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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스24 |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갈등 설명못해
함한희 / 전북대·문화인류학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를 사로잡은 것은 두 가지 생각이었다. 20년 가량을 한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성실함에 대한 감동과, 두 왕조를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과 정교한 논리로 2백50년이란 기간을 연구하는 그의 스케일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이 우리가 통상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17세기 중반이 돼서야 정착됐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한국인들이 전통적 친족집단이라고 알고 있는 적장자 중심의 부계종족사회가 뿌리를 내린 것이 조선 중기 이후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는 양변적 친족제였음을 보여줬다. 저자는 신유학의 정착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과 조선의 엘리트들이 고려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장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비교문화적 관점으로 읽어낸 친족 변화 과정
한국의 친족의 변화과정을 분석하면서 저자가 남다르게 취한 연구방법은 사회인류학 이론의 적용과 비교문화적 관점이었다. 저자는 타자의 눈으로 본 한국 친족의 특징이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인 토양에서 나온 것임을 힘주어 말했다. 국내연구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흥미롭게 비춰졌던 것이다.
익숙해 보여서 우리들의 눈이 그냥 지나쳐 온 중요한 것들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한편, 감동과 경외감으로 읽은 이 역사서 위에 인류학자인 나의 낯선 시선이 몇 군데에서 멈추었다. 그 대목을 짚어보면서 앞으로 한국의 친족연구에 남겨진 과제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조선사회에 새로운 친족체계가 성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요인이 신유학의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친족연구의 분석차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사회인류학자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친족을 연구해왔다. 첫째는 친족용어를 분석해 친족분류의 특성을 살피는 일이었다. 둘째는 법이나 규칙을 통해서 친족의 제도적인 측면을 연구했다. 셋째는 사회 구성원들의 실제행위를 통해서 친족의 실천적인 면을 다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두 번째 차원에서 친족의 특성을 바라봤다. 고려시대의 친족용어를 잠시 언급한 부분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친족용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저자는 법전, 상소문, 역사서, 문집, 묘비명 등에 나타나는 관련 사료를 중심으로 친족구조, 조상숭배, 상속과 계승, 혼인과 상장례, 여성의 지위 등의 문제를 다뤘다. 따라서 친족의 제도적 측면과 규칙, 명분과 도덕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족연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세 번째 차원인 실천적 측면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이 법이나 규율의 구속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국가가 제시한 친족의 모델과 이상에 맞춰서 생활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한된 사료로 고려나 조선 사람들의 행동의 실천적인 측면을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사료의 부족에서 온다기보다는 연구의 관점과 방법에서 온다. 저자가 중시한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명분은 드러내지만,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가리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설명하는 근거라기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표현일 뿐이다.
구성원들의 실천적 행위를 중시하는 입장에 서면, 친족의 이상과 실제가 어떻게 갈등하며, 그들이 어디에서 타협점을 찾아내는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친족에 대한 사회적 지식이 드러나게 된다. 이 지식이야말로 구성원들의 물질적·상징적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진 것이어서 친족연구에 있어서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부안김씨 가문의 한 조상이 1779년에 남긴 상속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제사와 종족유지에 필요한 재산을 제외하고는 아들과 딸들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한다고 적혀있다. 적장자 중심의 부계종족집단이 정착된 지도 1백년이 지난 시점에 향촌사회의 양반들은 차자와 딸에 대한 관습적 상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처가살이의 관습도 여전해 사위들이 처족과 함께 살면서 자신들의 종족집단을 형성해 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상과 실제가 달라진 경우들이다. 이러한 차이가 지방과 계층에 따른 문화적 지체현상인지, 아니면 친족의식의 실제적 구현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왜 조선의 엘리트들은 고려의 양변적 친족조직 대신에 적장자를 우대하는 단계적 부계출계로 변화를 유도했을까하는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져 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신유학적 세계관의 완성을 들고 있다. 신유학에 심취한 조선의 지배계층이 주자가례에 바탕을 둔 종법을 완성시켜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가경농지가 축소되고 인구가 증가하는 등 양반층의 경제적 여건이 변화하면서 적장자 중심의 단계부계종족집단의 성립이 촉진됐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경제적 요인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조선의 친족제도가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려의 양변제의 성립과 운영체계가 설명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됐다면 혼인을 통한 연계(alliance)를 중시하는 친족사회에서 출계(descent)를 중시하는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좀더 쉽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이다.
