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화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등 수많은 타이틀은 존 버거(1926.11.5~2017.1.2, 런던 태생)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 누군가 붙인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것처럼. 내가 삶에 그렇듯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방식이 중요했을 뿐.
결국 그는 방식에 대해 무엇을 수긍했을까. 단지 임할 뿐?



  

˝내가 상상력을 발휘해 이 소설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소설이 그렇게 만져 볼 수 있을 뿐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시간의 특징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소설 <G>를 내려다보며...
존 버거, 파스칼 키냐르, 미셸 우엘벡, 필립 로스, 존 파울즈, 곰브로비치 (더더 많겠지) ... 그들은 ‘ 존재가 겪는 섹스(욕망)와 시간과 죽음‘ 사이의 궤적과 밀도를 측정한 작가군일 것이다. 문학의 오래된 주제이지만 그 연결들은 현대에 와서 면밀히 검토되고 있다고 본다. 개인화된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이 피할 수 없이 닿게 되는 지점 아닐까 싶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걷고 있던 그들. 존 버거가 소설 <G>를 부르주아 문화가 와해되어 가며 개인의 욕망이 커지던 1886~1915년 사이로 설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내뱉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암흑. 그리고 각자 발견했던 빛. 다시 어둠.

 

 

 

˝그의 생각에, 미친 사람들은 전부 아니면 무를 요구했다.˝

˝세상의 일 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라.˝(세잔의 말)

˝모든 역사는 동시대의 역사다.˝(R. G. Collingwood)



 

 



모든 것이 내게 전면적인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존 버거 에세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밑줄긋기

 

인간을 뺀 모든 신중한 동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마을은 근년 들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겨울햇빛 아래 멀리서 보면, 마을은 이 세기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 마을은 신비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벙어리 털실장갑을 끼고 바흐를 연주하는 글렌 굴드


기하학이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것을 보려는 태도를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앙리 까르띠에는 말했다.


산 위에 조금만 있어 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발가벗고 살기 때문에.
발가벗은 사람은 또 다른 차원의 동반자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물론 마르셀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밤에 옷을 입고 잔다. 그럼에도 알파주에서 혼자 한 주 두 주 지내다 보면, 영혼은 윗도리를 벗기 시작하고 이윽고 알몸이 되면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의 눈에서 그것이 읽힌다.
영혼은 그렇다 쳐도, 가축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늘 있었다.
두 마리의 개가 소들의 이름을 죄다 알고 있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소가 길을 잃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곳 산에서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 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너무 빽빽해 걷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은 조약돌 사이의 빈틈을 찾는 작은 물줄기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그 물줄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조약돌이 된다. 인구 통계 그래프야 신문에서 보면 되지만, 이런 군중들 속에서는 손등에서 퍼져 나오는 따뜻함과 연료와 배기가스의 냄새, 시멘트 가루와 생선, 예피, 똥 냄새, 플라스틱 타는 냄새, 요오드팅크, 꿀과 식초 등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진 냄새에 의해 장강의 흐름과도 같은 끈질기고 격렬한 생육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 아테네의 오모니아 구역에서, 삶은 제 스스로를 강조하고 있다.  


햇빛에 구운 흙과 돌멩이, 풀, 엉겅퀴, 도마뱀, 조개 껍데기 화석, 또 야생 꽃상추,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그런 후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의 젖은 올리브 잎, 다음날 길을 따라 걸을 때면 발목에 감겨 오는 따가운 이른 오후의 정적, 마치 유년기 그 자체처럼 끝없이 이어지던 이런 일상들, 그것들은 하루와 함께 길 저쪽끝으로 꿈틀거리며 사라진 후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는데, 어느 것 하나도 오래 붙잡을 수 없었기에, 길은 늘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사와 존(사진: 마리사 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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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04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천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galmA 2017-01-04 10:55   좋아요 2 | URL
˝선생님˝을 또 잃고 시작하는 한 해입니다....

이름 2017-01-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기사를 보고 당황스러웠어요. 이제 존 버거의 새 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구요.

