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 펜, 파스텔, 소요시간: 50분 ※펜을 쓴 것은 매우 실수였다. 돌이킬 수 없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동화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은 그런 것들이 가득 담겨 있는 보석상자다. 나는 그런 보석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그림을 그리듯 이야기를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걸 발견하게 된다.

 

 

 

말(馬)이 없는 마을

 


빨간머리 앤이 살고 있을 법한 작은 마을이 있다.
앤은 없지만 이 마을의 아이들도 늘 책을 읽는다.
아버지가 스님이었던 C는 헤세를,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린 A는 세르반테스를 읽고 있었다.
그들의 형, 언니들은 도스토옙스키나 체 게바라를 읽었다.
그저께는 A의 삼촌이 죽었다. 사거리 시내에서 갑작스럽게.
그 포즈는 알베르 카뮈 같았다고 했다.
하필 너무 시적인 사람이 목격자였다.
C와 A는 그게 어떤 포즈였을까 이야기하며 걸었다.
아직까지 그들에겐 죽음은 시적인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는 중 A와 C는 동시에 한 곳으로 시선을 멈췄다.
곰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튼튼한 다리로 거뜬히 물살을 가르며.
A와 C는 들고 있던 책을 꾹 움켜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조용한 6월이었다.
C는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ㅡ 한 번쯤 돌아봐 줘도 좋을 텐데.

A는 곰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ㅡ 우리에게 달려오면? 너는 아파서 도망도 가기 전에 숨차 죽을걸
C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A를 힐긋 보고 말했다.
ㅡ 너, 내가 얼마나 빠른지 알게 될걸? 하지만 죽진 않을 거야. 곰이 우릴 죽일 이유가 없잖아.
곰의 모습이 숲 속 나무 사이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자 A는 말을 이었다.
ㅡ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어, 조각을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얄지 잘 모르겠어.
C는 A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이 흐트러진 채 대충 대꾸했다.
A도 그 시선을 좇으며 말을 이었다.

진규 馬頭 조각 본 적 있어?
C는 다리 난간쪽으로 발을 떼며 말했다.
ㅡ 어, 아니, 잠깐.
C는 다리 아래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 떠내려 보낸 하얀 종이배였다.
어느 마을이나 그렇지만 이 마을 강가에도 온갖 것이 떠내려 왔다.
먹을 것이 담겨 있던 갖가지 포장지, 살이 부서진 낡은 우산,
어느 아기의 알록달록한 장난감, 누군가의 신발.
어느 날은 하구에서 젊은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형사들이 다녀갔지만 그 일은 물에 젖어버린 채 지나가 버렸다.
C는 그런 강가의 온갖 것들을 찍었다.
ㅡ 곧 여름이 오니까 떠내려 오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어. 올핸 어떤

사진들을 찍게 될까, 그런데 아까 뭐라고?  馬頭라고?
A는 C를 흘겨보곤 웃으며 말했다.
ㅡ 아니, 코뿔소라고 했어!
A는 미셸 투르니에가 얼마나 말 예찬론자인지 흥분하여 떠들었고,
C는 평생 말 한 번 못 타보고 죽을 거 같다고 짐짓 걱정스레 말했다.
말이 한 마리도 없는 마을은 이른 여름의 숲 냄새로 가득하고 그들은 스스로 차려 먹을  저녁식사를 위해 집으로, 집으로.

ㅡ 落馬하는 돈키호테

A는 자신이 만들 첫 조각의 이름은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랫동안 잊혔다.
내일은 또 다른 이야기로 그들은 이 마을에 살고 있을 것이다.

 

 

ㅡ Agalma

 

 

권진규(1922-1973, 자살)

"마두"(1969 / 34x58x20 /테라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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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7-02-01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이 그리시는 초상화.. 상상해봅니다...오랜만의 포스팅이네요...

AgalmA 2017-02-01 11:13   좋아요 2 | URL
예, 안녕하세요.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서재는 좀 뜸했는데 그래봐야 일주일도 안된 걸요ㅎ;
초상화 그리기 저는 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제 초상화는 더더욱ㅎ! 제 얼굴을 보며 거듭 지리멸렬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ㅎ;; 언젠가 제 사진을 매일 찍어본 적 있죠. 서글퍼서 그만뒀어요ㅎ...

[그장소] 2017-02-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이 글 직접 지은 이야기 인가요? 흥미롭네요 . 이야기가 , 어디로 튈지모르며 돋는 빗방울같아요.
^^
아아..그 2월 오고 말았네요 . 그쵸?

