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관찰이 있었지만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믿음처럼 ‘지구평면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거북이 지구를 받치고 있다는 이야기는 힌두 신화부터 중국 등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한국에서도 사방을 지키는 사신 중 현무는 대지를 상징한다. 각 문화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문화는 서로 닮았다. 이를테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지옥문을 지키는 삼두견(三頭犬) 케르베로스(Cerberus)가 있는데, 한국에는 암흑대왕의 불개(《조선민담집》), 저승의 삼목대왕이 이승으로 와 개로 변신한 삼목구(눈이 세 개인 개) 이야기(《청장관전서》) 등은 현실에서 우리가 개를 가까이하며 사는 것과 같이 이계에서도 비슷한 형상을 그린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머리가 셋에 다리가 하나인 ‘삼두일족응(삼두매)’, 태양에 사는 다리가 셋인 까마귀 ‘삼족오’를 통해서도 숫자 ‘3’을 완벽한 숫자로 여기는 동서양의 문화가 동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고기에 대한 신성시도 종교와 민간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성배 『한국 요괴 도감』은 짐승 혹은 사람처럼 생긴 ‘괴물’, 혼백이거나 자연의 정기에 의해 만들어진 ‘귀물’,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능력을 갖춘 물건들인 ‘사물’,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한국의 ‘신’ 이렇게 네 분류로 소개하고 있다. 도깨비, 달걀귀, 손각시(처녀귀신), 몽달귀(총각귀신)처럼 익숙한 한국 요괴들부터 현대 도시괴담 속 자유로귀신, 콩콩콩귀신, 홍콩할매귀신, 한강괴물 등 신종 요괴들까지 두루 등장한다.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한국에는 요괴가 많지 않고,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귀신이 많다는 게 내 소감이다. 많은 요괴들의 출몰 시기가 조선 시대인 것도 흥미로운데 기록 때문에 요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역설도 된다. 관련된 인물이 유명인이면 더욱 그렇다. 괴이한 지네가 등장하는 김자점 탄생 설화(괴오공), 금돼지가 등장하는 최치원 탄생 설화(금돼지), 동명왕이 길렀다는 기린(기린), 박혁거세가 죽자 장사를 방해한 큰 뱀(대사), 선덕왕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침실에서 늙은 여우를 죽인 일화(매구-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천 년 묵은 늙은 여우), 나라가 망할 징조인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에 들어오는 장면(백여우) 등.
한국 요괴들을 종합하면 몇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영노, 장자마리, 주지 등 탈춤에만 소개되는 독특한 괴물이 있다.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오래 전해져 왔기에 불상과 관련된 요괴 이야기도 많다. 동식물 모습의 요괴들은 이 땅의 기후와 지역 특색에서 등장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은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듯 호랑이 귀물도 많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노래도 있고 금을 두꺼비 형상으로 만들 정도로 한국에서는 재물에 관련된 두꺼비가 많은데, 아닌 게 아니라 업신·조왕신·터주신으로 두꺼비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식물로 만들어진 병사인 녹두병, 죽엽군처럼 전쟁에서 도움을 주는 병사가 있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우렁각시나 선녀처럼 도와주는 여성 존재도 많고, 중국에서 불로장생약을 찾아온 곳이 한국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병을 낫게 해주는 물이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한국의 요괴 이야기들은 생활과 관련된 게 많아 염원을 담은 실용, 교훈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탄생한 것 같다. 제주도에서만 출몰하는 요괴 소개는 섬 문화만의 특이한 문화 탄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은 오래전부터 어떤 것을 신성시했고 터부시했는지 그리고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런 자료들은 재미나 이야깃거리로만 소비할 게 아니다. 여기엔 지금의 나, 세계의 뿌리들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 우리의 두려움은 많은 것들을 또 만들어낼지 모르는데, 우리의 두려움이 그것들의 힘을 키운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ps)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숙지할 수 있었다.
봉황은 특정 새가 아니라 수컷인 ‘종’과 암컷인 ‘황’을 합쳐 부르는 신령한 새로 고귀함의 상징이다.
기린도 수컷을 ‘기’, 암컷을 ‘린’이라 통틀어 기린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