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작년에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필자에게 최근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었던 탄핵정국은 역사적으로는 유감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정치학자로서는 ‘고마운’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상적 시기엔 10년이 걸려야 경험할 수 있는 한국 정치 지형을 며칠만에 압축적으로, 그것도 심층적 단면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탄핵정국은 여야 정치세력간 적대적 대립의 성격과 원인에서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민주적 대통령제로 이행해 가는데서 나타나는 한국의 삼권(입법, 행정, 사법) 분리 제도의 취약성, 사회구성 원리로서 헌법의 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잠재되어 있던 모순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마치 파우스트의 구절처럼, 이처럼 ‘푸르른 소나무’ 같은 현실은 지금까지의 회색빛 이론들을 다시 생명력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지로부터 집필을 요청 받고 이 글을 쓰는 총선 투표 다음날 저녁 현재, 온갖 신문지상은 정국 시나리오에 대한 경마식 보도로만 넘쳐흐른다. 마치 대장금 드라마의 스펙터클같은 선거의 마력에 취한 듯 대부분의 기사가 지금까지의 갖가지 제도적, 정치적 취약성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심화된 고민을 잊은 채, 주연배우들의 다음 행보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탄핵정국에서 나타난 제도적, 정치적 특성들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주체들의 선택이 가능하리라고 필자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하여 현실의 복합성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비록 필자의 이 글은 아직 충실한 선거결과 자료가 주어지지 않아 짧은 에세이에 불과하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작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선거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4․15 총선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한 단상을 기술하는 것을 통해 선거가 위치한 복잡한 현실의 일단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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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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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의미 I : 미국식 '다른 수단의 정칼의 패배와 탄핵후폭풍의 승리
탄핵심판론이 줄곧 주요 쟁점이었던 이번 총선을 그 직전의 탄핵정국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고일 것이다. 탄핵정국은 미국의 긴즈버그와 세프터가 부른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로 표현될 수 있다.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란 민주정치의 꽃인 선거에서 상대 경쟁 후보를 심판하기보다는, 권력이 분산된 정치체제의 일상적 국정운영 과정을 활용하여 선거를 치르지도 않고 상대를 패배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인사청문회, 특별검사의 기소를 비롯, 사법제도의 정치화와 탄핵 등이 이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미국의 1998년 탄핵정국이나 한국의 2004년 탄핵정국은 둘 다 거대 야당이 현직 대통령을 ‘반문명세력’(깅그리치 하원의장이 클린튼 대통령을 가리킨 표현)으로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주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의회의 회기 막바지에 이루어진 ‘다른 수단의 정치는 오히려 곧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거대야당이 역풍을 맞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놀랄만한 것은 두 나라 모두 현직 대통령의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예외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예상을 깨고 집권당이 하원에서 5석이나 더 얻었고 한국의 경우에는 아예 제 3당에서 과반수의 당으로까지 뛰어올라 민주화 이후 최초의 ‘단점 정부’(대통령과 의회의 다수당의 당적이 일치함을 말함)가 성립되었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투표율의 측면에서 세계사적 하강의 추세와 달리 16대보다 2.8% 가량 높아지는 이변까지 연출하였다. MBC-엠비존 조사에 따르면 20대 49%, 30대 56%의 투표율은 지난 2000년 16대 총선의 20대(37%), 30대(51%) 젊은 층의 투표율 보다 더 의미 있게 상승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반면에 40대(65%), 50대(67%)는 2000년의 40대(67%), 50대(76%)에 비해 투표율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e윈컴 4월 16일자). 이는 평소 주로 탄핵에 비판적인 젊은층이 높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투표에 참여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선거의 핵심적 의미는 탄핵가결과 같은 ‘다른 수단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했던 것에 분노한 민심의 표출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민심은 앞으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규정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법학자 브루스 애커만이 지적했듯이 고양된 시기에 나타난, 다수 민심이 결집된 의사의 표현은 헌법적 해석으로 투영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럴 때만 민주사회에서 사법제도가 귀족주의적인 기구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핵심기제로 작동할 수가 있다. 애커만은 민주사회는 일상적 법제정 과정과 특별히 고양된 시기에서 다중의 직접적 의사결집이라는 이원적(dualistic) 바퀴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바람직하다고 충고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다중의 의사결집에 부정적이기만 한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또한 탄핵정국과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나타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에 대한 비판적 민의를 어떻게 제도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앞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이러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를 단지 기존 거대야당이 수구적 세력이기 때문에만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비록 이번 탄핵정국의 경우에는 맞는 지적이지만 미국적 스타일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는 민주적 삼권분립이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는 바이러스로서 매우 ‘선진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 다른 수단의 정치가 빈번히 의존하는 특별검사제가 원래 정치개혁 아젠다로 미국과 한국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는 미국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앞으로도 한국 정치가 민주화될수록 빈번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철저히 추구함이 없이 단지 기존 거대야당의 체질 개선만을 기대한다면 이는 민의의 생산적 반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후 어떤 정당도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의 남발로 민주정치에 치명적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설계하고 공론화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의회를 단지 행정부나 사법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견제하는 방안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본인의 졸고, 「노무현과 클린튼의 탄핵 정치학」(푸른길) 참조).
