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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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인간관계와 그 중요성에 대해 숱하게 고민하지만 성공을 약속하는 자기 계발서처럼 나를 위한 이기심에 그러할 때가 대부분이다. 나도 좋고 타인도 좋으면 좋겠지만 그게 참 쉽지 않다.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옆 사람의 맘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요즘의 행복이 각자 자기 충족에만 그치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많다. 점점 더 자기 앞만 보고 내달리게 하는 사회에서 오늘 아침 풍경은 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를 하러 가거나 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뒤라 내 맘이 더 복잡한 건지도 모르겠다.

 

 

 

신영복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자유를 되찾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감옥에서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결심했다. 당시 교도소 규정 때문에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어 현실적인 이유로 오래 볼 책을 고심하다 그리된 것이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했다고 하겠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선생님.

이 책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고 사회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며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 변혁기였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였다. 신영복 선생은 춘추전국시대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 무한 경쟁의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은 서양 중심의 질서가 반드시 변화할 때이기도 하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흄과 칸트의 견해) 이었다. 많은 역사서들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조화된 구조여서 서양 문명이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축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게 결정적 결함이다. 비종교적인 과학과 비과학적인 종교.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는 와해되었다. 종교의 역할 축소와 함께 현재 과학은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패권 국가의 일방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는 동양적 구성 원리에 가치를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같은 위기에 처한 지금, 차이가 아니라 공존을 위한 관계망을 강조하는 이 강의는 현실적인 공론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시작하며 많은 미래 담론들이 나왔지만, 신영복 선생은 그것들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다고 보고 새로운 담론을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아닌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는 담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중용中庸)이 특징이다. 인본주의 유가儒家와 자연주의 도가道家의 견제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진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읽다) 해 읽은 『주역』의 탄생은 그런 배경이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리의 자리에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담론(『논어』)에서 보편적 개념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은 『자본론』과 『논어』가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이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다. 한국의 문제도 바로 이것 아닌가. 경제 발전과 돈을 좇으며 사람을 함부로 대하던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목격되고 있다. 무왕불복(無往不復 :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주역』 지천태괘地天泰掛의 효사爻辭)을 우리는 더 참담하게 마주하고 있다.

 

「『노자』의 서술 방식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읽었습니다만 『노자』에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이러한 차원의 정치학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별애別愛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적·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에는 겸애와 교리의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는 보다 진전된 논의가 없습니다. 애정愛情과 연대連帶라는 원칙적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략)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性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악론」편은 대체로 묵자의 비악론非樂論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화순’和順입니다. 분계와 법과 규범과 제도라는 각박하고 비정한 것들을 음악으로 화순시키는 것입니다.」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실제로 수隋 당唐 이래로 선종 불교가 그 지반을 널리 확장해가면서 이러한 의식의 무정부성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그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송대의 신유학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중략)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의 지배 기간인 원사元史와 청사淸史마저도 각각 송宋과 명明을 계승하는 정통 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라는 세계 인식은 중국 이외에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며 오만이었습니다.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유학을 대신하여 사회의 이념 형태를 규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건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불교 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 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철학 즉 philosophy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문화 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 이후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양 철학은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철학을 인류의 보편적 문화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 됩니다. 따라서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을 보편적인 것으로 추인하기보다는 그것을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입니다. 철학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대 유학이 철학화했다는 평가는 서양 철학 고유의 범주와 개념을 송대 유학에 적용하여 바라보았을 때만 부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략)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불교 사상은 현실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사회 제도 그 자체의 존립을 부정하는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사상이었으며 비윤리적 사상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해탈解脫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일종의 초윤리적이고 탈사회적인 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무도 사회적 윤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송대 유학자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주자朱子로 대표되는 송대 신유학자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감으로 『중용』과 『대학』을 장구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원래 『예기』禮記 제42편이었습니다만 주자가 그것을 따로 떼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주석했습니다. 경은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대漢代 유가儒家의 공동 저작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가 사상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이라 평가됩니다. ……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혹은 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3강령三綱領이라 합니다. 그리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8조목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주자가 왜 『예기』의 이 부분에 주목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장구하고 주를 달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자 이전에도 사마광司馬光이 『중용대학광의』中庸大學廣義를 지어 『중용』과 함께 『대학』을 따로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대학』을 주목하게 된 배경이 중요합니다.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 위정자의 학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 계층의 학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해탈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송대 지식인들의 사회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反불교적이고 반도가적입니다. 불교의 몰沒사회적 성격에 대한 비판입니다.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서양철학을 좀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인용을 통해서도 보듯이 동양 사상이 인간 중심의 관계지향적 성찰이라는 게 와닿을 것이다. 동양 사상을 현실적이라거나 논리가 부실하다고 폄하하는 경향도 보는데, 서양철학의 그 치열한 이성 중심주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 말미에서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고 사상과 생각을 결정하는 것도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많은 어지러움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문제를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라고 했던 묵자,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盡心 上」)이라 엄정히 말하는 맹자,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상서尙書』,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美貌보다는 건강健康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을 『백범일지』에 쓰고 맘에 새기려 했던 백범 선생처럼 내 맘만이 아니라 많은 맘을 살피는 실천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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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4월 1차 메인 굿즈는 끌리는 게 없어서 제일 궁금하고 저렴한 책 2권과 판매용 굿즈를 알뜰살뜰 구매했다. 근데 너희 왜 다 뒷모습이니-,,-