AgalmA 2017-02-01 10:34   좋아요 2 | URL
네. 한 10년 전에 10분 만에 지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제 글쓰기를 돌아보게 되네요ㅜㅜ
2월은 또 3월도 데려 올테고,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ㅎㅎ;;

[그장소] 2017-02-01 10:4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앜 ㅡ 친구네 집은 둘째치고 신발이나 ...( 끙 ~ )
Agalma 님은 요즘 돌아보시죵? 전 매번 매번 한계를.찍는 느낌 .. ㅋㅎ( 자랑이닷!!)
어찌 안그럴까..10분만에 재미진 구성의 이야길 도깨비 방망이 처럼 두들겨 내 놓는 분이 계온데~~^^♡

cyrus 2017-02-01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귀중한 보석처럼 소중히 잘 간직해서 추억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거의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몇 십 년 동안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추억의 보석이 한순간에 돌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죠. 그럴 때 정말 안타까워요.. ㅎㅎㅎ

AgalmA 2017-02-01 11:39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그런 경험 많아요. 이런저런 얘기하면,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답이 돌아오면 ㅜ_ㅜ.... 뭐, 그런 거까지 기억해 하면 더 비수;;

sslmo 2017-02-01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진규, 고딩땐가 미술 책에 나왔었죠.
친구의 얼굴.
덕수궁에 그거 보러 몇번 갔었던 기억이~^^
좋네요~^^

AgalmA 2017-02-01 17:35   좋아요 0 | URL
권진규 마두도 교과서에 나왔던 거 같은데요? 특별 전시할 때 못 가서 아쉬웠음요. 한국 조각가 특별전 같은 거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해외 유명 작품만 조명 때리지 말고.

yureka01 2017-02-0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무척 귀여워요^..^/

AgalmA 2017-02-01 17:37   좋아요 0 | URL
이번 그림은 촌스러움의 귀여움이랄까요ㅎ; 최민식 사진작가의 골목길 아이들 분위기 은근 바랐는데 실패!ㅜㅜ

겨울호랑이 2017-02-0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고유명사에 많은 내용이 압축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만 해봅니다. 이야기의 이해는 다음으로 넘기고, 순정만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 즐겁게 감상하고 갑니다. Agalma님 따듯한 하루 되세요^^:

AgalmA 2017-02-01 17:40   좋아요 1 | URL
즐겁게 감상해 주신 걸로도 감사하죠^^ 담엔 스토리에 맞춰 그림을 그려봐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17-02-0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AgalmA 2017-02-03 16: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pek0501님. 울적해서 그림 취미생활 몰두 중이죠^^; pek0501님 취미생활은 잘 진행되어 가고 계신지... 무용으로 건강은 더 좋아지실 거 같으니 하길 잘했다 하시겠지요 :)
 
불가피한 슬랩스틱 - 친구를 위한 BGM 2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리뷰를 정리해야지 맘이 편할 거 같아 어머니에게 혼나면서 귀성길을 미뤘다.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한가 하면 잘 모르겠다. 가지고 갈 책이 기대되면서도 한편 맘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아아, 책은 미니 감옥 같다. 미니라고 하기엔 무게가 상당;;

 

 

읽기 시작한 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에드워드 S. 케이시 《장소의 운명》은 모두 놀라운 책이다. 두 사람 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밤과 장소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경위를 밝히는데, 우리는 참으로 모르는 게 많고 그보다 더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두 책 다 밑줄 긋기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느 걸 가져가야 하나 고민이다ㅜㅜ;; 안 가져가면 내려가서 내내 궁금해할 테니 말이다.   

 

 

흡사 바슐라르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로저 에커치의 유려한 문장을 보라!

"예민한 눈으로 보면, 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간다. 계곡에 먼저 나타난 그림자가 산중턱의 경사를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해 빨아올리기'(sunsucker)라고 알려져 있는 저무는 햇살은 마치 다음날을 위해 빨려 들어가는 듯 구름 뒤로 빛을 쏘아올린다."  

 

 

 

 

 

장소에 대한 수많은 개념 정리와  멋진 인용들로 가득한 에드워드 S. 케이시의 글은 또 어떻고!

"그러므로 뭔가를 생각하려 할 때, 그것을 어떤 장소 내에서 생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ㅡ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렇게 경계했다. "사람은 목적이 없기보다는 차라리 공허를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

 

 

 

 

 

어쩌다 보니 제임스 글릭 《카오스》를 읽게 됐는데, 이런 책을 사놓고 당장 읽지 않았던 것이 매우 후회됐다.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소화할 내용이 많아 힘들지만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거 같다. 과학이 왜 점점 더 예술과 문학의 상상력을 넘어서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수학과 기하학의 역할이 더 크긴 하지만 카오스 이론은 특히 더 그렇다.  

최근 제임스 글릭의 새 책《인포메이션》 나왔던데, 내가 제임스 글릭을 읽어야 할 때라고 우주가 알리는 신호ㅎ! 제임스 글릭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후속작을 무조건 읽게 된다는 것에 500원 건다~ 문장력, 문학성, 서사성, 전문성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너무하잖아ㅎㅎ;

 

 

 

 

명절 때마다 친구를 위한 BGM을 틀어놓고 갔는데, 이번에 안하고 가자니 좀 (나만) 섭섭한가 싶어서 몇 곡 올리고 간다. 

늦었어, 늦었어. 앨리스의 토끼처럼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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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7-01-2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구입해야겠습니다!
설 잘 쇠고 오세요. 올려주신 bgm들도 하나씩 들어보면서
오늘 하루 보내야겠어요.

