리지 않을텐데... 이건 뭐, 전방위적으로 적극적으로 마구잡이로 국정을 농단, 아니죠. 최순실의 국정운영이 이루어 졌으니까요. 참... 뉴턴의 3법칙이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여주는게 참... 씁쓸하네요.
그리고... 웃기기도 하구요^^

AgalmA 2017-03-14 18:06   좋아요 0 | URL
박근혜 씨는 요즘 이야기의 화수분 아닙니까ㅎ; 걸어다니는 tv랄까. tv 잘 안 보는데 보는 게 거의 뉴스나 시사라 매번 박근혜만 등장해서 짜증요!

cyrus 2017-03-14 14: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빛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보다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식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라서 생각의 속도가 빠를 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게 편해서 좋아요. 하지만 저는 지식을 빨리 찾는 과정을 좋게 보지 않아요. 지식을 빨리 찾으려고 하면, 그 지식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검증할 수 있는 과정을 지나쳐버립니다.

AgalmA 2017-03-14 18:19   좋아요 2 | URL
빛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에 대해선 저는 이변이 없는 한 위의 결론으로 계속 갈 거 같습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게 아니듯이 인간의 많은 요소들도 꼭 자신을 위해 있지도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내용을 보여주는 진화심리학이나 생물학 등등이 재밌기도 하고요.
지식을 빨리 찾으려는 성격은 ˝직관˝처럼 인간 본능이기도 하며 때론 유레카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시간이 늘 부족하죠^^;
 

폰스 무하(1860~1939)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슬라브 서사시> 연작 같다. 세계사로 보자면 한국보다 풍파를 더 많이 겪었다고 할 수 있는 체코에서 태어나 가난하지만 목가적인 풍경 속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무하 그림의 토대였다. 무하 그림의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종교를 통해 형성된 것 같은데, 교회 성가대원이기도 했던 무하가 그림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도 교회 천장화를 보면서였다. 나중에 상징주의, 심령술, 최면 기법, 프리메이슨 활동 등으로 인해 신비주의가 더 강화된다. 무하가 작품을 위해 모델들에게 요구하거나 찍은 사진들은 그런 바탕에 있었다. 조국을 떠나 파리, 미국 등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아르누보 장식 화가라는 꼬리표를 얻은 것보다 조국에서도 이방인 취급당해야 했던 상황이 더 속상했을 거 같다. 중년에 접어든 무하는 슬라브 유대와 평화를 위해 <슬라브 서사시> 작업에 들어간다. 재산을 모아두지 않아 여유롭지 않은 탓에 기획에서부터 후원자를 만나 완성하기까지 20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중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어렵게 어렵게 그림을 그렸던 상황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 모두를 체코에 기증했는데, 체코가 2차 세계 대전 후 공산화되면서 <슬라브 서사시>가 시대착오적이고 맹신적인 애국주의 결과물이란 비난을 받으며 문서 보관소 지하창고에서 처박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슬라브 서사시 연작 중 - 슬라브 민족 원래의 고향>, 1917, 캔버스에 템페라, 610X810cm

 

 

<슬라브 연작시>는 알폰스 무하 개인의 성취로 끝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1918년 무하는 11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이듬해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무하의 다른 작품들과 5점의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되었을 때 이 전시는 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회에 다녀간 사람들은 체코가 겪고 있는 고통을, 슬라브인의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혹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18년엔 무하가 조국을 위해 무상으로 국장과 우표, 지폐 등을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너무 부럽! 한국은 그럴 생각조차 못하는 나라-_-

 

 

 

 

 

체코 가면 무하가 디자인한 시장실과 무하 박물관을 꼭 봐야겠다. 그의 대형 템페라들을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일까.

 

 

 

 

 

 

시대상황과 당시 사조 속에 무하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았는지 이번에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치유를 얻었다. 그토록 손이 많이 가는 장식성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작업을 소화했는데도 뭐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다니!