📘 『2020 제1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어벤저스 신인 작가들의 소설 모음. 이 봄 아니 읽을 수 없다! yes24는 책갈피 주던데 난 알라딘 커피를 좋아하므로 드립백 주는 알라딘에서 구매. 알라딘 드립백이 5개 7000원이니 1개 700원이면 비싼 건 아니다.

 

 

 

 

📘 알랭 바디우 『검은색』(민음사)

- 실패 트라우마로 에세이 사기 두려운 요즘이다. 바디우 어떤 책은 별로였는데 이 책은 블랙 마니아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터라 책값도 싸서 도전. 첫 장부터 매력적이고 1945년 여덟 살이었던 바디우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맘에 든다. 발터 벤야민 어린 시절 이야기만큼 좋다. 블랙의 장막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즈음을 살아낸 사람들의 글이 난 참 좋다.

 

 

 

 

 

 


📘 moleskine 2020 diary

블루블루 어린 왕자 에디션 나왔을 때부터 하나 갖고 싶었는데 4월 되니 파격 할인하는 게 있어 덥석 사 버렸다. 보고만 있어도 좋아😭🌠 뜯는 것도 아깝다.

 

 

 

 

 

굿즈 맛집 알라딘을 매달 지나칠 수 없다💦💦💦

🎉 4월 알라딘 굿즈

삐삐 롱스타킹 큐브 메모지

- 740매에 7800원이면 괜츈~ 그런데 쓸 때마다 4면에 있는 앙증맞은 그림들이 사라진다니😱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으으

 

 

 

 

 

 

 

 

peanuts 마스킹 테이프(2500원)

- 피너츠 마테는 없어서 환한 색깔의 피너츠 야구를 하나 사 봤다. 귀엽귀엽...마치...