AgalmA 2017-01-31 09:31   좋아요 0 | URL
ㅎㅎ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읽으며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생각도 했는데, 기원과 현상에 대한 추적은 언제나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몰리님이 바슐라르에 대한 어떤 글을 완성하실지 개인적으로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아의서재 2017-01-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한 추천의 멘트에 저도 구매버튼 누립니다. 설 명절 잘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AgalmA 2017-01-31 09:37   좋아요 0 | URL
달걀부인님, 안녕하세요^^ 어떤 책을 장바구니로ㅎㅎ?
<장소의 운명>은 제 개인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으나 사람들이 좀 지루해 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권유까지는 못 하겠다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ㅎ;
제임스 글릭 책은 과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인간의 지식과 상상력에 대한 많은 질문 거리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읽으면 무조건 득이 된다에 한 표^^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는 밤에 대한 백과 사전이라고 소개되는데, 흑백이긴 하지만 삽화들도 많고 이야기들도 풍부해 소장 가치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1-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함께 즐거운 설 명절 보내세요.^^

AgalmA 2017-01-31 09:38   좋아요 0 | URL
체하고 탈이 나서 책과 그리 잘 지내지 못한 거 같아 슬픕니다ㅜㅜ
북다이제스터님은 명절에 책과 어찌 지내셨나 곧 구경 갈께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1-31 21:19   좋아요 0 | URL
즐거운 명절에 아프셨군요. ㅠㅠ

해피북 2017-01-27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귀성길 까지 미뤄가며 작성하는 페이퍼. 왠지 주책 맞게 뭉클하네요. 특히 밑줄긋기 경쟁해가며 읽던 책을 고르셔야 한다니 과연 승자는? ㅋㅋ

오늘 길이 미끄럽다고 하던데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AgalmA 2017-01-31 09:40   좋아요 0 | URL
승자는 <장소의 운명>이었습니다. 도서관 반납이 코앞이어서ㅎㅎ;

설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따뜻한 데 있다가 서울 오니 몸시 춥네요ㅎㅎ
건강 조심하시길요. 해피북님^^

겨울호랑이 2017-01-27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설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galmA 2017-01-31 09:43   좋아요 1 | URL
이번 설연휴로 새해 인사는 거진 다 마무리된 거 같죠ㅎ? 날이 쌀쌀해 감기 조심 인사는 계속 되어야 할 거 같고ㅎㅎ
겨울 호랑이님도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연의는 세뱃돈 많이 받았을라나~

겨울호랑이 2017-01-31 09:47   좋아요 1 | URL
네^^: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연의는 세뱃돈으로 보석 반지 사겠다고 복주머니 돌리고 다니네요. ㅋ 벌써 귀금속투자라.. 복부인의 기상이 느껴져 재복은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Agalma님 추운 날 건강하게 보내세요^^:

AgalmA 2017-01-31 10:02   좋아요 1 | URL
ㅋㅋ 연의 너무 귀엽네요. 흐뭇한 인사와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의 얘기 들으면 하루키 캥거루 통신 같이 유쾌해져요ㅎㅎ

서니데이 2017-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가지고 가면 무겁지 않을까요.
멀리 다녀오시나요.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어머님 뵙고 맛있는 음식 드시고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

AgalmA 2017-01-31 10:12   좋아요 0 | URL
많이 읽지도 못할 거면서 매번 책 욕심 부리는 저를 말릴 수가 없어요ㅎㅎ
배탈이 나고도 맛난 거를 놓칠 수 없어 까스명수 먹으며 엄청 먹듯이ㅋㅋ 아, 미련바보 Agalma여...
서니데이님은 설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yureka01 2017-01-2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연휴,,즐거운 시간 되시구요..리뷰하나 하기도 벅찬데 두개 연거퍼..^^...잘 읽겠습니다.~~^^..

AgalmA 2017-01-31 09:49   좋아요 0 | URL
정성스레 차례 음식차리듯 이 페이퍼 차려 놓고 갔는데, 이제 보니 오타에 비문이 보여 민망하더군요ㅋㅋ 글을 쓰다보면 늘 만나는 이 시련, 언제쯤 만족할 수 있을지...ㅎ;
연휴 잘 보내셨어요^^? 한겨울 뱃살의 열기로 사는 거 같아 고민되는 참입니다ㅎ;

2017-01-30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31 09:50   좋아요 0 | URL
제가 있던 곳은 남쪽이라 전혀 모르고 지냈습니다. 올라오니 눈덩이, 얼음덩어리에 허걱;; 추워서 금방 우울해지더군요ㅎ; 북쪽 지방에서 오래 못 살 위인;

씩씩하게 살아봐야지 또 각오하며....

새아의서재 2017-02-01 0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둘 다요. 특히 ‘장소‘에 대해서 저도 좀 찾고 있는 바가 있어서..우선은 담아놓았어요. 겨울에나 잀을 수 잇을듯 싶은데... 늘 제가 필요할 만한 책 이심전심 추천해 주셔서 감사해요. ㅋ

AgalmA 2017-02-01 09:4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공간과 장소에 대한 것은 제게 늘 관심거리라 찾아보죠^^
케이시는 장소와 공간 개념의 구분을 강조하긴 하는데,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인간과 공간>,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도 참고할 만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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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자기 구축의 과정이라는 것. 종교, 특히 기독교의 속죄 메커니즘은 그걸 정확히 파악했고 죽는 순간까지 종부성사로 만족시키며 죽은 후에는 천국까지 보장해 준다. 지옥행은 계약자의 잘못으로 인한 보험 손실처럼 말한다. 종교는 자기 구원의 안정된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희망을 송두리째 내다 버리는 행위 같은 진화론에 대해 창조론자들이 분노하는 게 이해된다.

