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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는 열정 -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
마크 릴라 지음, 서유경 옮김 / 미토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 마크 릴라는 20세기의 다양한 저항 이데올로기들 - 공산주의, 파시즘, 제3세계 및 여성 해방운동 등 - 을 (근대 자유주의의 '건전한' 전통을 와해시키는) '전제-애호 성향'이라고 통칭하고, 이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전통적 설명방식은 대체로 사상사적 방법이나 지식사회사적 방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법에는 이샤야 벌린의 비정한 합리주의 운동 비판이나 야콥 탈몬드의 종교적이며 비합리적 열정 비판, 후자의 방법으로는 하버마스의 독일 지식 사회의 정치적 미숙성에 대한 비판이나 레이몽 아롱의 프랑스 지식 사회의 정치종속적 경향 비판이 있었다.
반면 마크 릴라가 선택한 것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닌 (레오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답게) 고전적 전범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는 플라톤, 디온, 그리고 디오니소스 2세의 고전적 이야기에 기대어서 20세기 전제-애호 경향의 지적 흐름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디오니소스 2세라는 '유사 철인왕'을 <전제-애호>로부터 구해내는 덕목은 '중용'과 '절제'다. 디오니소스 2세는 '자기 자신을 잡아늘이려는' 심리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절제를 상실했고 중용은 깨어졌으며, 그의 정치는 전제정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상정한 고전적 인간 모델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양 방향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생산'하고자 하는데(이를 Eros라고 부른다), 이 염원의 현실화 과정에서 고귀한 것과 천박한 것을 구별해내는 '통제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이 통제력을 상실한 자는 '지상에 가장 가까운' 전제자의 영혼으로 타락하게 되고, 그것을 지킨 자는 '천상에 가장 가까운' 철학자와 시인의 영혼으로 고양된다고 본다. '사랑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바 - 영원한 진리, 정의, 미, 지혜 -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담은 통제된 에로스의 삶'이 저자 마크 릴라가 제안하는, '분별없는 열정'에 대한 대안이다.
그가 20세기로부터 추출한 전제-애호 경향의 철학자들은 이런 고전적 전범에 의거해서 선별, 비판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김형찬씨의 서평 참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의 접근법이 얼마나 호소력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고전적 전범에 의거한 심리적 유형론이랄까? 훈고학 냄새가 짙게 나는 이런 식의 설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 릴라가 선별한 이 철학자들을 역사적 맥락과 심리적 맥락에 함께 엮어넣어 살펴보는 것이 전혀 무용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 특히나 그의 '세속주의적 이성'을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분별과 열정의 긴장, 민주정과 전제정의 유혹 등의 문제는 지금도 많은 지식인들을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문제들이다. '열정적으로 사유'하면서도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균형감각에만 너무 몰두하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한국의 노련한(?) 정치가 '김종필'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음을 알게 되는 당혹감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