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풍경과 마음 - 동양의 그림과 이상향에 대한 명상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푸코가 중국 백과사전을 보고 당혹해 한 것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류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인이 보기엔 당연한 분류법일 것이고, 반대로 중국인은 프랑스 백과사전의 분류법에 당혹스러워할런지 모른다. 백과사전이니 분류법이니 하는 것은 보편을 참칭하는 지적 체계인데, 이것이 각각의 문화마다 다르다면 우리는 어디서 보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푸코는 그 각각의 지적 체계들 밑으로 내려간다. 그것이 푸코의 용어로는 '에피스테메'요, 김우창의 정의로는 '생성적 원형 또는 매트릭스'다. 이는 우리의 언어-이야기, 문법의 바탕으로 각각의 (보편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기저의 잠재성(푸코 왈 '질서의 생존재' L'etre brut de l'ordre)이다.
이 '생존재'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화'란 흔히 말하는 포괄적 의미의 표면적 문화가 아니라 심층적 문화다. 이는 [미메시스적 차원의 문화]로 구분해도 될 것 같다. 있음과 뜻, 주관과 객관이 혼연, 일체, 미분화된 상태로서의 삶의 체험의 총체라고 정의하자. 김우창 선생은 동양화(혹은 풍수)는 서양화에 비해서 이런 미분성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본다. 이 未分的 일체 속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기와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체험, 초월과 안주의 실존적 욕망, 추상과 구상이 하나다. 그로 인해 동양화는 서양화보다 주어진 관습의 한계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미분성으로 인해 자기 문화에 대한 반성적, 비판적 태도를 보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화는 원근법과 소실점의 기법을 통해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으니 전자는 주체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방향성과 개인의 (미분화된 문화로부터의) 해방이고 후자는 개인이 실제로 살고있는('장소'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점으로써의 눈으로 환원(소멸)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의 역은 동양화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개인의 소멸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해방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개인의 해방은 관점의 (미분화된) 주관적 특수성(미성숙?)을 관점의 객관적 보편성(성숙?)으로 이행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이런 동서양간 차이는 결정적으로 서양에 '메조코스모스(중간 규모의 우주)'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양은 여전히 자연 전체로서의 마크로코스모스와 사사롭고 個物的인 마이크로코스모스가 따로 분리되어 병존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동서양의 풍경화에서 원경 중경 근경의 묘사방법의 차이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서양화의 경우 하나의 방향성 속에서 원경, 중경, 근경이 총체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지만 동양화의 경우 원경(혹은 총체적 유토피아 영역)와 근경(혹은 아주 사사로우며 사물적인 영역)이 뚜렷하게 표현되지만 그 중경은 안개나 구름 따위로 모호하게 얼버무려진다. 이는 묘사법의 우열의 증거가 아니라 동양화와 서양화가 서로 다른 성격의 그림(혹은 활동)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양화의 이런 특성은 보편적 이상과 현실적 삶을 매개할 해방된 주체의 부재로, 사회적으로는 절대권력과 일반민중 사이를 매개할 중간적 사회조직의 부재와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각각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들춰보이지만 그것이 통속적인 화혼양제니 동도서기론 따위와 같은 가짜 화해로 이르지도 않는다. 그의 길은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거나, 하나 중 좋은 것과 다른 하나 중 좋은 것을 조합하는 길이 아니다. 각각의 길 속에서 갈린 공통의 지반에 주목하고 그 지반에서 각각 어떤 무늬를 형성해가는지 면밀히 살피며 그 무늬 속에 새겨진 인간의 삶과 사유, 가능성과 한계를 공평하게 읽어내는 길이다. 이는 다양성 속에서 모든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보이는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