인류에겐 다른 존재 방식도 있다. 종교의 말씀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게 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자기 구원을 찾는 행위가 있다. 연금술은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과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적 부활로 확대된다(“너희들 스스로를 죽은 돌에서 살아 있는 현자의 돌로 변신시켜라.”).

푸코가 자기 배려라는 표현하며 분석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아니다. 고정불변의 형상으로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자기 바깥의 활동(놀이, 창조)을 통해 스스로를 생각하고 행복과 평화를 얻는 형성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을 관조할 때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의 흥미로운 사례들을 살펴보자. 서기 42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재론으로, 1888년 말~1889년 초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로 자신의 책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재차 분석했던 일, 후기 인상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1867~1947)가 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계속 손봤던 행각, 존재하지 않는 책을 설명하는 조르조 망가델리 새로운 해설과 파솔리니 석유, 말라르메 의 메모지와 문장들의 재배치로 책을 낸 자크 셰레의 말라르메의 》, 1927년 프란체스코 모론치니가 자코모 레오파르디 시집 《노래》에 대한 평과 주석, 시의 수사본, 시의 수정사항과 메모와 초안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여준 것  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 반영[*]이면서 획일성을 거부하는 재창조 과정 속에 주체이자 저자가 지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매우 역설적이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쓴 자기 반영에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스스로의 존재 속에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성향)와 욕망으로 정의한 스피노자의 해석도 포함된다. 아감벤은 창조 행위의 잠재력에서 이 표현을 썼다. )

 

어떤 잠재력을 관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작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관조를 통해 작품은 해체되고 무위적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에 의탁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화가, 시인, 사상가는(일반적으로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창조 활동과 작품의 저자라는 이유로 주권을 지닌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름 없이 살아간다. 언어가, 시선이,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매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관조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험을 시도하고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삶의 형태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다.(p218~219)

 

(신비, 잠재력)과 글(서사, 창조행위)에 대한 핵심적인 설명이며 창조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아감벤의 의견과 그가 쓰는 개념(저항, 무위, 잠재력)들을 이해하고 동참해야 접근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는 윤병언 번역가의 말에 동의한다.

노발리스는 철학에 대해 하나의 회상이라고, 아감벤은 문학에 대해 잃어버린 신비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노년의 아감벤이 강연 속에 남긴 말들은 그리고 책이 된 이 언어들은 내게 신비와 침묵 사이에 만들어진 오솔길을 보여주고 있다. 문맹자를 위해 시를 썼다 말하는 세사르 바예호나 수용소에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 증언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 글을 썼다고 말하는 프리모 레비를 예로 들었듯이 아감벤 또한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향해 가는 철학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호모 사케르를 읽을 때는 감지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도 그의 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역사를 탐구하는 일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사실상 동일한 행위라면, 작가 역시 하나의 모순된 과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변함없는 자세로 오로지 문학, 불의 상실만을 믿을 줄 알아야 하고 그가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대가를 치러야 가능한 일이지만, 망각의 바닥에서 사라진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빛의 조각들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p18)

 

마지막으로 그가 학자연한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글로 갈음하며 이 리뷰를 닫아야 할 거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이 되지 않으려면.

 

철학의 말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철학이 어떤 지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일종의 무지에 대한 의식에서, 즉 모든 종류의 앎과 기술의 유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삶과 지식 분야에 느닷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스스로의 한계와 충돌하도록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강렬함이다. 철학이란 모든 지식과 학문 세계에 공표된 하나의 예외 상태를 말한다. 이 예외 상태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진실이란 이름이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한 명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이다. 우리는 진실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단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109)

 

 

※ 조르조 아감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2012년 12월 로마의 중소 출판사 도서 박람회에서)와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2010년 베네치아의 치니 재단에서) 강연 내용은 사사키 아타루 저작과 공통된 관점(독서의 불가능성, 문맹에 대한 고찰과 기독교로부터의 책의 탄생과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noesis, 생각하는 행위)는 생각의 생각이다(noeseos noesis)". ㅡ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지성은 잠재력 외에는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지성이 생각하기 이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ㅡ 아리스토텔레스《영혼에 관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들의 예들이 대부분 인간의 기술과 지식의 영역에서(문법, 음악, 건축, 의학 등등) 발견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인간이 ‘능력’의 차원에서, 즉 능력과 무능력의 차원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원천적인 차원에서 무능력과 일치한다. 인간이 무언가로 존재한다거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축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결핍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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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1-2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유는 메타-씽킹이군요. ^^