 

 

 

 

책도 책이지만 굿즈로 기분 전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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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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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비유와 논리도 논리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김수영처럼 글의 기개가 대단한데, 이런 특징이 책의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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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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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살아남을까.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질문이다. 조지 오웰(1903~1950)은 그런 책을 쓴 작가다. 그의 말기 소설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는 70년이 지나서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그는 11권(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의 책을 냈지만 생전에 책으로 묶지 못한 서평과 칼럼도 많다. 이 책은 여러 산문 중 꼭 읽어볼 것을 선별해 모았는데 그의 성장담, 소설 집필 배경, 그의 인간성과 세계관과 문학관, 문학 작법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그는 양차 세계대전을 고통스럽게 통과해야 했던 세대로서 “고약한 양심의 가책”을 초지일관 유지하며 삶에서든 글에서든 인습을 타파하려 한 작가였다. 그는 대학 진학 대신 식민지 경찰직을 하다가 그만두고 부랑자나 접시 닦이 생활도 하고 전쟁에도 참여했지만 글을 통해 세계를 직시하려 했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을 추구한 그의 글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그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나며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밑줄을 긋게 될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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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ㅡ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1946/여름)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점점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오웰의 뜻은 ‘끝없이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각성 촉구라고 봐야 한다. 그가 정치, 사회, 문화를 비판적으로 본 시각은 지금 현실에 대입해도 여전히 유효해서 놀랍다. 세상과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방증이기도 하겠다. 그래서 오웰이 '정치적'이기를 강조한 것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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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를 욕하고, 적을 칭찬하고, 항복을 요구하는 신문들과 팸플릿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 없이 길거리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이는 언론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그 정도야 별일 아니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피스 뉴스》 같은 신문은 팔도록 놔둬도 위험할 게 없다. 국민의 95퍼센트는 읽을 생각도 안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국이란 나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단단히 결속돼 있다. 평상시에는 지배계급이 도둑질도 하고, 관리도 엉망으로 하고, 사사건건 방해도 하고, 우리를 진창에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러나 여론이 지배계급 인사들에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면, 즉 그들이 일반의 정서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밑에서 힘차게 잡아당기면, 그들도 반응하지 않기가 어렵다.

ㅡ 영국, 당신의 영국 England Your England (19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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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1900년부터 1920년까지 영어로 책을 쓴 사람 중에 그만큼 어린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없는 것 같다. 웰스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의 정신과 그에 따른 물리적 세계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웰스를 지금과 같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사상가로 만든 것은 사고방식의 획일성, 즉 그를 ‘에드워드 시대(1901∼1910)’의 탁월한 선지자인 듯 보이게 한, 그 편향적 상상력이었다. 웰스가 젊었을 때는 과학과 반동의 대립이 틀린 게 아니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주체가 옹졸하고 극도로 호기심 없는 사람들, 탐욕스러운 사업가들, 아둔한 시골 대지주들, 주교들, 정치인들이었고, 그들은 호라티우스는 인용할 줄 알아도 대수代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과학은 어딘가 좀 남우세스러운 것이었고, 신앙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전통주의, 우둔함, 속물근성, 애국심, 미신, 전쟁 애호는 모두 같은 편에 속해 있는 듯했다. 때문에 그 반대의 관점을 제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돌이켜보건대 1900년대에 어린 소년이 H. G. 웰스를 알게 된다는 건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당시 세계는 현학자와 성직자, 골프 치는 사람의 세상이었고, 미래의 고용주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훈계하고, 부모는 자식의 성적인 발달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아둔한 교사들은 상투적인 라틴어 인용구를 들이대며 바보스럽게 히죽거리던 세상이었다. 그런 시대에 다른 행성과 바다 밑에 사는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었던, 미래가 훌륭한 양반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리란 걸 알았던 놀라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ㅡ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Wells, Hitler and the World State (1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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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글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을 애써 추구했다. 단, 어느 쪽이든 ‘사실’은 존재하며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늘 상당 부분 있었다. … (중략) … 서민들은 공화파가 자신들의 동지이며 프랑코가 적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도 알았으니, 세상이 자신들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고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을 위해 싸웠던 까닭이다. 스페인 내전을 바로 보려면 그런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의 잔혹함과 더러움과 헛됨을(이 전쟁에선 음모와 박해와 거짓과 오해를) 생각하다 보면 꼭 발설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는 말이 한마디 있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스페인 공화파가 백만장자와 공작, 추기경, 한량, 블림프 등등에게 불러일으킨 혐오는 그 자체로 형세가 어떠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ㅡ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 (1942/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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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시라는 것 자체가 외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무엇이며, 마치 시를 대중화하는 게 본질적으로 어린아이한테 약을 삼키게 하거나 박해받는 종파에 대한 관용을 세간으로부터 얻어내는 일과 같은 전략적 술책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문명에서 시는 단연코 가장 불신 받는 예술,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어떤’ 가치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유일한 예술임이 분명하다. 아놀드 베넷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 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고도로 문명화된 나라들의 평균적인 인간이 가장 미개한 야만인보다 미적으로 열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의식적인’ 행동으로는 대체로 치유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가 좀더 반듯해지면 금방 저절로 나아질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종교를 믿는 사람도 모두 같은 얘기를 할 텐데, 크게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략)… 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뜨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ㅡ 시와 마이크 Poetry and the Microphone (1943/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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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민족주의’란 단어를 사용하는 건 더 나은 말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보다 확대된 의미의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 유대주의, 반유대주의, 트로츠키주의, 평화주의와 같은 운동과 경향 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느 정부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조국’에 대한 충성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집단이 실제로 꼭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분명한 예로 유대민족, 이슬람, 기독교계, 프롤레타리아, 백인종을 들 수 있는데, 모두 열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중대한 의문점일 수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에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정의가 없다.