 

 

 

 

 너무도 감명적인! <황야의 여인>, 1923, 유채, 201.5X299.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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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13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코의 교회 천장화는 서유럽의 천장화와는 또다른 느낌이 드네요^^: 장엄함보다는 친근함이 더 느껴지는 것 같아요. 물론 사진으로 봐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런 문화배경의 차이도 무하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는지 더 친밀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고등학교 등교 버스 안에서 이미연(<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당시)같은 여학생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ㅋ (써 놓고 나니 역시 저의 미술에 대한 안목은 대책이 없네요.ㅜㅜ) Agalma님 즐거운 월요일 보내세요^^:

AgalmA 2017-03-13 18:09   좋아요 3 | URL
사진상으로 보면 좀 소박해보이기도 하죠? 슬라브 민족 전통 의상을 봐도 그렇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소박한 데가 있어서 그 문화적 특징인가 싶기도 하고요. 특히나 동유럽은 공산권 체제도 겪어서 소위 말하는 부르주아 문화를 배제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서 그런 느낌이 더 날 수도 있단 생각을 합니다.
응답하라1988도 아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ㅋㅋ 안목은 있으신데 타임머신 타고 너무 멀리 가시는 거 아님까ㅎ
겨울호랑이님도 남은 월요일 저녁 행복 가득하길/

겨울호랑이 2017-03-13 20:46   좋아요 1 | URL
ㅋ 개인적으로는 80년대말 90년대 중반까지가 아름다운 추억의 시대였던 것 같아요.. 지금 보니 거의 back to the future 수준이군요 ㅜㅜ

AgalmA 2017-03-13 20:54   좋아요 1 | URL
서구에서 히피 시절이었던 60~80년대의 개인적 자유를 우린 그때 맞이한 거죠. 그런 세대가 좀 더 나은 시대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많은 걸 바꾸기도 했지만)... 지금이 그 노력의 최선이란 결과라고는....심리적으로 거부하고 싶네요ㅎ; 저도 그 당시엔 제 한계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hnine 2017-03-13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르뷔지에 전시 보러 예술의 전당 갔을때 알폰스 무하 전시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안되서 못보고 왔어요. 아직도 하고 있나 모르겠네요.

AgalmA 2017-03-13 18:20   좋아요 2 | URL
12월부터 했던 터라 3월 초에 끝났죠. 늘 관심을 받는 예술가라 또 올 겁니다. 그림부터 인테리어, 보석세공까지 작품도 워낙 많아 전시할 거리가 많아 더 그렇죠^^

북프리쿠키 2017-03-13 11: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르셰미술관전 보러 가는김에 코르뷔지에, 알폰스 무하를 봤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황야의 여인~눈에 확 감기네요^^

AgalmA 2017-03-13 18:18   좋아요 4 | URL
이 바쁜 일상에서 하나라도 챙겨 본 게 어딥니까^^ 멀리서 일부러 보러 서울까지 오셨잖음.

알폰스 무하는 대형 템페라를 봐야 그 진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구글로 무하 박물관 내부 이미지 찾아보니 그 위용이 대단하더군요. 디자인 실력 뛰어나 포스터나 광고 삽화를 그린 재주많은 예술가 정도가 아녔어요. 그는 진정 예술가였어요. 무하 때문에 체코에 가야될 이유가 또 생겼죠^^

[그장소] 2017-03-13 1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로필이 산뜻한 새벽 빛!!^^ 물빛인가? ㅎㅎㅎ예쁘네요~

AgalmA 2017-03-13 19:44   좋아요 3 | URL
저는 꿈빛이라고 그렸습니다^^/

[그장소] 2017-03-13 19:46   좋아요 3 | URL
오오, 꿈 빛이여~^^? 좋다 . 좋아요!^^ 예쁘게 발음되는것이~ 만족스럽네요!