AgalmA 2017-01-31 09:59   좋아요 2 | URL
조르조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이중적 해석‘을 재미나게 풀어놓고 있죠. <형이상학>에서는 사유를 하나의 행위로, <영혼에 관하여>에서는 하나의 잠재력으로 말하고 있는데,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드러남으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 할 텐데요. 드러난 사유 활동을 통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자유롭고 무위적인 잠재력도 같이 발견됩니다.
이건 질베르 시몽동의 표현과 맞닿지 않나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두 단계의 존재, 즉 무분별하고 무인칭적인 요소와 개인적이고 사적인 요소 사이의 변증법에서 기인하는 두 단계의 존재˝.
무인칭적인 잠재력과 개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상태, 이 두 상태의 끝없는 순환과 공존의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감벤은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유가 스타일이다

플로베르의 말을 김화영 번역가가 해설에서 정리했듯 작품은 스타일의 힘으로 지탱되어야 하지만 그 힘은 생각과 혼연 일체가 됨으로써 생겨나는 <내면적 힘>"이다. 로베르 마담 보바리에서 내가 눈여겨 본 스타일자유로운 시점 이동 생략의 묘사플롯이다.

 

소설을 써본 사람은 알 텐데 내 생각엔 의식의 흐름기법보다 효과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여러 시점을 병행하는 게 더 어렵다. 여러 시점을 쓰더라도 장이 바뀔 때 화자를 바꾸지 보통 같은 장에서 시점을 잘 바꾸지 않는다. 전개가 난삽해 보이지 않으려면 치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1(1856년 탈고)에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니 신선하다. 플로베르는 첫 문장에서 1인칭 복수형(우리) 시점으로 시작해 샤를르 보바리를 소개한다. 그의 특성을 관찰하게 하는 멋진 장치다. 3부 마지막 장에서 남은 이들의 삶을 차갑게 보여주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 이르기까지 흥미롭게 변주되고 있다.

 

묘사와 플롯은 찬탄이 절로 나온다. 마담 보바리가 재판에 회부된 요인 중 하나인 풍기 문란죄에 해당하는 마차 장면은 구체적인 내부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시내를 내달리는 마차와 창밖으로 내민 손으로 정황을 극대화한다. 엠마(보바리 부인)와 로돌프가 숲 속에서 처음 갖는 정사 신도 정황만 암시된다.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을 안 보여 주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속물이라고 평가하며 소설을 읽고 있을 독자의 속물적 욕망을 플로베르는 채워주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의 백미를 플로베르가 가장 공들인 농사 공진회 장면으로 꼽고 싶다. 군중들의 각양각색의 모습 속에서 상류층 인사의 허례적인 연설과 보바리에게 루돌프가 수작을 거는 말을 교차편집특별함과 우스꽝스러움의 대비를 고조시키고 있다.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세기에 걸친 노예 생활의 보답으로 상을 받는 시골 노파의 모습과 부르주아 로돌프가 즐기다 버릴 생각으로 엠마를 유혹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은 정확히 상응하고 있다. 두 번째 백미는 알다시피 레옹과 엠마의 노트르담 밀회에서부터 이이지는 마차 장면이다. 마차의 질주와 정사가 역시 상응하고 있다.

 

 

 

숙명의 문제인가 선택의 문제인가

쥘 드 고티에의 명명으로 보바리즘(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잃고 수도원에서 소녀 시절을 보낸 엠마는 낭만적 소설을 읽으며 허영과 환상의 세계에 빠져 현실의 욕구 불만을 그릇되게 풀어가다가 수많은 실패 속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과연 그녀만 그럴까. 엠마의 내면은 전혀 볼 줄 모르면서 자신의 일과 가정 속에서 행복하다고 믿은 샤를르? 자신의 재력으로 여성 편력을 재미 삼아 살아가는 로돌프?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엠마를 천사로 만들고 사랑하다 장래를 생각해 그녀를 버린 레옹? 오로지 돈의 축적만 노리며 악랄한 고리대금업으로 사업 확장만 생각한 뢰르? 종교에 맹목하면서 고지식한 훈계를 늘어놓는 부르지니엥 신부? 과학과 진보를 부르짖지만 권력과 이익을 계산하기 바쁜 약제사 오메? 그들은 보바리즘적 인간이 아닌가? (자꾸 바보리즘이 나오려고 하네;)

욕망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딜레마이다관건은 어떤 선택이 아니라 선택 뒤 어떤 반성적 삶을 사는가이다. 엠마의 잘못은 선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의 엔트로피로 치닫기만 했다는 것.

 

 자코 반 도마엘 영화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2009)는 플로베르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다. 9살 니모는 부모의 이혼을 겪게 되는데, 부모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아버지를 선택했을 때는 우울 장애 앨리스를 사랑하게 되고 다큐멘터리 진행자가 되는 인생, 앨리스에게 차여 사랑하지 않는 진과 결혼해 오로지 성공을 목적으로 사는 공허한 인생, 어머니를 선택했을 때는 새아버지의 딸 안나를 만났다가 헤어져 오랜 이별 끝에 사랑에 성공하게 되는 인생.
세포 재생 기술이 개발되었음에도 2092년 니모는 118세로 자연사를 선택하는 최후의 인간으로 이슈가 된다. 그에겐 수수께끼가 있는데 자신의 진짜 인생을 알지 못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데 그가 말하는 어떤 인생에서든 그는 34살에 이미 었다.

