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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9년 차이의 스콧과 헬렌.
1932년 뉴욕 생활을 청산한 니어링부부는 미국 버몬트 남부로 이주해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을 택한다.
이들이 버몬트로 이주하던 당시,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불황이라는 세계 정황이 이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시생활에서의 불안정한 생활을 떠나 조화로운 삶,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넉넉한 삶을 꾸리는게 그들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우리는, 불황과 실업의 늪에 빠져서 파시즘의 먹이가 되어 버린 사회를 떠나 버몬트로 이사했다.
이것은 시대의 특별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p.4머리말에서
부부의 삶은 어떤 이들에 의해 '도시에서 경제수단을 잃은 패배자들의 도피'라고 매도되기도 했지만
1932년~1952년에 걸친 스무해 그리고 이후 메인의 하버사이드에서 여생을 마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물질 문명에 저항하고 자연주의로 살았던 니어링 부부의 삶을 들여다 볼때
그것은 '도피'가 아닌 차라리 '저항'이자 '혁신'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어쨌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또 인간으로서의 삶에의 조화를 이루며 그들 스스로가 만족하며 삶을 마감했다면
개인적으로는 분명 성공적인 삶이었으리라.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목표였다. 스코트와 나도 지난 반 세기 동안 그 일에 참여해 왔다.
전체로 보면 우리가 그것에 기여한 것은 얼마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해 쉰 해가 넘는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어 갔다. -p.217
이 책엔 부부가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세운 삶의 원칙과 집짓기, 먹을것, 살림 꾸리기가 소개돼 있다.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막연히 시골생활을 동경해 귀농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모든 일들에서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는 점이다.
그들 스스로가 정한 열 두가지 삶의 원칙은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경험이나 형편에 따라 때론 고쳐지기도 하지만
그 원칙 하나하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부부가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데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원칙을 살펴보자면~
필요한 것의 절반쯤을 자급 자족할 것, 필요한 것들을 손수 생산할 것,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가진 돈만으로 치를 것,
능률적으로 단풍 시럽(수입의 대부분)을 생산할 것, 아무것도 내다 팔지 않을 것, 집짐승을 기르지 않을 것 등등이다.
도시민으로 산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 이윤 추구의 경제에서 될수 있는 한 벗어나 자족하며 낭비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들 삶의 대원칙이 아니었을까.
부부가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들 가까이 머물렀던 이웃들의 삶은 그럼 어떠했을까?
버몬트의 이웃들은 우리가 이렇게 계획에 따라 짜임새 있게 사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이들은 아무렇게나 대충대충 사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그이들은 대개 정오에 점심을 먹었는데, 밖에서 일을 하거나 외출할 때가 아니면 그것이 하루 가운데 딱 하나 정해진 시간이었다. 나머지는 제멋대로였다. 그이들은 보통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지만, 무슨 일이 있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일하러 나가려는 마음을 금방 거두어들였다. 누군가 자기 집에 찾아오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손을 놓고 수다를 떨었다. 어떤 때는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일할 마음이 생기면, 그 때 기분에 따라 일 거리를 정했다. 일을 마치면 그이들은 쓰던 연장을 그 곳에 버려 두고 돌아왔다. 다시 그 연장을 쓰려고 할 때, 그것을 찾아 반나절을 헤맬 때도 있었다. 아침에 비나 눈이 올 것처럼 보이면, 그 곳 사람들 말 그대로 '퍼질러' 앉아 있었다. -p. 62
책에서 니어링 부부가 기술했지만 그들의 이런 생활을 볼 때 공간적 잇점만 가지고서는 그 삶이 저절로 조화로와 지는 것이 아닌게다.