양반 이외의 계층에 대한 연구 시급
이 책은 역사학자나 사회인류학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의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의 친족연구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책에서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봤다. 나아가서 앞으로 우리가 수행해야할 과제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류학자의 입장에서는 친족연구의 대상을 확대하고 분석의 차원을 다변화·다각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주로 양반층을 대상으로 친족제도를 연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부계종족집단의 출현이 비단 양반층에 국한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반 외 다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친족연구가 시급하다. 또한 법적 차원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구성원들의 행위를 직접 들여다보는 일도 친족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앞으로 역사학과 사회인류학 안에서 이 책이 남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란다.
"숲으로 조망한 조선의 친족사회"
권연웅 / 경북대·한국사
지금부터 약 6백년 전, 조선왕조를 창건한 유학자-관료들은 엄청난 사회개혁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고려시대의 친족구조를 유교의 모델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 후 2백여 년이 지난 17세기 조선의 친족제도는 고려의 친족제도와 전혀 달라졌으며, 중국과 일본의 친족제도보다도 유교적 이상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유교의 모델은 물론 가부장제였다. 따라서 동성동본 혼인의 금지, 여자의 재혼 억제, 서얼 차별, 제사와 상복, 양자와 상속에 대한 규제 등 유교적 가족제도의 여러 부분이 시차를 두고 확립됐다. 그 결과 고려시대의 부계+모계의 양계적 친족조직이 부계로 단일화됐고, 모계적 요소는 적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만 남았다.
이리하여 조선사회는 철저하게 서열화됐다. 친족집단의 구성원들은 남녀, 적서, 장유 등의 기준에 따라서 지위가 결정됐다. 이렇게 구성원들을 한 줄로 세운 결과, 친족 집단은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그 사회는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여성과 서얼이 가장 손해를 봤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이번에 번역된 저서에서 바로 이 주제를 다뤘다. 책의 원제는 '한국의 유교적 변환'이며, 부제는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연구'다. 한국이 유교화되는 과정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하는 문제를 다뤘다는 뜻이다. 1994년 백승종 서강대 교수는 이 책(원서)에 대한 정치한 서평을 쓴 바 있다.('역사학보' 141집)
한국 친족체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 책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췄다. 첫째는 사료와 기왕의 연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다. 저자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수많은 개인 문집과 예학에 관련된 유교 경전 등 약 150종의 사료를 아주 치밀하게 조사했다. 또 약 3백종의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는데, 여기에 국내의 연구성과는 물론, 일본과 미국 연구자들의 연구도 포함됐다.
저자는 거의 수도자 같이 엄격한 학문적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그는 약 20년 동안 한결같이 이 연구에 정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문헌들을 천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한 공력도 대단하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모두 철저하지만, 유럽(스위스) 출신으로 미국(하버드)에서 공부한 저자는 더욱 철저한 것 같다.
이 책의 둘째 미덕은 체계적인 연구방법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2백년 이상의 사회변화를 '유교화'라는 틀 속에 담았으며, 그 변화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사회인류학의 이론을 갈고 닦아서 이용했다. 또 조선의 사회변화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이를 같은 시대의 중국 및 일본의 사회와 비교했다. 그리하여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 올려놓았다.
이 점은 국내의 연구방식과 매우 대조적이다. 해방 이후 국내 학계는 민족과 계급, 근대화와 자본주의 같은 거대 담론 내지 거대 구조에 집착해, 가족제도 같은 주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 연구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개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사회과학의 분석 틀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비교사적 고찰은 거의 없었다.
가령 1980년대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분재기, 족보, 호구단자, 일기 같은 고문서를 이용해 혼인, 제사, 상속, 양자 등 가족제도의 여러 단면들을 밝혀 왔다. 그러나 단편적인 사례 연구에 치중하고, 이들을 구조화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최재석이나 이광규의 연구도 이러한 점이 빈약해, 해방직후에 김두헌이 간행한 '조선가족제도연구'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책의 셋째 미덕은 한국사를 보는 저자의 시각, 곧 우리와 다른 시각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사라는 숲을 숲 속에서 본다. 물론 숲 속에서도 선 자리(입장)와 보는 각도(시각)에 따라서 대상의 모습이 달라지지만. 저자는 태평양 건너, 대서양 건너 쪽에서 한국사라는 숲을 봤다. 그리고 저자가 본 한국사의 모습은 우리가 본 것과 매우 달랐다.
사실 국내 연구자들과 미국 연구자들이 조선시대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령 지배층에 관해서, 국내에서는 고려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출현해 기득권층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했다고 본다. 또 백년이 지나서 사림파라는 새로운 집단이 출현해 훈구파를 밀어냈다고 하며, 조선후기의 사회변동도 매우 강조한다.