AgalmA 2017-01-04 17:28   좋아요 0 | URL
저도 소식듣고 읽지 않았던 그의 책이 퍼뜩 생각나더라고요... 읽을 책이 늘 산더미니 이럴 때 챙겨 보게라도 된 달까.

시이소오 2017-01-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년부터 존 버거의 부음이라니, 왠지 울컥하네요 ㅠㅠ

AgalmA 2017-01-05 02:26   좋아요 0 | URL
존 버거 소설은 에세이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몰라도 많이 몰랐다는ㅜㅜ;
 
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대미학사 / 1993년 9월
평점 :
품절


『 우리는 적절한 순간에 한 인간을 만나고 이 인간에게서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을 취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적절한 순간에 다시 이 인간을 떠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자니 빌로트를 만났고 또한 적절한 시기에 다시 그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주 적절한 시기에 모든 사람들을 떠났듯이 떠났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우리는 자니와 같은 인간의 정신 상태, 그녀의 감정 상태와 정신 상태를 따르고 한동안 이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만을 받아들이다가는 거기서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믿어지면 이 인간과의 관계를 끊는다. 마치 내가 자니와의 관계를 미련 없이 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인간에게서 수년 동안 모든 것을 빨아먹고는 갑자기 우리가 거의 전부를 먹어버린 이 인간이 우리를 빨아먹었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우리는 평생 이 비열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ㅡ 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中 (현대미학사, 1993, 절판, 재출간 미지수)

 

 

■ 장은수 씨가 쓴 ‘베른하르트의 작품 세계‘ 편집 발췌

‘과장의 대가‘, 세계 종말의 희구자‘, ‘알프스의 베케트‘,‘ 自家모독자‘ 등의 별명이 붙어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1989)

그의 작품의 주 경향이기도 한 ‘인간 사회의 치부를 폭로하기 위해 극단적인 욕설과 대담한 조소‘를 서슴지 않았던 그런 정력적 비판가의 이면에, 청년 시절부터 갖가지 폐 질환과 합병증으로 시달려온 병약하고 외로운 삶의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고통과 요양원 생활의 무료함을 잊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던 그가 첫 소설 작품인 <서리>(1963)와 그에 뒤따른 <혼란>(1967)의 발표로 주목된 이래 독어권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읽혔고, 6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프랑스, 이태리 서구 각지에도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었다. 베른하르트 사망 전후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그의 작품이 일 년 365일 공연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의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뷔히너상]을 비롯해 프랑스의 [세귀에 문학상], 이탈리아의 [세계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받는 한편, 수상기관이나 상의 성격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는 이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 공개서한으로 비판적 공박을 가하곤 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1968 그의 소설 <혼란>으로 오스트리아 문학대상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감격 어린 어조의 수상소감을 기대하고 앉아있던 문화계 인사들은 수줍은 청년작가가 내뱉는 어처구니없는 독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엔 찬양할 아무것도 없고, 저주할 것도, 고소(告訴)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수꽝스러운 것이 많이 있을 따름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라는 말로 베른하트트는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이런 세계관의 기본 명제로 시작된 베른하르트의 연설은 곧 오스트리아에 대한 자성적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의 신랄한 비난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게 된 문화성 장관이 격분해서, ˝그래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이오! ˝라고 소리치며 식장을 나가는 바람에 시상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덕분에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베른하르트는 급기야 도전적 신예로 부상하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등 현대 유럽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도 딱히 줄거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있어도 단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
줄거리를 대신하는 것은 주인공이 넋두리하듯 주워 섬기는 독백이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이 독백을 듣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 <벌목꾼>에서도 관찰하고 보고하는 화자인 ‘나‘가 동시에 주인공이며, 재미있는 것은 화자의 관찰대상이 자신을 비롯해 저녁식사에 초대된 모든 예술가 동료들로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객석에 앉아 ‘예술적 만찬‘에 초대된 그들이 우아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비시켜, 껍데기 속에 가려진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진실을 외면하는 허영과 허위를 시종일관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분노하며 초대를 받아들여 그가 증오하는 무리의 일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파티에서 벌이고 있는 희극을 호기심 있는 관객의 눈으로 감상하는 재미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한동안 오스트리아 전 국민의 토론 주제로 부상했다. 이는 우선 소설의 인물을 통해 명예훼손 당했다고 주장한 작곡가 람페르스베르크의 고소를 필두로 이 소설을 실화소설로 본 비평가와 매스컴이 ‘Who‘s Who?‘ 놀이에 발동을 걸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로 인해 베른하르트는 이제까지의 정치적 성격의 스캔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물의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오랫동안 손에 놓지 못하는 이들은 그러나 그의 매력을 또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그의 모든 희곡의 초연을 거의 도맡다시피한 연출가 클라우스 파이만도 그중 한 사람으로, 베른하르트를 읽는 즐거움을 그의 개성적인 문체에서 찾는다며 ˝모차르트의 음악이 세 박자만 들으면 알아챌 수 있듯이, 베른하르트의 작품도 세 문장만 읽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파이만이 베른하르트 문체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에 비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앞서 어떻게 쓰느냐에 비중을 둔 문학관을 강조한 베른하르트의 작품은 정선된 언어와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살린 음악적 구조물이라 볼 수 있다. 그의 희곡들을 전문적으로 공연해 온 연출가와 배우들은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강점과 현실적 난점을 동시에 본다.