그들이 버몬트를 택한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을 삼기 위함이 아닌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기 위함인데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웃들은 먹고 사는 것에 그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조화로운 삶은 물질적인 내 몸을 단순히 그럴듯한 공간에 둠으로써 저절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농촌이나 산촌으로 가면 그런 삶이 쉽게 살아지리라 여기겠지만)
사는 것, 먹는 것, 생각하는 것, 몸을 쉬는 것 등 내면과 외적 환경이 고루 균형을 이루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을때 이루어지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스스로 원하기만 하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음은 책에 수록돼 있는 피터스가 남긴 말이다.
"내 생각에, 자연은 사람이 삶을 이어 가도록 세 가지를 주었다. 먹을 거리를 기르는 땅, 세간 살이를 만드는 나무, 집을 짓는 데 쓰는 돌." 피터스, 《돌집》, 1933년
피터스가 남긴 말을 볼 때 사람이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외적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 또한 도외시 할 수 없는 요소인것 같다.
니어링 부부 또한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먹을 거리를 기르는 땅에서 먹을 것을 얻고 세간 살이를 만드는 나무로 세간 살이를 만들어 사용하고
집을 짓는 데 쓰는 돌로 돌집을 지어 생활했다.
이들이 집을 짓는 재료로 돌을 택한 까닭은 돌이라는 것이 땅과 조화를 이루고 둘레 풍경과도 잘 어울려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는데 있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돌집 짓기'에 할애돼 있고 그 과정 또한 지나치리만치 세세하게 기록돼 있어 읽는 이로서는 지루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기도 한데
그만큼 '집짓기'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 그들이 지향하는 삶과 서로 통하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듯 보인다.
부부는 20년 동안 버몬트 숲 속에 머물면서 무려 열 두채의 돌집을 지었다.
돌집 짓기에 이어 가장 많이 할애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은 '농사 짓기'이다.
이 또한 자연과의 조화임은 분명하다.
돌집 짓기 다음으로 다루고 있는 '농사 짓기'는 반복해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공식품 같은 편리성을 쫓은 음식이 현대인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지금은 그 유해성이 너무도 명백한데
니어링 부부는 이미 그러한 점을 염두해 두고서 그들의 원칙을 세워 농사를 짓는다.
한 해에 석 달만 서리를 피할 수 있는 밭에서 곡식을 가꾸어 한 해 열두 달 먹을 것(버몬트의 기후상),
가공하지 않은 신선한 음식만 먹을 것,
완벽한 밥상을 차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채소와 곡식을 가꿀 것,
땅에서 거둔 것을 통조림 따위로 만들어 보관하는 일을 되도록 줄일 것.
이 원칙들을 요약하면 가공하지 않은 신선한 제철 음식을 먹을 것이 되겠다.
'농사 짓기' 편이 다 흥미로운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산비탈의 비스듬한 열악한 환경의 농경지를
중국이나 아시아 여러나라를 모델링해 계단식 논을 만들어 경작했다는 점과
그때까지 서양인들이 사용하지 않던 퇴비를 사용했다는 점인데 이 퇴비경작은 한국인들의 경작에서 차용한 것으로 나온다.
니어링 부부의 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자면 소위 말하는 ‘신토불이(身土不異)’ 딱 그것이다.
땅을 죽이는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얻은 퇴비를 사용하면 그 땅에서 나오는 산물 또한 최상의 것을 인간에게 준다는..
추운 계절이 긴데도 제철 채소를 늘 먹을수 있는 방법과 최상의 땅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농사 짓기'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어찌보면 이 부부의 삶이 이웃의 시선처럼 참 유별나 보이기도 하는데 그들이 그럴수 밖에 없는 이유인즉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책의 말미에 다룬 것은 「버몬트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부부는 '버몬트에서 산 것'에의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비뚤어진 세상에서도 바로 살 수 있다는 본보기로서.
여러 가지를 따져 보아도 사회와 만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기회로서.
지금의 사회 질서에 대해 얼마쯤 바람직한 대안으로서.
정치에 대한 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 남과 다른 사람에게는 피난처로서.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 열심히 산 사람들이 더욱 성숙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으로서.
