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全존재를 걸고 한판의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이 도박에선 자기만의 승리가 보장되는 자기만의 울타리같은 것이 없다. 오직 이기든지 패하든지 둘 중 하나다. 주인이 되든지 노예가 되든지 둘 중 하나다. 가치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아름답던지 추하던지 둘 중 하나다. 정의롭던지 부정하던지 둘 중 하나다. 진짜던지 가짜던지 둘 중 하나다. 이 도박판에서 나만의 세계, 울타리, 우물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 또는 중2병의 세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은 바로 중2병 취향에 그럴싸한 말을 입힌 것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선 세상 또는 타자와의 정면승부다. 그것에 비스듬히 서는 일은 없다. 비스듬히 서게 되면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정면으로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생긴 열패감을 그는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우주를 만들어 보상받으려 한다. 아인랜드식 자기탐닉적 사고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중2병이다.
진리는 전체집합이다. 총체성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총체성의 폭력을 말하곤 한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겁쟁이란 소리를 듣기 싫기 때문에 이들은 총체성과 위계적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한다(내파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계적 이분법을 탈피하는, 유일하게 실제적인 방법은 이분법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계/지위/권력을 파괴하는/무효화하는 것이다. 이런 도전이 전제되지 않은 한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하려한다는 건 결국 문제의 핵심으로부턴 비스듬히 서겠다는 말이다. (나름 위계적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자기만의 방/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만 놀겠다는 것이다.
전체집합이 아닌 부분집합이다. 부분집합 속에서 왕이 되고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이 아인랜드식 방식이다. 명목상 천재-개인과 바보-군중의 이분법이지만 군중과 천재는 이 부분집합으로 맺어져 하나의 갈라파고스섬이 된다. 아인랜드의 자기탐닉적 세계는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맥락이다. 서브컬쳐 취향 공동체 = 일본 갈라파고스 = 아인랜드의 판타지왕국... 이런 묶음.... 비주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적극적 선택의 결과인 양 하는 것. 일종의 여우의 신포도. 비주류는 보편성에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고 가짜이며 부정하고 추한 것이다. 다만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유효한' 싸움을 계속하는 한 그것은 적어도 보편성의 예비군이다. 하지만 싸움을 회피한 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비스듬히 선 채 회피한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다. 패배를 승리로 각색하려는 것, 그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아인랜드는 패배한 것이지만 그것을 마치 승리인 것마냥 뒤집어 각색했다. '정신의 승리'법.
연애도 마찬가지. 전존재를 건 도박이 바로 연애, 사랑이다. 그것에 비스듬히 선 채 연애를 하게 되면 결국 자기만의 방에 갇혀 버린다. 그/그녀와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자신과 연애를 하는 꼴이다.
복지국가와 그 불만, 복지국가는 세금을 요구하고 세금은 불만을 초래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의 사례,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수혜자였던 두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이 둘 사이에는 묘한 정신병리적 공통점이 있다. 맹렬한 자기애와 끝없는 공허함, 정서적이고 친밀한 관계맺기의 서툶이다. 소시오패스. 얄팍한 인간적 유대를 맹렬한 지위 추구(구별짓기)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구조? 보수주의는 이 병리적 심성을 보수주의를 낭만화하는데 얼굴로 이용했다. 시민사회의 동료의식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던 심성은 자기탐닉의 탈출구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를 적대적으로 배치시키는 워프를 경험하게 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는 복지국가 시민사회 속에서 원만히 녹아들지 못한 대중 심성들을 대표하며 보수주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도전을 막아내기 위해) 그런 심성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포퓰리즘과 보수주의의 접점이 생기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