보슬비 2017-03-14 0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저 시청안에 있는 카페에서 디저트와 칵테일을 마셨었지요.ㅎㅎ
하지만 무하박물관은 계속 미루다 못봤어요.^^;;

AgalmA 2017-03-14 01:19   좋아요 1 | URL
ㅎㅎ 근처까지는 가셨네요. 만남도 때가 있다고 하죠. 다음에 가실 때는 무하박물관 잊지 않고 가실테죠^^
 

 

나는 이 손들이 서로를 통과하길 바랐다

차라리 적대시하길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더욱 분명히 그리고 있었다

그곳은 내 마음의 세계가 아니라 線의 세계였다

현실 속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림은 다만 나를 스쳐 지나가는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 기차를 타고 오래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지만

나는 곧 내릴 역이 임박한 걸 감지한다

 

 

 

 Bonobo - Break Apart

 

 


 

"사실 그래. 그러고 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게 없네."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과 불안도 안겨 준다고 생각하네."
"그건 어째서?"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한때 뿐이거든. 나중에 늙어서 죽기 마련이야. 또 그 까닭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 사랑하게 되는 걸세. 만일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처음에는 매혹되지만 나중에는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을 걸세. 언제나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연약하고 변모하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기쁨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 아니겠나?"
"그렇긴 해."
"그러기에 나는 밤 하늘에 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는 줄 아네. 어두운 밤에 치솟는 푸른 불꽃은 가장 휘황찬란할 무렵에 작은 혼선을 그리면서 꺼져버리거든. 그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지. 기쁨과 불안은 이렇게 서로 짝지어 다니면서 그것이 순간적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것일세.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해. 허지만 어떤 경우에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래?"
"말하자면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결혼을 한다거나,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정을 느껴 사귀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 그것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네."
크눌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검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얼굴로 이와 같이 말했다.
"그건 옳은 소리야. 그러나 그것 역시 어떤 경우나 마찬가지로 한 번은 끝장이 나기 마련이지. 세상에는 사랑이나 우정을 짓밟아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야 물론이지. 그러나 그 재앙이 닥쳐오지 않으면 모르거든."
"그런데 이건 알다가도 모르겠네. 안 그런가? 나는 여태까지 연애를 두 번 했네. 모두 진정한 사랑이네. 두 경우 다 죽으면 죽었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모두 깨어졌네. 그래도 나는 이렇게 피둥피둥 살아있거든. 그리고 고향엔 친구가 한 사람 있네. 평생토록 우정이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서로 헤어진 지가 벌써 오래되었네."
크눌프는 말이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 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슬픔을 맛보지 못했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그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어 시시각각으로 애정의 가교(假橋)로 왕래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서 불꽃 이야기가 가장 감명 깊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치솟는 매력에 가득 찬 불꽃ㅡ, 솟아오르기가 무섭게 곧 꺼져버리는 그 광경은, 아름다울수록 빨리 사라진다.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이 점에 대해서 크눌프에게 말했다. 크눌프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응, 그래"하고 대꾸할 뿐이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별로 보람이 없네. 인간이란 생각에 따라서 행동한다기보다 오히려 마음내키는 대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거라네. 그리고 우정이나 연애 같은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과 같을 걸세. 결국 인간은 각기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네. 타인의 침범을 불허(不許)한단 말이야. 사람이 죽는 경우도 예외일 수 없지. 사람에 따라서 하루, 한 달, 혹은 일년쯤 울고 불고 하겠지. 그러나 결국 다 잊고 말거든. 그리하여 죽은 사람만이 관 속에서 고향도 친지도 없는 젊은 직공처럼 혼자 누워있기 마련이 아니겠나."
"이 사람아, 그 기분 나쁜 소린 집어치우게. 우리는 ‘인생은 결국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종종 말해 오지 않았나. ‘악하고 원수가 되는 대신에 착하고 친절을 베풀면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인생이다‘라고. 만일 지금 자네 말을 긍정한다면, 사람은 도둑질을 하든 살인을 하든 똑같이 된단 말이야."