§
브뉘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이 떠올려지기도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책을 읽은 지 한참 지나서도 종종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끝맺는 그의 문체를 은연중 쓰고 있는 나를 만나곤 한다. 좋아하는 음악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듯.

새해가 되었고 우리는 또 만나고 헤어질 것이다. 적절한 관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다. 인간과 관계에 대한 끝없는 회의감은 토마스 베른하르트 전 작품에 나타나는 기조이다.
넋 놓고 살 수 없게 만드는, 끊임없이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 관계들 속에서 나는 그의 글에 매번 깊이 공감했다.(이 책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것도 내 회의감에 +1 더해짐) 니체, 카프카, 카뮈의 책을 읽으며 그랬듯이.(이들 책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게 있다...) 그들의 책을 꺼낼 때면 내 시선은 병든 개모냥 헤집고 다니고 싶어 했지만 긴장감과 무게를 오래 짊어지지 못 했다. 정신은 쉬이 피로해지고 어느 날 필라멘트가 끊기듯 툭 놓아버리고 애써 삶에 임했다.
누구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부끄럽게 말하지만 글로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다 나은 사람처럼 보이게 꾸미면서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누구보다 당당한 작가였고 사람이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는 그렇게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하루키 글만의 당당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환상 속에 사는 것은 당신들 영역의 경쟁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배려이자 무능이며, 내가 이 생에서 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 또한 누군가의 피해 의식 대상일지 모를 일, 그럴 때면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불을 끄고 싶다.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요구하는 시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밤낮으로. 그리고 이런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표현해 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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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1-03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른하르트를 잘 모릅니다만, 그가 살던 시기가 2차 세계대전 전후인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의 자성적 비판은 전쟁책임에 관한 내용인 것 같네요^^:...Agalma님늘 좋은 작가, 좋은 작품 소개 감사합니다.

AgalmA 2017-01-03 21:09   좋아요 2 | URL

네,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 <소멸>은 특히 나치에 동조한 오스트리아의 비열함에 대한 조소가 신랄합니다.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그 속엔 허위가 가득하다고 치를 떨며 오스트리아에 자기 작품 출판을 거부하기도 했고요.

겨울호랑이님, 좋은 하루 되세요/

새아의서재 2017-01-03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언급하신 개인적 상황 혹은 심경 같은 것들에 살짝 동의하면서(저도 요즘 그러네요) 잘 읽고 갑니다.

AgalmA 2017-01-03 21:00   좋아요 1 | URL
달걀부인님은 어찌하여...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에 대한 고민은 여전한 거 같아요. 앞으로도 내내 그렇겠죠.
거기도 많이 춥지요. 건강 잘 챙기세요. 달걀부인님.

