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장점은 여러 가지인데 내게는 과학 공부에 좋은 자극제다. 《테넷 tenet》 관람 후 즐거운 과학 공부가 또 시작되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법칙의 특성』 읽다 보니 놀란이 《테넷 tenet》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말고 즐겨라"라고 한 건 과학계 명언가 파인만한테 배운 거 아닌가 싶었다. 대칭성이 강조된 영화 이미지도 파인만의 '물리법칙의 대칭성' 챕터에서 영감을 받은 거 같고. 워낙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니 그의 책을 안 봤을 리 없고 파인만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았을 듯. 봉고를 연주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이기도 했던 파인만과 통하는 게 많았을.
"나는 오늘날 양자 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강의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형상화시켜서 꼭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긴장을 풀고 즐기는 기분을 갖기 바란다."
그러나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는 그럴싸한 말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각과 경험, 직관으로 접근하기에는 이 영화는 논리로 움직이고 구조적 짜임새가 상당하다.
이해 안 된다고 말들 많지만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한 권만 봐도 거론된 난제들이었다. 이론물리학자 킵 손이 각본을 봐줬다지만 《인터스텔라》보다는 시각적 구현이 잘 안된 거 같다. 익숙하지 않은 사고까지 해야 하니 사람들이 어려움을 호소할밖에.
몇몇 액션들은 좋았는데(그동안 찍은 영화 액션 총출동. 군사 동원은 《덩케르크》 영향ㅎ?) 놀란의 이전 영화에 비해 씬들이 매끄럽게 붙지 않아서 좀 지루했다. 창작자가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만들지 못한 책임일 수도 있지만, 물리적 구현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 여행은 무수히 다뤄졌기에 예전처럼 뿅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표현하면 코미디가 되기 십상이라 고민이 많았을 듯. 논리적으로 풀자면 양자 얽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사를 얹어 시각적으로 푸는 건 SF 물의 어려운 과제다.
이 영화는 이해의 어려움보다 설득되지 않는 게 많다.
그림 1)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1.
영화 속 '회전문'은 입자/반입자 쌍의 시간 이동을 시각적으로 적절히 표현했다. 괴델은 우주 전체가 회전한다고 봤는데, 그렇게 시공을 보면 출발하기 이전 시점으로 돌아오는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다. 이 전제를 따르려면 빛보다 빠른 여행이어야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빛보다 빠르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웜홀에서 딸에게 중대한 정보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웜홀'로 시간 여행을 제시했다. 그래서 더 공상 과학 판타지 같다는 소릴 듣는 거 같다;;; 지금까지 제시된 시간 여행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가설이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엔트로피를 되돌리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간 여행을 제시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 법칙의 대칭성을 논하며, '회전'은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했다. 이 영화는 인버전(엔트로피의 역전)을 이용한다면서 거꾸로 움직이는 건 맛보기 정도로 짧게 보여주고 대부분 스토리에 맞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2.
드니 빌뇌브 영화 《컨택트(Arrival)》와 원작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때와 같은 물음이 남는다.
시간 여행의 역설 '무모순적 역사 접근(consistent histories approach)'
영화에서도 언급된 '할아버지 역설'이 여기 해당하는데, 시간 여행이 가능해 과거로 간다 해도, 기록된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것. 과거와 미래는 정해져 있고 우리는 역사를 따르는 위치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 테넷은 인류의 파멸을 막을 운명이고 피할 수 없다. 죽음의 결과를 받아놓고 살아가는 인간 삶과 마찬가지로.
시간 여행의 역설은 다른 것도 있다. 시간여행자가 기록된 역사와 다른 대체 역사 속으로 들어가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대체 역사 가설(alternative histories hypothesis)', 물리 법칙들이 거시적인 물체가 과거로 정보를 운반하는 것을 막는 '시간 순서 보호 가설(chronology protection conjecture)'이다. 호킹은 '대체 역사 가설'을 '파인만의 역사합산'과 비교한다. 파인만의 방법은 우주가 단 하나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개연성을 가진 수많은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각각이 개별인 만큼 가시화된 역사는 모순이 없어야 하는 동일한 역사여야 하므로 그의 방법은 '무모순 역사 가설'과 비슷하다.
호킹은 경고했다. "과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면, 모순에 빠진다."
이 영화의 문제는 '무모순적 역사 접근'(일어난 일은 일어난다)을 내세우면서도 실상 방법은 '대체 역사 가설'이다. 스토리 진행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물리 법칙들은 무시하며 자유롭게 장면을 끌고 나간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입자들 사이의 모든 힘 혹은 상호작용이 입자들에 의해서 운반된다고 가정한다. 힘- 운반 입자의 방출(-)과 흡수(+)는 불가결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인버전이 작용하면 총알이 되돌아오는 발사처럼. 물체는 그렇다 치고 인간의 몸과 의식이 미래 정보를 가진 채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굉장히 인간 중심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인간은 수많은 기억과 정보로 이뤄진 유기 생명체이자 이 세계를 이루는 네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에 영향받는 물리적 원자이다. 그러니까 시간 이동에서 모든 것(가장 불완전한 의식 포함)이 온전한 채 과거로 가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시간 이동에서 각종 정보와 힘들이 충돌하게 되는데, 고전 SF 영화의 충격적 장면처럼 그런 시공간이라면 파리와 얽혀 파리 인간으로 전송되는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다. 호킹이 블랙홀과 웜홀을 설명할 때 온전한 정보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에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영화에서와 달리 대부분의 시간 이동 이론들은 미래로의 이동은 가능하지만 과거나 정확한 시점으로의 이동이 어렵다 말하는 건 불확정성 원리, 엔트로피(무질서의 증가)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성을 가진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상당수의 숨은 정보량을 모르고, 이 시공간의 자연현상은 균형을 이루는 물리 법칙 속에 함께 흘러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10차원을 말하는 끈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다른 차원을 볼 수 없는 것도 이 세계의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시공간의 영향 때문이다. 이 영화가 굴러가는 핵심 논리는 '엔트로피를 제어하는(시간을 뒤집는) 인버전 기술로 시간과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모든 걸 조정할 수 없다. 불확정성 문제, 현재에 작용하는 중력은 무시된 채 인버전이면 다 될 것 같은 이 영화의 논리대로라면 과거로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정확히 원인의 시작점을 알고 모든 물리 법칙을 제어 가능한 기술력까지 있다면 미래에서 간단히 조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영화가 안 되잖아-_-)...