"아니지. 그건 이야기가 다르네. 자네가 만일 사람을 만나는 대로 무조건 쳐 죽여 보게. 그리고 노랑 나비에게 독이 든 나비가 되라고 호통을 쳐 보게. 자네는 남의 조소거리가 될 걸세."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세.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면 올바르고 성실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겠나. 황색도 청색도 결국은 다 사라지고 선도 악도 속절없다면 세상엔 선하고 값진 것이 있을 수 있겠나 말일세. 인간은 누구나 숲 속의 짐승들처럼 본능 그대로 살아가도 무방하지 않겠나."
크눌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떻다고 할까? 필경 자네 말이 옳을 걸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그 점에 대하여 고민하는 모양일세. 그러나 일이 그렇게 외부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에도 죄가 성립될 수 있거든. 우선 나 자신이 그것을 긍정하니 말일세. 그리고 선을 행하면 마음이 편하고 양심이 흐뭇해하는 것을 보니 선은 역시 올바른 것임은 사실이야."
나는 그의 표정에서 이런 이야기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때때로 철학적 사색을 하며, 어떤 인생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중단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때 그가 나의 미숙한 답변이나 항변에 싫증이 나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기 멋대로 사색하다가 지식과 말로 이룰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책, 특히 톨스토이의 것을 많이 읽었는데, 진리와 궤변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긍정하였다. 그는 영리한 어린이가 어른에 대하여 탓하듯 학자를 경멸하였다. 즉 학자들이 자기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별로 두드러지게 옳은 일을 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지적 기교를 총동원해도 수수께끼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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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비로소 나는 고향집 앞에 서 있으면서도 부모 형제와 친구들을 전혀 생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하여 나는 실망과 비애와 수치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네. 그렇다고 새삼 그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네. 그때는 이미 꿈에서 깨어났으니 말일세." 크눌프는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영혼과는 완전히 구분되네. 사람은 둘이서 같이 걸어갈 수도 있고, 말할 수 있으며,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지만, 두 영혼은 마치 꽃과 같아서 각각 어느 일정한 곳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할 수 없네. 가까이하려면 뿌리를 뽑아야 할 테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그러므로 꽃은 그 향기나 씨앗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네. 그러나 그것은 꽃이 하는 일이 아니고 바람이 하는 일이지. 바람은 마음대로 내왕할 수 있으니 말이야" 하며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내가 방금 이야기한 꿈도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을 걸세. 나는 헨리에트나 리자베트에 대해 못할 짓을 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한동안 사랑하면서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한 까닭에 나한테 그렇게 비슷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타난 것일세. 그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어. 나는 부모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부모는 나를 아들로, 나아가서는 자기의 분신으로 생각할 걸세. 그러나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남일세. 이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영혼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부모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를 내 청춘이나 혹은 변덕스러운 마음의 소치로 돌릴 수도 있을 걸세. 그런 경우라도 부모는 나를 끔찍이 사랑할 걸세.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에게 눈과 코뿐만 아니라 이성(理性)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물려줄 수 없는 걸세. 영혼이란 사람마다 새로 제공해 주는 거라네."


ㅡ헤르만 헤세 <크눌프> 2장 크눌프의 추억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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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3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13 02:06   좋아요 2 | URL
북플로 쓰면 밑줄긋기 제한이 없어요. 단 서재에서 밑줄긋기 고칠 때는 제한 걸리기 때문에 처음 쓸 때 수정할 거 없게 써야 하죠.
고객센터에 서재에도 밑줄긋기 제한 없애 달라고 문의는 넣었는데 어찌 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2017-03-13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13 02:08   좋아요 2 | URL
예전에 옮겨 적었던 게 아직도 퍽 와닿으니 제가 성장을 안한 건가, 헤르만 헤세가 참 잘 썼나 헷갈리는데 아무래도 후자겠죠. 그간 공부 제법 했는데ㅎ!

북프리쿠키 2017-03-13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대미술이라고 해야할까요
글도 멋집니다^^;

AgalmA 2017-03-13 09:01   좋아요 2 | URL
어젯밤에 알폰스 무하 그림들 보며 나는 한참 멀었어 눈물을 닦았다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