2017-01-03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3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7-01-03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읽을수록 달콤한 희망보단 더 처절한 고독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데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인간관계에 치이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도요..)

현실의 문제들이 정리되면 읽어야지 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작은 틈을 내어 읽고 있고, 이런저런 고통들이 흘러가면 써야지 했는데, 한 가지가 지나가면 또 다른 것이 오더라고요.

심란한 맘에 일기를 끄적거리다가 문득 체호프의 어느 단편이 떠올랐고, 나의 현실을 책으로 재해석할 지경이라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읽는 인간이며, 쓰는 인간이구나 싶었어요 ㅎ

어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듯 읽다 보니 비슷한 상황에선 특정 작가의 고민이 같이 떠올라요. 그럴 때마다 나에게도 달려갈 오랑의 해변이 있었다면, 제밀라의 바람을 맞을 수 있었으면 좀 더 다른 답을 찾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해요.

어떤 날은 정말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싶기도 한데, 끄고 싶어도 꺼지지 않는 게 고통인지, 축복인지 모르겠어요 ㅎ 어떤 문장들 덕분에, 다른 누군가가 밝혀 놓은 빛을 보며 견디는 거겠죠. 아갈마 님의 빛을 보며 말없이 쉬어가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AgalmA 2017-01-04 10:32   좋아요 2 | URL
라깡의 주이상스라는 표현처럼 고통 속에서도 쾌락을 느끼는 거라 그렇겠죠.

사랑과 열등감이 동률이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제 앞에서 보여준 건 사랑이었지만 헤어질 때는 열등감만 보여 주더군요. 숨겨온 상처를 칼날로 되갚아주더군요. 본문의 인용한 저 문장처럼 정말 그랬어요. 너라서 사랑했고 너라서 증오한다....

저도 모든 연애에서 어느 정도 열등감은 있었던 거 같아요. 누구나 자신만의 뛰어난 장점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걸 속에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터뜨리죠. 사랑한다 말했던 사람들에게 그걸 몇 번 겪다보니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건 대체 뭘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는 존재들. 예수에 대한 사랑도, 신에 대한 상처도 그런 성격이 있는 거 같아요. 우리는 늘 어떤 범주 속에 있고 또한 그 범주 속에 안주합니다. 시간, 나이, 성별, 계절, 공간, 여러 관계들 속에서의 경험.... 나라는 범주가 가장 강력할 테고요. 나 라는 범주 없이 삶은 연장되지 않을 거니까요. 작가들이 백치의 삶을 꿈꾸는 건 나 라는 고통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죠. 베른하르트는 그걸 아주 고민한 작가였어요.

문학은 한밤에 불켜진 방 같아요^^ 잘 찾아간다면 아늑한 은신처 같은 곳. 우리들이 쓰는 글은 그런 아지트를 그리는 거 겠죠.

물고기자리 2017-01-04 10:24   좋아요 2 | URL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알아봐 줄 때,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도 같아요. 사실은 그 상대도 나와 똑같은 착각을 하며 자신의 에고를 충족시키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죠. 더 이상 에고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사랑이란 착각도 끝나는 게 아닐까 싶은요.

하지만 비교적 에고를 내려놓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는 것 같아요. 나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쾌락 같은) 고통이 아닌, 다른 종류의 고통이요.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요..

책(문학)을 읽는 건 결국 삶은 고통이란 걸 알아차리는 과정이고, 계속해서 읽고, 쓰는 과정에서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배워가는 것도 같아요. 나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말이죠. 그러는 과정에서 제 자신에게 많이 낙담하는 게 힘들지만 이미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엔 없지 않나 싶어요..

