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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어떤 오후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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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 추이를 따라 가며 읽을 때면 그 작가의 데뷔작에서부터 면면히 이끌어져 오고 있는 근원성이 얼마나 실험배양이 잘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책 속의 목차와 별개로, 내 독자적인 목차인 셈이다. 이런 나의 습성은 특히 한국 작가들을 읽을 때 자주 발동되는데, 같은 나라 동시대 사람들의 알리바이는 추적하기가 쉬워 흥미와 자극을 더 부추기기 때문이다.
정영문의 데뷔작 『겨우 존재하는 인간』(1996)이 한국적 레시피였다면,『목신의 어떤 오후』(2008)는 서양식 레시피로 변모했을 뿐 요리 재료들은 그다지 큰 변화는 없다.
소재(부엉이, 물고기, 개구리, 원숭이, 새, 소, 금붕어, 풍뎅이, 개미, 포도, 불가사리, 모자 등)와 상황 설정(공원에서의 만남, 부랑자 or 떠돌이, 산책, 여행, 불면, 꿈속의 환영, 기억의 연상, 환각 등)이 여전히 반복 ‧ 변주되고 있다.
하루키가 자신의 이전 소설 재료들을 모두 가져와 백과사전으로 만들어버린『해변의 카프카』보다는 정영문의 반복 ‧ 변주에 대해서 나는 우호적이다.
아무튼 이 빙빙빙 돌아 돌아 가는 작가들의 강박적 태도는 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심리적 호감도의 작동이기도 하겠지만 대개 언어를 통한 환상(미메시스가 아닌 기표로서의 언어)의 탐닉이 더 큰 요인인 것 같다.
그러한 작가군은 세계를 '유령지'로 만들어버리는 현상들이 짙은데, 뭐, 나쁘지 않다.
ㅡAgalma
[브라운 부인]
"그들의 동기는 끝내 알 수 없었고, 우리는 거기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도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숲속으로 들어간 살인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즐거움]
"그가 생각하기에 그가 누군가와 갑자기 가까운, 또는 친밀한 사이가 되는 데에는 어떤 예상치 못한 방식이, 다소 이상할 수도 있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목신의 어떤 오후]
"어떤 식물들은 대칭을 참을 수 없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옮겨다녀야 하고, 그래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동물들과 달리,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이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추억의 한 방식]
"모기는 아무리 잡아 죽여도 마치 복제되어 만들어지듯 다시 나타났다."
[닭과 함께 하는 어떤]
"‥그들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다람쥐와 모래와 편지에 대한 어떤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이발소와 우체국과 푸줏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중간 중간 뒤섞였고, 그래서 다람쥐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은 뒤에 우체국에서 모래가 들어간 소의 내장을 사 푸줏간에 갖다주면 좋겠다, 와 같은 말로 들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에 늘 이끌리게 되는 것은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이러한 이상하면서도 매혹적인 장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그럴 때면 나는 드물게 우리 집에 오는 우편배달부를 떠올리며, 나를 기쁘게 해줄 소식 따위는 필요없으니 그가 올 때마다 고아가 된 다람쥐를 한 마리씩 내게 가져다주면 좋을 거라는 ㅡ 그는 뭐든 들어 있을 것 같은 낡은 우편물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고아가 된 다람쥐들 역시 여러 마리 들어 있을 것 같았다ㅡ생각과 함께ㅡ나는 다람쥐와 함께 떠날 준비가 되었다ㅡ다음에 그를 만나면 그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곤 했지만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은 없었다."
[목가적인 풍경]
"그의 그러한 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더욱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유원지에서]
"우리가 그것을 배우려고만 든다면 자연은 별것들을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었다."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1-물 속의 알람 소리]
"모래놀이를 하자고 누군가에게 조르는 어른은 없다."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2-동굴 생활자]
"고양이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고양이가 보인 가장 이상한 행동은 거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왔다갔다한 것이다. 그것은 한참 동안 아주 규칙적으로 그렇게 왔다갔다 했다. 그에 따라 침실에서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보면 똑같이 생긴 수많은 고양이들이 끝없이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3-부엉이의 숲]
"대체로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내게는 자연 속의 사물들에는 웃음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 혹은 절망한 동물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