ㅡ 민족주의 비망록 Notes on Nationalism (19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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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및 언론의 자유는 대개 고민할 가치도 없는 주장들의 공격을 받는다. 강연이나 논쟁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을 잘 안다. 여기서 나는 자유가 환상이라는 친숙한 주장이나 민주주의 국가보다는 전체주의 국가가 더 자유롭다는 주장을 다루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가 바람직한 게 아니며 지적인 정직성은 반사회적 이기심의 한 형태라는, 훨씬 더 그럴싸하면서 위험한 주장을 짚어보려는 것이다. 언론 및 보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은, 대개 겉으로는 딴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바람직한 게 무엇인지 또는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중략)… 지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지하의 전설처럼 떠도는 얘기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지금은 거짓 선전이나 조작된 재판 같은 것들을 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을 몰래 기록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그것을 공포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심성은, 과거란 바뀔 수 없으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당연히 값진 것이라 믿는 자유주의 역사가의 심성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배우기보다는 창조해야 하는 무엇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사실상 신정神政국가이며, 그 지배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실수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중략)… 전체주의의 요구에 맞서 지적 자유를 지키려고 하다 보면 앞서 열거한 유의 논박들과 어떤 식으로든 부딪치게 된다. 그러한 모든 질문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왜’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작가를 단순한 엔터테이너로, 아니면 거리의 악사가 곡을 바꾸듯 쉽게 선전 내용을 바꾸는 타락한 글쟁이로 여긴다. 하지만 책이란 게 과연 어떻게 씌어지는 것인가?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단순한 저널리스트와 가장 ‘비정치적’이고 창의적인 작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저널리스트는 허위 기사를 쓰거나 자기가 보기에 중요하다 싶은 뉴스를 덮어버려야만 할 때, 자유롭지 못하며 부자유를 의식하게 된다. 창의적인 작가는 자신의 관점에서는 사실인 주관적인 감정을 조작해야만 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자기가 싫어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자기가 믿지 않는 걸 믿는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면, 결과는 그의 창의력이 고갈되는 것뿐이다. 그가 논란이 될 만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유형의 공포, 증오, 충성이 모든 사람의 의식의 표면 가까이에 떠올라 있는 우리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자유롭게 떠오른 생각 하나가 금지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금기도 지성을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ㅡ 문학 예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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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ㅡ 행락지 Pleasure Spots (1946/01)

 

 

 

 

 