새해부터 너무 진지한 댓글로 아갈마 님을 괴롭혀드린 건 아닌지, 잠은 좀 주무시는 지도 걱정이네요;; ㅎ
불빛을 따라 와보니(늘 반짝거리고 있어) 이곳에 도착했더란 말이죠^^

AgalmA 2017-01-04 10:40   좋아요 2 | URL
네. 착각의 연속이죠~_~;

말씀처럼 사랑의 위대함을 말할 때 에고를 내려놓은 융화를 가장 최고라고 말하죠. ‘나‘ 라는 걸 점점 강조하는 어려운 현실 속에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가치가 되고 있죠. 이런 불씨들을 계속 살리려고 글을 쓰고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의 글들은 쓰기에 너무 치중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생각은 얕고 말이 더 먼저 나간다고 할까. 저도 반성할 부분이고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고기자리님의 이런 말씀이 정말 필요했어요. 감사드려요.

물고기자리 2017-01-04 11:05   좋아요 2 | URL
아놔 ㅋ

제가 감사 받으려고 댓글을 단 건 아닌데;;

아무튼 갑작스레 진지해져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ㅎ

사담이지만 제 서재에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좋아요‘를 눌렀다 안 눌렀다 하는 게 미안해서 일괄적으로 누르지 않는 이상한 공평함을 시전하고 있거든요 ㅋ 이렇게 외출을 할 땐 못 보시겠지만 막 더블클릭을 하며 누르고 있어요^^

AgalmA 2017-01-04 11:14   좋아요 2 | URL
공평하려고 그러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ㅎㅎ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저런 거 신경쓰이는 게 많은 공간인 거 저도 잘 알죠ㅎ 생각 많으신 물고기자리님 맘이 더 편하셨으면 합니다. 가끔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라는. 바라고 바랄수록 욕심만 되는 것도 알고.
머리가 너무 무거운 아침입니다. 사는 게 참 만만치 않아요...
 

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 <봄의 제전>이 탄생하던 때, 에겐 <CHANEL no. 5>가 탄생하고 있었다.

음을 먼저 만나고 악보로 기록하는 스트라빈스키와 천을 먼저 만지고 옷을 만드는 샤넬. 서로의 창작 원리는 곧 수긍할 수 있지만 직접 창작하지 않고는 더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스트라빈스키에게 가족이 있었던 문제보다 이성적인 끌림도 서로의 창작 세계를 뛰어넘지 못하기에 그들은 결국 헤어지게 된 게 아닐까. 그들의 성격이 결국 그러한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압권은 <봄의 제전> 초연 때의 무대 상황. 스트라빈스키 음악과 니진스키 안무의 전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중의 동요 속에서 여유롭게 지켜보던 샤넬. 이후에 샤넬이 <봄의 제전>을 후원하며 무대의상을 맡았다.         

 

재능을 한창 인정받고 있던 코코 샤넬의 당당함과 재능을 인정받기 전인 스트라빈스키의 고집스러움과 곤궁을 각각 근사하게 보여준 안나 무글라리스와 매즈 미켈슨의 연기 합이 멋진 영화였다.


언젠가 <봄의 제전> 연주를 들으러 가게 된다면 CHANEL no. 5도 함께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1921년 탄생한 CHANEL no. 5는 이제 없다. 잔향의 원료인 ‘참나무 이끼‘가 알레르기 유발 등의 이유로 2014년 원료 사용 제한 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과 예술향을 멀리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CHANEL no. 5의 향이 달라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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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1-02 0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샤넬 no.5 라면 마릴린 먼로가 생각나네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이야기를 들으니, 아인슈타인과 이사도라 던컨 이야기를 들은 것만큼 색다른 조합인 것 같아요^^:

AgalmA 2017-01-03 04:29   좋아요 2 | URL
먼로 이야기 너뮤 유명해서 일부러 안했어요ㅎㅎ
20세기 초중반은 에너지로 가득했던 거 같아요. 사랑도 지식도 문화도 대단한 교류 속이었던 듯^^

yureka01 2017-01-02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책으로 혹은 이야기로..블로그가 풍성해지는 시간 되시구요...봄의 제전이라길래 봄이 기다려지네요..ㅎㅎㅎ