 

앨리스를 만난 인생에서는 그녀의 유골을 뿌려주기 위해 탄 화성행 우주선과 운석의 충돌로, 진과의 인생에서는 권태를 모험으로 풀려 했기에 암살로, 안나와의 인생에서는 수영장 관리사까지 했으면서도 익사로, 그가 선택한 인생이 부른 죽음의 모습이다. 매우 도식적일 수 있지만 감독은 니모와 관객의 선택 범위를 확대시켜 놓았다. 현실적으로 보면 니모의 이 많은 기억은 치매에 따른 혼란 증상일 수 있고, 평행우주 개념으로 보면 동시에 다른 세계를 산 그의 여러 삶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9살 소년의 니모 시점으로 보면 아직 선택하지 않은 미래상일 수도 있고, 15살 니모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세계일 수도 있다는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고 가능성은 다양하다. 마담 보바리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엠마의 삶이 다르게 풀릴 수도 있었다. 운이 나빴다거나 여성이어서라거나 시대가 그랬다고 말하기보다 나는 인간의 근본적 슬픔을 생각해본다. 19세기 엠마의 고민은 인과율이었다. 그녀는 과거를 되돌릴 수 있길 얼마나 바랐던가. 아직 많은 가능성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소녀 시절, 샤를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가능성하나의 선택 뒤 파국으로 치달아가기만 한 선택들. 21세기 니모도 불우한 어린 시절과 안타까운 사랑,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지만 엠마와 달리 모든 인과를 경험해본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거를 되돌리기도 하면서 가능한 삶을 다 살아봤고 결국 모든 선택이 다 의미 있었다고 긍정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자는 말은 단순한 결론이다. 카오스(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나비 효과)나 비둘기 심리이론[*]처럼 선택에서 확률적 변수는 늘 존재한다.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지만 샤를르가 맞는 비극이 바로 그런 예이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인간이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 몰두하는 배우이며 등장하는 시간과 퇴장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엠마는 자신의 출생을 정할 수 없었고 니모는 자신의 부모를 골라서 태어났다. 엠마는 자살을 택했고 니모는 자살 같은 자연사를 택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죽지 않을 수 있는데 죽음을 택하는 게 우리의 유일한 진짜 선택인지도 모른다. 우유부단하고 생각 많았던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로 그토록 고민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수축되어 빅 크런치 끝난다는 종말론이 아니더라도 삶을 알아갈수록 존재는 종국엔 소멸로 가는 거 같다. 다만 엠마와 니모, 플로베르와 자코 반 도마엘의 비교처럼 우리의 사유, 스타일, 태도가 다양해진다고 봐야 하겠다. 22세기 인간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 당신은?

 

 

 


 

 

[*] 비둘기 심리이론: 행동심리학자 스키너의 심리 상자 실험을 통해 잘 알려진 예로, 날개를 퍼덕이거나 버튼을 누를 때 먹이가 지급되면 비둘기는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나 비둘기의 선택으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나타날 근거는 없다. 불확정성원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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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1-23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느냐 사느냐ㅡ이대로냐 아니냐 ( 창비 판 ) 이 넘 잘 어울리는 구절이네요 . 죽느냐도 어울리지만 이대로냐 ..아니냐~ 내쳐 말아먹은 인생 내내 망할까, 아니면 돌아서 이제까지를 바꿀까 ...ㅎㅎㅎ
넘 재미있게 잘 읽고 가요!^^

AgalmA 2017-01-23 22:44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이 재밌다고 하시면 재밌는 거 맞는 듯ㅋㅋ 저도 쓰면서 재밌었걸랑요~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이대로냐 아니냐 비슷한 대사가 있는데,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라는...

[그장소] 2017-01-23 22:56   좋아요 1 | URL
그 영화 볼까 말까 ㅡ 하고 있었는데 , 봐야겠군요! 당장~~! ^^

후애(厚愛) 2017-01-23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조심하세요.^^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시구요~

AgalmA 2017-01-23 22:3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후애님도 감기 안 걸리게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날이 추워서 웅크려 다니니 몸이 여기저기 결리네요^^;; 스트레칭을 잘 해줘야 될 거 같아요~

시이소오 2017-01-23 2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는 보봐리다‘라고 외치고 싶게 만드는 페이퍼네요.