자기 일과 취미 생활을 동시에 하면서 슬기롭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로서.
이들이 산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독자는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니어링 부부의 삶은 자신들이 말한 그대로의 가치를 지녔다고 공감해 줄 수 있을것 같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필요치 않은 온갖 물질에 둘러싸인채 필요 이상의 것을 욕심내며 자본획득에만 곤두서 있는 이 비뚤어진 세상에서
그렇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충분한 본보기가 되었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연 훼손 쯤은 감수하는 세상에서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최상의 것을 주고 받을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해 주었으며
젊은 시절 대도시에서 한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노후일지라도 적당한 노동과 함께 여유를 즐기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낼수 있는 삶으로의 충분한 초대가 되었음은 분명하기에.
그렇다면 이루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부부의 '조화로운 삶'과 함께 그들은 지역공동체를 꾸리려는 목적이 컸던듯 하다.
하지만 공동체의 특성상 같은 마음을 품는 것에의 한계로 인해 그들은 '이루지 못한 것'의 품목으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잣대로 봤을때 그들의 삶은 소정의 목적하는 바를 엄연히 이루었다고 말할수 있겠다.
남편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의 삶을 향유하고 스스로 택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고
헬렌 니어링 또한 교통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며 살았으니 말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눈을 감기 전 아내 헬렌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소. 여보, 당신은 매우 훌륭한 동료였소. 매우 사랑스러운, 정말 만족스러운 삶이었소.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거요. 좋고, 또 좋았소...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소...”《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1997》
모든 삶을 내려놓는 즈음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고백하는 스코트 니어링의 이 글귀는
바쁜 일상속에서 기계의 부속품 같은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듯 하다.
이들의 삶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100여 년 전이니까, 미국이니까, 아이가 없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었겠지.
이런 우리를 예상이나 했던듯 첫 장에서 부부는 이렇게 도전을 던진다.
많은 이들이 월급에 기대어 먹고 살며 도시의 아파트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사람들을 살기 힘들게 한다.
그래서 자기를 옭아 매고 있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데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기를 꿈꾼다.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식구들과 친구들의 걱정 어린 충고와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러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내고,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정말로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땅을 일궈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
힘든 농사일을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은 게 아닐까?
시골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누구한테서 배워야 할까? 내가 살 집을 과연 내 손으로 지어 올릴 수 있을까?
밭뙈기를 일구어서 밥상에 먹을 거리를 올려놓을 수 있을까? 집짐승들도 길러야 하지 않을까?
농사일에 얼마나 얽매여 살게 될까? 시골 일은 내 허리를 휘게 만드는 또 다른 중노동이 되지 않을까?
도시 생활과 결별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몇백 가지가 넘는 이런 의문들이 머리를 채우기 마련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우리 두 사람이 쓴 것이다. 나이가 스무 살에서 쉰 살 사이이고,
건강과 지혜와 돈을 아주 조금밖에 못 가진 부부라 해도 누구든 충분히 시골 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고 우리 두 사람은 믿는다.
음...니어링 부부가 손수 조화로운 삶을 살았고 나 또한 그 삶을 동경하며 동참하고픈 욕구 또한 강하지만
아직은 현실에 부딪힌 여러 문제(핑곗거리)가 발목을 잡는다.
달리말하면 '조화로운 삶'에의 동경이라고는 하지만 문명에 물든 이 삶에의 결별이 두려운 까닭도 분명 있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조화로운 삶'이 결코 얼렁뚱땅 살아지는 그런 삶이 아닌
치밀한 계획과 치열하리만큼의 결단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삶이기에 그들처럼 자발적 가난으로의 행보는 그리 쉽지 않을것 같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작이 이 시대에 힘을 갖는 이유는
분명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기에,
지나버린 과거의 어떤 삶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지금에, 아니 다가올 미래에 일말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닐까.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당신 부부를 만나 행복했습니다.