국내 연구자들이 조선사회의 변화와 역동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미국의 연구자들은 사회의 안정과 연속성을 강조한다. 가령 덩컨은 고려-조선 왕조 교체기의 지배층을 같은 집단으로 보고, 와그너는 사화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질적인 집단으로 본다. 또 팔레는 조선후기의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인정하지 않으며, 노비제도가 19세기까지 존속한다고 해서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본다.
조선사회의 참모습은 변화와 지속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기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이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우리가 변화만 강조하고 지속을 외면했다면, 미국 연구자들은 반대 입장에 서서 우리의 역사 인식이 균형과 절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양반이라는 양지에만 초점을 맞출 때, 팔레는 노비라는 음지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요컨대 도이힐러는 우리의 일상인 가족제도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매우 다른 방법으로, 훨씬 더 입체적으로 선명하게 그렸다. 세부 묘사가 모두 정확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이 책이 한국 가족제도 인식의 지평을 바꾼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12년 전에 나왔으나, 어려운 원문을 제대로 이해할 국내 연구자들이 적었다. 이제 번역이 나왔으니,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의 유교적 가족제도는 해체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21세기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6백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새로운 모델을 찾고 이를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도이힐러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것을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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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회사원, 철학박사)
저자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창건되고 100년 동안 사회 문제와 관련해서 보기 드물게 방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저자의 의문 은 여기서 시작된다. 조선 초기의 입법자들은 “어떠한 사회제도 를 바꾸려 했는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한 것일까?” 저자는 그러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사회 구조와 조직을 부계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합리화하는 경향”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그러 면 우리는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변환은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 행해졌는가? 그러한 변환은 어떤 사회적 영향을 끼쳤는가? 부계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사회 구조와 조직을 변환시키는 일은 직접적으로는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다.
조선 건국에 가담한 입법자들은 종법제도를 철저하게 실시하고 친족의 범위를 좁히며 신유학에 근거하여 그것의 실천방안들을 새롭게 해석했다. 제사 는 남계 이데올로기를 살아있는 현실적인 사실로 바꾸었다. “제 사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출계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 한 사회적 의례적 기준을 규정하였다. 의례상의 지위 및 역할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상속권과 상복의 의무이다.” 제사는 상속과 직접 관련되었다. 재산을 상속받는 자가 제사의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속은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가 ? 저자에 따르면 “새 왕조가 열리고 처음 100년 동안, 상속제는 유교 입법자들이 추진한 사회 개혁 정강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 로 대두하였다… 종법을 강조한 새로운 법률은 상속 통로를 수평적인 것에서 수직적인 것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다시 말해서 “제사의 원칙은 장자를 우위에 놓고 동생들은 하위 에 두는 것이며, 이러한 위계 구조가 향후 재산의 분배를 결정하 였다.” 장자가 제사를 책임지게 되므로 이를테면 장자에게 재산 을 몰아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장자 우위의 원칙이 강조 되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재산 분배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
그러다가 “17세기의 경제적 요구들과 의례에 대한 관심이 합쳐 져서 세습 재산의 상속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세습 재산은… 조상들에 대한 부계 자손들의 적절한 제례행위를 지원 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성들은 제사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재산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경제적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결국 재산과 상속의 기제는 남성의 지배영역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건국 입법자들의 목표는 표면적으로는 유교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정치 적 또는 공공의 영역은 가(家)가 직접 확장된 것으로 보았으므로 집안에서의 구속 기준은 공적 세계의 기회에도 적용되었다.
출계집단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인정받는 이들만이 정치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유교적인 이상국가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실현시키려 했 던 것이며, 그들이 구상한 국가에서 부계 이데올로기는 가(家)와 국(國)을 일관적으로 이어주는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세웠던 원리가 현실 세계에서 구현될 때에는 철저한 배타 성을 띠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 들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하여 사회 정치적 질서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정치 적 사회적 우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앞서 본바와 같은 다양한 수 단을 동원했다.
그 결과 “세습 지위와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중성” 이 등장하였으며, “한마디로 사대부는 출계와 세습을 조선시대 정치 생활과 경제 자원을 독점하는 데 잘 활용했다.” 결국 여말 선초의 사대부들이 기획했던 것은 성인의 도의 실현이 아닌 사 회 엘리트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확립과 그것의 현 실적인 관철이었을 뿐이며, 그 여파는 21세기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조선 건국 공신 중의 한명인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논의되는 요즈음 한번쯤 돌이켜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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