AgalmA 2017-01-03 03:5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yureka01님도 2017년 봄 기운 같은 따사롭고 향기로운 에너지 충만하시길^^
날씨가 포근할 땐 봄날씨 같다 싶기도 하더군요. 올 겨울은 그리 춥지 않게 지나가는 거 같아요

cyrus 2017-01-02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의 제전>을 듣으면 심장 박동수가 높아져요.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듣었을 때 그 흥분되는 느낌이 너무 좋아었요. ^^

AgalmA 2017-01-03 04:28   좋아요 0 | URL
초연 당시도 대단히 그랬지만 샤넬과 연애하던 당시에 수정 작업을 했던 걸 생각하면 <봄의 제전>의 격정적임에 샤넬의 영향도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로지 서로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낳는다,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

˝자연은 모으지 않고 분배한다......어떤 때는 유사하고 또 어떤 때는 다른 분리 불가능한 것들(즉 원자들)의 합으로서의 자연은 결국 그 자체가 합인 것이지 결코 전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서로를 절대로 포괄할 수 없는 원자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사성과 차이, 구성과 해체, ˝연결, 밀도, 충격, 만남, 운동을 통해서 모든 사물이 형성된다˝. 배열과 떼어놓음, 사물의 본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질 들뢰즈 《질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중

 

 

 

이런 문장들과 씨름하다 보면 머리를 식히러 알라딘에 와 웃을 게 없나 찾게 됩니다.  그때 발견한 것은 바로바로~

 

 

 

적립금 주는 답 항목에 ˝오발송˝ 있는 거 보고 빵ㅋㅋ
지적이고 까탈스러운 알라디너들 상대하려면 이 정도 유머는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알라딘, 센스 있어요ㅎb
(* ‘까다로운‘이 바른말이지만 ‘까탈스러운‘이 더 어울려서 저렇게 씀ㅎ;)

 

 

2017년 새로운 알라딘 컵이 등장해서 시키지도 않은 제 취향 선호도를 더욱 체크해보았습니다!
저걸 다 가지려고 주문한다면, 반년 치 독서할 책을 사는 셈...위, 위험하다)))

빠른 품절이 빠른 포기를 부른다.

 

 


 

 

 

 

 

 

 


2017년 1월 1일 첫 포스팅을 이렇게 시작하다니...ㅜㅜ 멋진 건 다른 알라디너들이 하시고, 저는 우스꽝스러움 발산~
발산? 그렇지, 발산.... 이란 단어를 쓰게 되자 공부봇으로 다시 돌아감...

 

 

˝계열들의 수렴에 의해 정의되는 공가능성, 계열들의 발산에 의해 정의되는 불공가능성....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의 재현은 무한하게 작은 것들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산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중심에서 벗어남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계열들의 수렴 조건 속에서만 갇혀 있다고 비판했다˝

ㅡ 질 들뢰즈 《질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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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jifs 2017-01-01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7년 새해에 점차 확대되는 오발송인가요?ㅎㅎ

AgalmA 2017-01-01 19:12   좋아요 1 | URL
직접 웃겨 주려고 오발송을 실천까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ㅎ
sijifs님,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yureka01 2017-01-0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발송??이 잘못 발송??ㅎㅎㅎㅎ 웃음 났습니다..ㅎㅎㅎㅎ

AgalmA 2017-01-01 19:13   좋아요 1 | URL
뭐 또 재미난 표현없나 생각하게 돼요ㅎㅎ

해피북 2017-01-0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부터 오발송 ㅋㅋ 빵 터졌어요. 그런데 아갈마님은 질 들뢰즈와 함께하시는 군요 ㅎㅎ 저는 애너벨 크랩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새해 첫 시작부터 책읽기 참 좋은거 같아요 ㅋㅋ

AgalmA 2017-01-01 19:18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 책 읽으시네요^^ 저는 새해부터 너무 기합넣고 책 보는 거 아닌가 싶어요. 진도 빨리빨리 안 나가니까 힘드네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1-01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도 모았으면 인간과 비교가 더 정밀했을텐데요, 넘 베풀기만 하니 대비가 넘 커서 대부분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한 듯 합니다. 저 포함해서요 ...^^