3. 영화 《컨택트(Arrival)》와 원작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면서 가진 내 의문 하나가 풀렸다. 빛은 최단 시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는 페르마의 원리에 따라 테드 창도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페르마의 원리에서 도출한 결과ㅡ'미래를 안다는 건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 ->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미래를 안다면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ㅡ에 따라 주인공의 삶과 미래는 무모순적 역사 접근을 따랐다. 나는 빛이 목적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설명이 도무지 수긍되지 않았다. 이번에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를 읽으며, '파인만의 역사합산'이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시켜줬다. "전자와 같은 한 입자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거친다." 즉 빛은 여러 경로로 출발하고 '빛의 최단 시간'은 우리가 도출해낸 결과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바꿀 수 없는 인과론적 결론(빛의 최단 시간)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목적론적 결론(빛의 여러 경로)을 실험해보는 과정이었다.
그림 2)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4.
이 영화는 '그렇다 치고'가 너무 많다. 미래와 소통하며 인류 파멸을 계획한 빌런 캐릭터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만 등장해 아쉬움이 많은데 정작 그 힘을 가진 미래인의 정체, 그 힘이 이 현실에 어떻게 주어졌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게 영화의 답답함을 더 키웠다. 거두절미하고 시간 중첩이 가능하다는 논리 아래 과거의 것들이 지금 현실에 중첩되며 모든 것이 혼재하고, 사물과 사건이 리플레이되듯 움직이며 '나'가 '나'를 만나는 것 등 근사한 이미지들이었지만 그것은 끝과 시작을 구분할 수 없는 에셔의 그림처럼 직관적이고 예술적인 나열이지 설득도 근거도 아니다. 그래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과거의 자기를 만나면 존재가 사라지므로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그것은 과학적인 설정이다. 원자는 구성 입자에 대응해 쌍을 이루는 반대 성질의 반입자를 가진다.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에 따르면(위 그림 1 참조)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반입자와 입자가 만나면 둘은 소멸한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과거의 자신과 싸우는 장면은 기묘해진다. 자신을 몰라봐야 하니까 방독면을 쓰게 만든 설정이 이해도 됐다. 그러나 엔트로피를 거꾸로 돌려 인버전된 과거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을 반입자라고 볼 때 이론적으로 (이미 무시되고 있지만) 그들이 못 알아보므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접촉하는 순간 섬광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이 영화를 분석하면 할수록 나도 억지 가설로 빠지고 있는 것만 같다-_-
인류와 에일리언의 기원을 설명한 리들리 스콧 《프로메테우스》(2012) 같은 후속작이 나오면 많은 게 설명될까. 그러자면 설명해야 할 물리법칙들이 만만찮을 것이다. 놀란 감독 앞으로 영화 찍기 더 힘들 듯. 엔트로피 성질상 이미 이런 식으로 사고한다면 더 복잡하게 가지 후퇴하진 않을 거 아닌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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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 같은 한 쌍의 양들이 동시에 정확하게 예측될 수 없다'라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를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선지) 나름 따르고 있다. 인버전으로 반복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계속 목표를 놓친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버전을 반복한다. 어떤 역사에서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도 로버트 패틴슨도 죽는다. 이 영화는 '성공' 결괏값만 보여준 엔딩이었다. 대칭성을 고려해 끝에서부터 앞으로 가는 인버전 관람을 한다면 결괏값은 '실패'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운명'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ps)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캐스팅 실패였다. 존재감이 너무 없어 영화가 더 흡입력이 떨어졌다. 로버트 패틴슨은 닐 역에 잘 어울렸다. 엘리자베스 데비키 나오는 많은 장면도 그렇고, 정장 차림에 번지점프 작전이라니 거 너무 007 오마주 아니오! 뭐, 어울려서 칭찬.
내가 이 영화를 봤다는 미래 결과 때문에 봐야 했다. 이 영화의 대사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패러디.
아이맥스도 포기하고 사람 없을 조조로 관람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관객 6명.
2시간 30분 정도 보는데 마스크 벗고 음료나 과자를 꼭 먹어야 하는지... 그 넓은 데서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그러길래 불편했다. QR 코드 체크해서 함부로 위치를 이동해선 안 된다. 호기심과 즐거움 추구도 좋지만 공중 위생을 더 생각하며 즐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