선거의 의미 II: 거리의 정치의 패배와 ‘거여견제론’ 미디어 정치의 선전
비록 집권여당이 ‘단점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한나라당의 개헌저지선 확보는 기존 거대야당이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님을 또한 의미한다. 이들의 부분적 부활의 과정은 한국 정치지형의 현 단계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 우선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은 별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슈이지만, 탄핵 가결이후 ‘거리의 정캄가 어떻게 소멸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필자가 보기엔 ‘거리의 정캄가 소멸된 것은 담론적, 법적 차원에서 패배의 결과이다. 우선 담론적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헌법재판소의 법리적 판단을 기다리자는 지배적 담론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항적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도올 김용옥의 “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이다”는 선언은 비록 생경하게 들리지만 위에서 지적한 애커만의 이원적 민주주의론과 같이 고려해볼 문제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보수적 언론은 물론이고 자유주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대통령 구하기’의 의미를 내포하는 ‘거리의 정치가 바로 노무현 정부 스스로 강한 자유주의 정부를 지향하며 만들어 놓은 집회시위법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았다. 또한 선거가 다가오면서 열린우리당 같은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이 흔쾌히 합의하고, 진보진영이 미적지근하게 대응한 풀뿌리 민주주의 배제 및 미디어 정치 위주의 선거법에 의해 두 세력(자유주의, 진보)은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앞으로 선거법의 창조적 혁신은 주요한 아젠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거리의 정치가 진행 중인 와중에 총선 일정이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은 심각한 정치위기로의 발전을 근심하는 많은 정치학자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 연장선상에서 총선에서의 심판이 다가옴에 낙관적 희망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탄핵심판의 민의와 총선에서의 민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총선은 탄핵의 여부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정당, 인물의 경쟁이라는 독자적인 문법을 가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한나라당의 효과적인 담론 투쟁과 열린 우리당의 한계가 시작된다. 사실 정책, 인물 선거, 거여견제론이라는 담론들은 그간 수구적 정당 주도의 지역차별주의, 흑색선전 선거,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개혁적 담론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 개혁적 담론을 ‘공중납치하여 열린우리당의 탄핵심판론을 비이성적 바람의 정치로 규정하고 권력 견제의 필요성을 심는데 일정 정도 성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대선과 달리 한나라당이 미디어 정치에 썩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이다.
미디어 정치의 효과적인 전술은 감성의 정치, 사운드 바이트(몇 초 짜리 구호), 의사(擬似)이벤트(텔레비전을 위해 연출되는 이벤트)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박근혜 대표의 눈물광고, 거여견제론 구호, 전당대회 효과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특히 박근혜 대표는 이 세 가지 전술 구사의 중심에 서서 마치 미국의 엘리자베스 돌(밥 돌 상원의원의 부인)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쟁자를 연상시키는 온정적이며 기품 있는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효과적 전술에 힘입은 한나라당의 생존이 장기적으로 한나라당에 이익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영남지역에서 탄핵을 주도하였던 의원들이 모두 생존한 것에서 보이듯이 당의 근본적 체질 혁신에는 여러 장애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실언에서 비롯된 소위 노풍(老風)은 2000년 대선 이후 지속되어온 세대적 분열구도에 불을 끼얹으면서 급속도로 한나라당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의 실언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집권 이후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줄곧 취해온 세대적 갈등의 관점이 필연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기에 이는 단순한 실언이상의 지속적인 파괴력을 가졌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선거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노풍의 교훈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세대간의 갈등을 강조하는 관점이 곧 진보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적인 가치(시민적 덕성)를 중심으로 모든 세대들을 훈련하고 통합하는 문화를 창출하고 이를 위한 창조적인 제도적 방안들을 고민해야 한다. 선거 이후 각 정치세력들은 자신 나름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기반을 두어 통합의 정치를 추구할 것이다. 과연 어느 정치세력이 선도적으로 자신의 가치와 제도를 다수의 동의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주목된다.