강한 어조의 주장은 반감과 반박을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그의 글은 그 단단함과 비유가 쉽게 깨질 만한 것이 아니다. 그의 문예론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글을 쓰는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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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종류의 글에서, 특히 예술비평이나 문학비평의 경우, 거의 의미 불통인 긴 구절과 마주치게 되는 게 보통이다. ‘낭만적인’, ‘조형적인’, ‘가치’, ‘인간적인’, ‘죽은’, ‘감상적인’, ‘자연적인’, ‘활력’ 같은 단어들은 예술비평에서 쓰이는 경우 확실히 무의미하다. 알아볼 만한 대상을 지시하지 않을뿐더러, 독자 역시 그런 기대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비평가는 ‘X씨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살아 있다는 점이다’라고 하고, 다른 비평가는 ‘X씨의 작품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특유의 죽어 있음이다’라고 평했다고 하자. 독자는 둘을 단순한 견해차로 받아들일 뿐이다. ‘죽어 있는’과 ‘살아 있는’ 같은 상투적인 말 대신 ‘검은’과 ‘하얀’ 같은 단어를 쓴다면 언어가 부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게 당장 눈에 띌 것이다. 정치와 관련이 있는 많은 단어들도 비슷하게 남용되고 있다.

ㅡ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1946/04)

 

 

 

 

 

요즘 나는 읽은 책에 의무적으로 리뷰를 쓰기보다 꼭 남기고픈 리뷰만 쓰려고 한다. 시간적 정신적 에너지를 아끼려는 계획인데 무엇보다 좋은 책을 읽을 여유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오웰의 조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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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책은 이런저런 독자에게 열띤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격렬한 반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생각은 시큰둥한 전문 필자보다 확실히 값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편집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편집자는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일군의 꾼들, 즉 업계 용어로 ‘선수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평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 서적에 대해 한두 줄 정도의 짧은 소개를 해주는 건 유익할 수 있되, 흔히 하듯 600단어 정도의 중간 길이로 쓰는 서평은 서평자가 정말 원하는 작업이라 해도 무익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자는 대개 그런 글은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매주 자잘한 서평만 쓰다 보면 이 글 앞머리에 나오는, 가운 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 신세가 되고 만다.

ㅡ 어느 서평자의 고백 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 (19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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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거나 나쁜 속성이 예술 작품 자체에(그것도 보는 사람보다는 보는 사람의 기분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어느 시에 대해 월요일에는 좋고 화요일에는 나쁘다고 평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옳을 리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가 불러일으키는 감상感想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 말은 분명 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감상이나 향유는 주관적인 상태이며,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아무런 미적 감정 없이 보내며,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너무나 간단히 훼손될 수 있다. 공포나 허기에 시달리거나 치통이나 뱃멀미를 앓을 때, 『리어 왕』은 『피터 팬』보다 하등 나을 게 없을 수 있다. 지적으로는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야 기억하는 사실일 뿐이다. 『리어 왕』의 장점을 ‘느끼게’ 되려면 정상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미적인 판단은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심하게(이 경우 원인을 알아차리기가 더 어려우므로 더 심할 수 있다) 뒤바뀔 수 있다. 어떤 책 때문에 노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놀랄 경우, 책의 장점이 무엇이든 즐기지 못할 수 있다. 책이 자신에게 대단히 해롭거나 남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보인다면, 그 책에 아무런 장점도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미학 이론을 세울 수도 있다. 오늘날의 문예비평이란 주로 그런 두 가지 기준 사이를 교묘히 오가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즉, 즐거움이 견해차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한테 해로운 걸 즐기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스위프트처럼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별난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엄청난 인기가 있는 작가가 바로 그런 예다. 우리가 자신은 야후가 ‘아니’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우리가 야후라 불리는 걸 개의치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스위프트는 물론 옳지도 않았고 사실 제정신도 아니었지만 ‘좋은 작가’이긴 했다는 익숙한 답으론 충분하지 않다. 어떤 책의 문학적 질은 다소간은 주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승부를 읽는 타고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있듯, 언어를 다루는 재주를 타고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재주란 주로 타이밍의 문제, 그리고 강조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아느냐의 문제다.