재독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글입니다. ^^

AgalmA 2017-01-23 22:40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는 바바리맨이다~ 장난치고 싶네요ㅎㅎ

너무 재밌어서 몰아쳐 읽었어요. 놓친 게 많을 겁니다. 재독하면 또 무엇이 보일까 기대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1-23 2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평집 내셔야 합니다. 글 넘 좋습니다. ^^

AgalmA 2017-01-23 22:43   좋아요 2 | URL
예?(채사장 버전) 마담 보바리와 미스터 노바디를 연결하며 분석해보는 작업이 너무 재밌었어요. 이런 글은 읽는 사람보다 제가 더 재밌죠ㅎㅎ 자유로운 생각회전 이런 맛에 글을 쓰는 거 같아요^^

북다이제스터 2017-01-23 22:57   좋아요 1 | URL
미스터 노바디는 저도 작년 챙겨 본 영화인데, 좋았습니다. ㅎ 평행 우주론은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

물고기자리 2017-01-24 0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글을 굳이 읽고 답글을 남겨 주신 덕분에 저도 아갈마 님의 멋지고 훌륭한 리뷰를 감상했습니다!!^^

카프카나 플로베르처럼 치밀한 머리형 작가들에겐 비슷하게 숨 막히고, 비슷하게 경탄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카프카가 플로베르를 그렇게 격찬했다죠 ㅎ)

직관적인 예술가 유형의 글은 심상으로 바로 흡수된다면, 플로베르나 카프카의 글은 구체적인 문장으로 기억나요. 지금도 계속 생각나고, 맴도는 문장들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서 스스로 숙성되게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위대한 작가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언젠가 <감정 교육>을 시도해볼 생각인데 거기에서 또 만나게 될 것 같네요^^

AgalmA 2017-01-24 01:04   좋아요 2 | URL
맞아요 맞아요^^ 이미지 글쓰기 유형은 말씀처럼 바로 스며들어서 아, 좋다 하고 굳이 글로 캐고 싶지 않은 맘도 들어요^^ 반면 끝없이 조탁한 글 보면 그 열정에 화답하고 싶어 글을 쓰고 싶기도 하죠. 하루키의 따라하고 싶게 만드는 묘사와 문장 생각하면 그도 위대한 작가 반열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고양이라디오님 서재 갔다가 하루키가 문단 사람들 속에 있느니 투구벌레와 씨름하는 쪽이 더 낫다라고 표현한 거 보고 바로 연상되어 싱글싱글 웃었죠ㅎㅎ 꿈에도 나올 거 같음ㅎ!
저도 <감정교육> 준비한 터라 곧 만나겠네요^^/
프루스트가 플로베르의 어떤 걸 좋아하고 영향받았는지도 어렴풋이 보이고 플로베르 더 읽어보면 더 잘 알겠죠. 재밌어요~

서니데이 2017-01-26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학과 지성사(이하 문지) 책을 찾아 사진을 찍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사진을 찍고 나니 저기 또 한 권이 발견되고, 돌아보면 여기 또 한 권이 있고. 추려보니 80여 권 정도 되었다. 중고로 판 책도 많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도 많으니 문지 책을 적게 봤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어쩌면 이벤트 성격에 맞지 않는 쓴소리가 될지 모르겠다. 내 애정을 알아주길 바랄 뿐. 문지 책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다른 출판사 책일 때가 많았다. 왜 그랬을까
   

 


모인 책들을 보며 나를 돌아보기보다 문지 특징을 더 생각하게 됐다. 문지의 주력 분야는 시집일 것이다. 그간 독보적인 시인들이 문지를 통해 많이 소개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문지보다 다른 출판사 시집을 더 많이 본다. 그 변별점으로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새로운 수혈이 되고 있는가? 어려운 시인들의 입지를 보조해주는 역할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구축한 색깔 속에서 정체된 인상이라면? 문지 시집을 통해 인상적으로 만난 시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래 주길 바란다
     
 

  


    

 

 

 

 

 

 

 

 

 

 

 

 

 

 

문지 소설 분야에서는 독특한 작가를 찾아내 소개하는 뛰어남에 감사할 때가 많았다. 내 책장에는 없지만 한유주 작가 책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머리를 때리는 얼음물 한 잔을 마신 듯했다. 박상륭, 파스칼 키냐르,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로버트 M. 피어시그, 프랑수아 라블레, 로렌스 스턴 같은 무시무시한 작가들의 책 소개는 또 어떻고! 2001년 시작된 대산 세계문학 총서에 관심이 많았는데 최근 출간되는 책들을 보면 기대에 못 미친다. 지성을 지키고 가꾸는 노력도 좋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지 않으려면 더 많은 독자가 관심을 가질 책들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반영해야 하리라고 본다. 독자에게 책을 사달라 하소연만 할 일이 아니다.    

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는 집중해서 다 읽을 수 있을 때 꺼내려고 때묻을까봐 비닐에 싸서 곱게 보관하고 있다ㅎ;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는 작지만 알찬 책들이라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은 시리즈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없는 세대,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오노레 드 발자크 《사라진느》 등  소품이지만 기억할만한 작품들이 많다. 이성복 시인의 원래 시집들보다 나는 이 시리즈에서 나온 정든 유곽에서편집본을 더 좋아할 정도절판된 게 많아 아쉽지만 이 시리즈는 도서관을 이용해서라도 틈틈이 챙겨서 보고 싶어진다.

 

이름 때문일까.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도 있지만 문학과 지성사의 스펙트럼은 문학과 인문의 자장 안에서만 머문다는 느낌이 많다. 다양한 학문과 기술이 치열하게 교류하고 엮이는 지금 시점에서 문지가 매우 고심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출판 시장이 어려워진 만큼 그래서 더 고민할 지점이다.
 