AgalmA 2017-01-02 01:44   좋아요 1 | URL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이전 철학자들이 ‘존재-일자-전체‘로 어떻게든 모으려 한 것을 비판하는 뜻에서 저 ‘자연은 모으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온 겁니다. 공백-원자들은 끊임없이 생성 변화되는 구조와 성질인데, ‘모은다‘는 것은 지극히 관찰자인 우리의 고정관념이요 사변적인 형식이지 자연철학의 반정신주의, 다원주의적인 성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들뢰즈의 논변입니다. 끊임없이 모아서 사유의 암덩어리를 만드는 게 바로 인간.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 속의 생성을 그토록 강조한 거지요.

보슬비 2017-01-02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발송으로 알라딘 굿즈나 왕창 보내주었으면 좋겠어요. ㅋㅋ

AgalmA 2017-01-02 01:39   좋아요 0 | URL
새해를 맞아 그것도 멋진 이벤트겠네요ㅎ
 

계란을 던지고 싶어도 귀해서 못 던지게 만든 걸까.


봉쇄선까지 올라갔다. 우리를 마주한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고 호기심까지 엿보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국민은 누굴 지칭하는 것인가.
박자가 맞지 않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제창되고, 한 사람이 빠져나오면 다른 한 사람이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빠짐없이 돌아 나와야 했다. 중간에서 흩어진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 했다.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이 흐름.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올라갔다. 풍물패의 가락 소리는 뒤로 사라지고 시끄러운 군가 소리가 우리를 맞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 태극기를 흔들며 뭐라 말하기 어렵게 도취해 있는 노인들이 가득했다. 촛불을 든 사람들과 태극기를 든 사람들의 대비가 기괴했다. 극악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태극기를 창처럼 흔들던 노인을 마주하며 나는 당혹했고 서글픔이 커져 비참했다.
말과 행동을 그렇게 쓰는 것을 보는 절망감. 시간을 가르는 무수한 평행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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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6-12-31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같은 장소에있군요 해피뉴이어

AgalmA 2017-01-01 00:42   좋아요 1 | URL
그랬군요. 서로를 모른 채 많은 사람이 간절한 바람으로 거기 모여 있는 걸 체감할 때마다 많은 생각이 스쳐 갑니다.
21세기컴맹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겨울호랑이 2016-12-31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오늘 광화문에 나가셨군요..^^: 행복한 2016년 마지막 날 되세요 ㅋ

AgalmA 2017-01-01 00:35   좋아요 2 | URL
올해는 책 볼 여유를 끝까지 주지 않네요; 그래서 2017년에 귀가^^;;
어서 기쁜 마음으로 모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31 2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날씨 추운데, 따뜻하게 입고 나가셨죠?^^
뜻 깊은 올해 마감이세요.

AgalmA 2017-01-01 01:25   좋아요 1 | URL
오늘 아니 벌써 어제이자 작년이 되어버린 시간...참 포근하더군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꾸준히 관심과 행동을 보여 주려는 분들을 보니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씨 때문에 2017년 첫 날을 길에서 맞았어요. 화난다ㅎ!

yureka01 2016-12-31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해 마무리 의미로운 시간이네요..수고하셨습니다..

AgalmA 2017-01-01 00:40   좋아요 2 | URL
2017년 1월 7일 집회는 벌써 11차가 된다고 하더군요. 1월 9일은 세월호 사건 이후 1000일 되는 날이라고...
1월엔 좋은 결과 나와 새해가 제대로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01-01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약속을 시청앞으로 해서 그들과 마주쳤어요.
‘계엄령을 선포하라‘ ‘군대를 동원하라‘ 광기어린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AgalmA 2017-01-01 12:41   좋아요 1 | URL
네. 말로 소통할 여지가 전혀 안 보여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이 상황이 해결된다고 해도 다음 상황은 또 어떤 것이 올까 싶으니 그것도 답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