선거의 의미 III: 진보정당의 원내진입과 보수정당 혁신의 시작
최장집 교수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냉전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이념적 범위가 지극히 협애한 보수독점적 정당구조가 지속되어온 한국정치는 사회적 요구로부터 괴리된 현상안주적인 무기력한 정당들을 양산해 왔다. 이는 정당 간 차별성이 부재한 속에서, 정책경쟁 대신 증오나 지역감정 동원의 정치가 만연하고 탈정치화를 부추기는 등 수만 가지의 부작용을 낳는 중심 고리로 작용해왔다. 이번 진보정당의 원내진입은 의석수의 단순한 산술적 효과를 넘어, 보수독점 양당 체제의 부분적 붕괴라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지닌다.
자세한 심층면접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보수적 지역까지 포함하여 10~21%를 상회하는 고른 전국적 지지표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계급적 승인이라기보다는 전반적 정치체제 개혁의 중심고리로 민주노동당의 역할에 대한 전술적 기대에 더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로부터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두 가지 이원적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
하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프로그램의 독자적 추구이다. 다시 말해 열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각각 자유주의 정당, 진보 정당으로 이에 걸맞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상호 치열한 경쟁과 시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위를 증명해야한다. 아마 이들은 정책입안 단계에서부터 풀뿌리 차원의 대중적 조직들과 결합하여 정책을 형성해가는 심의적 민주주의이자 운동적 정당의 모델을 전면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한국의 지식인들은 의회 내에서의 협력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할 뿐 제도권 바깥의 세력들간의 결합에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21세기 현대 대통령제는 제도권 바깥의 사회적 힘을 부단히 제도 네트워크 내로 투입할 때만이 건강한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지적할 수 있다. 애커만이 지적하듯이 미국의 민주당의 경우 이에 성공하였던 1930년대가 혁신의 시대라면 제도외적 연결이 느슨해지는 오늘날은 퇴조의 시대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전국적 지지의 민의가 의미하는 것은 이들 두 정당이 현 정치체제의 건강한 혁신이라는 과제에서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으로 이들의 건강한 경쟁과 협조 관계를 가로막을 가장 결정적인 암초는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민주노동당의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경직된 거부감일 것이다. 지난 일년간 노무현 정부의 활동엔 규제완화, 정치 영역 축소, 노동 등의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와,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서민의 절대적 대변자라는 포퓰리즘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왔다.
이는 1980년대 이후 남미, 동구 등에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유형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노무현 정부의 사회적 기반을 지속적으로 침식시켜왔고 그는 이를 노사모 등을 동원한 포퓰리즘으로 보완해왔다. 앞으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의 정치양식을 대체하는 모델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신자유주의에 전투적 저항의 관점을 가지는 민주노동당 간의 균열은 매우 증폭되리라 예상된다.
특히 한국의 자유주의 정당은 미국과 달리 비판적 지지세력으로 노동진영을 안정적으로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초가 더욱 취약하다. 이는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게 ‘다른 수단의 정치'를 구사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재신임 정국, 선거 기간에서 보이듯이 그간 자유주의 진영과의 제휴에 때로는 다소 유연하지 못한 태도를 취해왔다. 앞으로 그 제휴가 실패, 자유주의 정부가 흔들린다고 해도, 이 흔들림이 반드시 진보진영의 이익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막연한 정치환멸주의의 확산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주의적 포퓰리즘과 달리 조지 부시 현 대통령처럼 온정적 보수주의의 얼굴을 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길이 다음 한국 대선에서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암초는 노정권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민노당의 경직성
결국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의에 대한 파악은 단순히 탄핵심판이냐, 거여 견제냐의 표피적 이분법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민의에 대한 해석은 ‘역사의 결’(grains of history)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역사의 결에 대한 올바른 파악은 각 정치세력들이 무엇이 현재의 지형 하에서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해 준다. 또한 단순히 정파적인 이익을 넘어서서 탄핵정국에서부터 드러난 제도적, 정치적 결함들을 장기적으로 수정해나갈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함의 수정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각 사회적 세력들의 ‘구성하는 행위’(constituting act)의 결과이며 궁극적으로는 헌법(constitution)의 혁신으로 일차적으로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