 


근래 문지에서 나온 책 중에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셰익스피어 전집이 가장 내 관심 책인데, 전자는 읽으려는 내 노력이 더 필요할 거 같고(책 소개를 하도 많이 받다보니 흥미가 좀 떨어져서..) 후자는 내 비용 투자가 더 필요할 거 같다(넘 비싸!);;

 

 

 

 

 

 

 

이제는 직접 사서 읽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책도 있다. 아도르노와 메를로-퐁티. 어렵지만 깨달음의 순간을 전해주는 문장들을 나는 늘 잊지 못했다. 오래 걸리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결국 잃을 것이지 않은가.

 

 


 

 

문학과 지성사에 대한 내 관심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으라, 어디든!*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기형도 詩 '비가 2' 중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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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1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21 01:17   좋아요 1 | URL
당연히 그러실 거라 싶었어요^^

2017-01-21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21 07:59   좋아요 0 | URL
일찍 일어났네요^^ 알라딘에서 집에 있는 문지책 사진 찍어 페이퍼 쓰면 적립금 2000원 주거든요. 500명한테 주니 글쓰면 거의 받는다고 봐야죠ㅎㅎ 북플로는 안되고 서재 통해 글쓸 때 이벤트 체크 박스 보일 거에요.
님도 해보세요^^ 정이현 작가 책도 많이 팔린 걸로 아는데 어째 이벤트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안보여요? 적립금이 적어서 그런가ㅋ 적립금 못 받아도 그리 섭섭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참에 책정리해보는 재미가 있었죠^^
즐주말 되시길^^/

겨울호랑이 2017-01-21 0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속사에 속한 아이돌을 모은 느낌이 드네요.. SM Town 같은 느낌? ㅋ Agalma님께서 문학과 지성사 시집과 소설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세익스피어 전집가격에 놀라고 갑니다^^:

AgalmA 2017-01-21 07:51   좋아요 0 | URL
그렇죠ㅎㅎ 문지 성격을 대략 알았지만 책을 모아보니 좀 구체적으로 알게 되더라는^^ 한국문학 많이 읽는 분은 저보다 더 많이 소장하고 계실 듯~
시집은 출판사별로 꽂아 두는데 보고 있음 정말 훈훈하죠^^
셰익스피어 너무한 가격 아님까ㅜㅜ

2017-01-21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1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2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를 모으는 중입니다. 요즘은 잘 안 나와서 아쉽습니다.

AgalmA 2017-01-22 21:14   좋아요 0 | URL
저도 중고로 나오는 거 있음 사려고 하는 편인데 금방 사라지데요ㅎㅎ 이렇게 오랫동안 안 나오는 거 보면 그만 내겠다는 뜻인지도 모르죠. 요즘은 인문 교양서가 많이 나오기도 하는 터라 예전처럼 소개 차원으로 짧은 분량으로 내는 게 경쟁력 있다고 볼 수도 없고...

아무 2017-01-21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없는 세대>는 알라딘 외 다른 서점은 품절인 걸로 알고 있어요. 지난 번에 이 책 같이 읽자는 분이 있어 찾아봤는데..ㅠㅠ
문지 책이 한데 모아봤을 때 더 예뻐보이는 것 같아요. 문지 특유의 책등 디자인을 제가 좋아하거든요. 붉은 띠가 쭉 이어지는 느낌이랄까..ㅎㅎ
셰익스피어 전집 가격은 진짜 놀라운데요? 분량으로만 보면 돈키호테 1,2권 합친 것보다 약간 더 많은데..ㄷㄷ..

AgalmA 2017-01-22 23:10   좋아요 1 | URL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도 한동안 품절이다가 요즘은 또 있더군요. <이별없는 세대>도 꾸준히 찾는 명작이라 절판 안 시키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는 안 보지만 필독서류는 알라딘이 다른 서점보다 잘 갖춰놓는 거 같더군요.

문지 붉은 띠, 저도 저 띠에 홀려서 자꾸 사고 싶어지더라는ㅎㅎ 문지 디자인은 모던하면서 무게감 있는 매력이 있죠^^

저 셰익스피어 책은 아무래도 도서관에다가.... 셰익스피어 책은 워낙 많으니 희망도서 신청 받아주려나 모르겠어요ㅎㅎ

2017-01-21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2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7-01-2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첫번째 사진에서부터 허걱!을 외칩니다. 넘넘 근사해요.
전 시집 사진만이라도 올리고 싶은데 넘 적어 부끄러워서.... ㅎㅎㅎㅎ

AgalmA 2017-01-23 10:33   좋아요 0 | URL
감사요/... 창비, 민음, 세계사, 실천문학, 문학동네, 청하, 지만지 기타 등등하면 시집 코너만도 꽤 되죠. 시집 코너는 바라보면 특히 흐뭇한데 공간이 부족해 저렇게 아름답게 꽂아놓지 못해 아쉬워요^^;
저도 좀 부끄러워하며 올렸어요ㅎ 재미삼아 정리삼아 올리는 거지 저도 자랑할 규모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