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서 이념이 단지 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주된 기능은 그런 편협한 사리사욕을 고상하고 폭넓은 사회관에 결부시켜 그 본 모습을 적절히 은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하여 귀족파의 이념이 오늘날까지도 친숙한 느낌을 주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귀족파의 이념은 시대를 통틀어 유산계급의 지배를 미화시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과두세력은 특권층인 자기 계급의 이익을 민중의 이익과 같다고 내세운다. 키케로는 후대의 책략가들에게 이런 이론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공화정 사회 전체의 복지가 소수의 탁월한 지배층의 복지에 달려있고, 소수 지배층은 공적 문제를 현명하고 훌륭하게 관리하며 또 그들의 높은 지위는 그런 탁월한 능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둘째, 지배계급의 선전가는 이렇게 경고한다. 무상 양곡 배급, 집세의 한도 설정, 부채 탕감 등의 정책은 수혜자인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인 해이를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적 안정 계층을 희생시켜서 가난한 사람들의 낭비적 생활을 연명해주는 미봉적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 지배하는 소수는 재분배 정책이 사회 전체에 과중한 비용을 부담시킨다고 주장한다. 영세 농민에게 땅을 재분배하려 해도 그런 땅이 충분하지 않고, 또 양곡 무상 배급이나 어려운 평민의 고용을 위한 공공사업을 추진하려 해도 자금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돈이 없다는 얘기는 구실에 불과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 비용으로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과, 부유 계층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보조금은 무슨 돈으로 조달하는가.
넷째, 인신공격의 방식이다. 부자들의 지나친 탐욕을 억제하려는 대중적 개혁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할 수 없게 되자, 귀족파는 개혁가를 매도하면서 그들의 동기를 불순하다고 비난한다. 대중의 항의는 경제적 불공평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 할 수 없고, '계급투쟁' 즉 자기 지위를 강화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변덕스럽고도 파렴치한 민중 지도자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키케로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 지도자는 순진한 군중의 열정에 불을 지르기만 할 뿐' 일반 대중의 진정한 이익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런 지배계급의 이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암살자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들은 키케로의 그 밖의 '입헌주의자'들이 사심없는 미덕과 법률 위에 세워진 공화정을 크게 자랑스러워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를 역사가는 바로 그 '입헌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밥먹듯이 헌정을 중단시킨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영세 농민에게서 공공 토지를 사취하고, 해적처럼 마을을 약탈하고, 식민지 주민에게 중과세하여 가난으로 내몰고, 도시와 지방의 세입자들에게 지나친 임대료를 부과하고, 폭리의 고리 대금으로 채무자를 괴롭히고, 노예노동을 이용하여 자유노동을 위축시키고, 신탁의 점괘를 조작하여 평민의 의결을 방해하고, 최소한의 미약한 개혁조차 반대하고, 표를 매수하고, 끝없는 뇌물로 법정과 공직자들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평민과 그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행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결연한 공화주의자들의 참 모습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이다.
로마 귀족이 생각하는 '공화정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귀족을 위한 자유였다. 겉보기에만 공공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실은 귀족계급의 모든 특권을 지키는 자유, 어떤 비용도 부담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모든 특혜를 누리는 자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더욱더 부자가 되는 자유, 이런 것들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의 자유었다. 그 어떤 공화정의 겉치레를 달고 있든, 귀족제도의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소수 귀족 중심의 금권 정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부유충의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온건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차갑게 뿌리치고 있다.
마이클 파렌티, 카이사르의 죽음, (무우수, 2004) p.200-202
<초점> 美 전성기속 위기론 대두
[연합뉴스 2004-06-08 09:57]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특파원 = 미국은 건국이래 최 전성기인가 아니면 위기인가.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성계에서 `미국의 위기'를 주장하는 경보가 잦아지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나오는 위기론은 미국의 교육, 과학 등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자유와 인권이라는 `미국적' 가치의 위기는 물론 불평등 심화로 인한 미국 체제 전반의 위기 조짐을 지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에는 미국 대선을 앞둔 정파적 논란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게 사실. 그런가하면 위기론은 실제 위기라기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라는 미국 사회의 자정.교정 기능이 조기 발동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최고 전성기의 미국에서 로마제국의 성쇠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정치학계의 지도급 학자 15명은 7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사회 내부의 경제.정치적 불평등이 심화함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며 `체제 전반의 혼돈'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 정치학회가 2년전 시더 스카치폴 전 회장 등 15명으로 구성한 `불평등과 미국 민주주의 특별연구팀'은 2년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보고서를 통해 "불평등으로 인해 정치에서 배제된 없는 자의 무력감이 민주주의의 심장 자체를 찢으려 하고 있다"며 "부익부와 빈익빈 심화에 따른 무력감이 깊어질 때 우리에겐 결코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체제 차원의 혼돈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빈자의 정치참여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고, 인터넷 같은 기술진보도 정치와 정책결정 과정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리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정보 격차로 도리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가진 자는 공직 선거에 출마를 통해 선출된 뒤 정부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에 대한 계량적 분석 결과 명목상은 1인 1표이지만 부자 유권자 표의 힘이 빈자 유권자보다 3배가까이 클 뿐 아니라 선거후 최저임금제, 시민권, 정부 지출 등의 주요 입법 과정에선 이 정치적 불평등이 더욱 커진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경제와 투표행위, 기타 정치참여 및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분석 결과 ▲미국엔 부자 시민과 빈자 시민 두 계급이 있고 ▲공화, 민주 양대 정당은 기존의 특권층 사이에서만 공직후보를 충원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원의 감소로 노동자의 정치참여 통로로서 노조의 기능이 쇠락했고 ▲공익 시민단체들의 등장도 체제의 가진자 편향을 별로 바로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빈곤층 소수만 부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상향 이동만으로는 다수의 경제적 불일치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라며 "경제적 격차는 보통의 화이트.블루 칼라 직장인과 특권적 전문직, 경영자, 사업가들도 갈라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 발표에 앞서 6일 뉴욕타임스는 미국 대학의 졸업시즌을 맞아 저명인사들의 졸업식 축사나 기념사에서도 미국 사회의 불평등 심화와 시민 자유와 기본권 위협 등의 현상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암허스트대 앤소니 마르크스 학장은 "미국 인구를 절반으로 나눠, 일류대학 학생가운데 못사는 절반 출신은 10분의 1에 불과하고, 아래로부터 4분의 1에 해당하는 빈곤층 출신 학생은 3%에 지나지 않는다"며 "대공황기 이래 전례없는 불평등 사회로 향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 해설가 테드 코플은 "미 본토에 대한 생화학 무기 테러 공격이 있을 경우 계엄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기본권및 자유의 구속은 직접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이 위협의 성격과 범위를 미리 꼼꼼히 따져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 3,4월 9.11테러 조사위의 조사 활동을 통해 정보기관들의 `정보 실패'론이 집중 조명받을 때, 엄격히 분리된 수사와 정보 업무를 테러 위협에 대한 효율적 대처를 위해 통합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전 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총수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청문회장과 언론 기고문 등에 분출했었다. 당시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장은 "후세에 미국이 안보를 위해 인권을 버렸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같은 목소리는 희미했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도 한 대학 졸업식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때만 해도 작동했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이제는 미디어 합병, 탐욕, 이념의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 무관심으로 인해 크게 훼손됐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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