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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이영석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영국 역사에서 '근대'로의 진보를 분명히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대체로 근대라하면, '근대적 주체', '시장주의', '자본-축적', '산업주의', '합리성', '국민적 정체성' 등을 지표로 삼는데 저자가 직접 영국에 가서 찾아보니 어디에서도 그 지표적 언어들을 명확히 만족시켜주는 바를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푸념을 다시 기억해가면서 이 책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를 보면서 정반대의 방향에서 공유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저자 중 한 분인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은 '동아시아에 봉건제는 없었다'라고 단언했던 분이다. 과거에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서구적 진보 사관의 틀 속에서 노예고대/봉건중세/산업근세로 단계적으로 이해되던 시각이 잘못임을 주장한 것이다. 서구의 진보 사관을 믿고 영국으로 날아갔던 한 학자는 막상 도착한 곳에서 진보의 역사가 사실상 희미한 것임을 알게 되고 반대로 진보 사관에 근거하여 근대적 모맨텀이 미약했다는 자기 비하가 판치던 이곳에서는, 알고보니 실상 과거에 봉건제란 아예 없었더라는 식의 깨달음 사이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공저자들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를 '소농사회체제'로 명명한다. 농업생산성의 급속한 증대로 발달한 향리층이 주자학과 과거제로 구성된 중앙권력과 연관을 맺으며 조선의 양반이나 중국의 향사층을 낳았지만 서구 봉건제에서 나타나는 거대토지귀족은 부재했다. 이는 서구에서는 이 귀족들이 국왕을 견제하는 의회제의 기반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서구적 근대 모델이 동아시아에서 부상하지 못한 이유가 될 수도 있으나 동아시아 전통 사회를 단순히 '봉건 사회'라고 딱지붙이기는 힘든 형국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근대적인 양상이 동아시아가 서구보다 훨씬 더 빨리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혼자 앞질러가기는 금물!)
이 책은 국민사, 일국사, 왕조사, (서구적) 진보사의 관점에 지나치게 함몰된 기존의 역사 서술에 대한 썩 좋은 대안으로 읽힐 수 있다. 15-16세기는 이전 시대로부터 증대된 생산성과 국제적 교역에 힘입어 동아시아적 퍼스펙티브가 형성되던 시기로 조선 시대의 혼일강리전도로 함께 소개되며, 새롭게 부상한 양반과 향신층의 강면하고 활기찬 기풍이 형성된 시기로 자리매김된다. 17-18세기는 본격적으로 현대 중국과 한국과 연결되는 전통의 형성기로, 기존의 기풍과 체제가 변질되는 국면과 함께 한다. 여기서 청나라 중기의 소설 홍루몽은 지방 향사층의 심성 변질(?)의 증표가 되고, 조선의 경우에는 신분질서의 동요와 함께 雙系적 동족집단에서 父系중심적 동족집단으로의 변질에 주목받는다. 개인적으로는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이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지방 향안에 대한 미시적 탐구로 거시적 변화까지 포착해내는 부분이 좋았다.
본의 아니게 리뷰가 좀 건조했던 듯 하다. 그러나 책마저 건조하지는 않다. 거시적 시야과 함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도 풍부한 책이다. 개론적 책이지만 개론서다운 따분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한중일의 가족 집단의 성격(집, 지아, 이에)을 비교하여 중간집단이나 문화와의 연관을 추론해 본 부분은 정말 흥미롭다. 덧붙여 공저자들의 지상 대담도 함께 싣고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다. 혹여나 중국과 조선을 한 눈에 포착한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흉계라며 엉뚱한 트집을 잡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