ㅡ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1946/09~10)

 

 

 

이 책에서 오웰은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어떤 책이나 작가가 좋고 나쁘다는 평은 누구나 남길 수 있다. 단, 자신이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책임질 자세도 있어야 한다. 오웰은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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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치적인 시대다. 전쟁, 파시즘, 집단수용소, 경찰봉, 원자탄, 등등은 우리가 매일같이 생각하는 주제이며, 그래서 대놓고 거론하지 않더라도 상당 부분 우리가 쓰는 글의 주제가 되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가라앉는 배에 관한 것이 될 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제는 협소해졌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가 적어도 이따금은 비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충심에 완전히 물들어 있다. 만일 나는 시절이 아무리 좋을 때라도 문학평론은 사기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왜냐하면 공인되다시피 한 기준 같은 게(어떤 책이 ‘좋다’ 또는 ‘나쁘다’는 진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외부’의 참조 대상) 없는 한 모든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을 꾸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반응이란 게 있기나 하다면) 주로 ‘나는 이 책이 좋다’거나 ‘나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며, 그 뒤에 따라붙는 것은 합리화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이 책이 좋다’는 것이 비문학적 반응이라 생각지 않는다. 비문학적 반응이란 ‘이 책은 우리 편이니까 장점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식의 태도다.

ㅡ 작가와 리바이어던 Writers and Leviathan (1948/03)

 

 

 

 

식상하고 진부한 평에 우리 맘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심혈을 기울인 분석이더라도 기반이 부실하면 공격이 무효가 되고 악의만 드러낼 뿐이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비판하며 쓴 팸플릿이 그랬다. 오웰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Lear, Tolstoy and the Fool (1947/03)」에서 톨스토이가 자의적인 가정과 모호한 용어들(‘진정한’, ‘중요한’)을 사용하며 “셰익스피어에 대한 그릇된 찬미”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은 명백한 허위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든 다른 어느 작가든 ‘훌륭한’ 작가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논거 같은 것은 없고, “궁극적으론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왜 하필 톨스토이가 많은 희곡 중 『리어 왕』을 특정 표적으로 삼았는가를 추적하며, 리어 왕과 톨스토이가 사실 비슷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는데 타당하고 재밌었다. 책에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 책은 딱딱한 주제의 에세이만 있지 않다. 소박한 삶에 대한 판타지적 에세이 「물속의 달 The Moon under Water (1946/02)」, 그의 어린 시절을 절절히 담은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ere the Joys (1947/05)」도 놓치면 아까운 글이다. 어떤 책은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인용만으로도 충분히 리뷰를 대신할 수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스탠리 피시는『문장의 일』(2019, 윌북)에서 '윤리와 미학'에 관한 존 밀턴의 글을 인용하며, 진정한 글의 상태는 외부에서 기술할 수 없는 '내면의 특징'에서 온다는 것에 동의했다. 오웰의 견지에서 보면 '진정한'이란 전제와 '글'과 '내면-인격'의 직선적 연결이 따져볼 게 많지만 우리는 그 함의를 수긍한다.

 

 

우리는 단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 없이 살 수 없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것도 그런 의미 부여가 있을 테고 결국 책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남기는 것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린 게 아닐까. 내가 좋은 책을 찾아 읽으려는 것은 장점을 배우고 싶어서고,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꽃이 피고 지는 동안에도 꽃보다 책을 더 가까이하는 내 시간에 대한 평가도 시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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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청록 빛깔 모비딕, 브라운 빛깔 셜록, 핑크빛 앨리스의 고양이 등 포장팩 종류 많은데 빨강 머리 앤만 있어서 아쉬워요. 선택 항목을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모비딕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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